마태복음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6장25절-34절)

남수연 2015. 6. 2. 14:45

지난 주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났더군요.

박씨라는 사람이 부산 해운대 등 해수욕장 모래밭을 금속탐지기로 뒤져서 금반지, 귀고리 같은 금붙이를 찾아 챙겼다는 기사였습니다.

귀금속을 자꾸 내다 파는 걸 수상하게 여긴 사람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이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박씨에 대한 동정심이 들끓은 이유는 그렇게 수고해서 번 돈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박씨는 인터넷 중고품 사이트에서 250만원을 주고 금속탐지기를 사서 4개월 동안 밤마다 전국 백사장을 뒤졌습니다.

드넓은 백사장에서 반지 하나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벌어들인 돈이 총 38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모래밭을 밤새 뒤져 넉 달 동안 벌은 수입이 기계 값 빼고 나면 고작 130만원 밖에 안된겁니다.

이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처음엔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고작 그걸 벌려고 4개월간이나 깜깜한 모래사장을 뒤지고 다닌 걸 생각하니 참 서글픈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네티즌들의 마음에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은 것입니다.

다들 이렇게 허리도 못 펴고 고생을 하지만 정작 손에 쥔 것은 몇 푼 안되는 자기 삶의 비애를 거기서 느꼈겠죠.

우리가 힘들게 일해서 월급타고 나면 이래저래 쪼개져 나가고 나를 위해 새구두 하나 마음대로 사 신을 여유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항상 돈이 문제인 것 같죠?

돈이 좀 더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고, 지금의 이 고생도 좀 훌훌 벗어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상황이 지금 이렇게 불행해진 중심에는 돈이 분명히 들어 있죠.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시는 것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등골이 휘게 일해 봤자 로마의 관리들이 다 털어가 버리고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역시 삶의 근심이 다 쓸 돈이 부족해서 생기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왜 몰려 왔게요.

이 노예 같은 생애에서 해방 될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겠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면 먹고사는 문제는 이제 해결되리라는 기대감으로 꾸역 꾸역 몰려 들어온 것입니다.

신자들이 처음에 교회에 오는 이유도 처음엔 비슷합니다.

복을 받을 기대감과 힘든 문제가 좀 해결될까 해서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똑같이 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과 하나님을 저울질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내가 누굴 더 의지하고 있는지 딱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살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실은 돈을 주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돈을 주인으로 까지 모시고 산다는 게 과장된 것 같으십니까?

실제 사람들이 돈에 노예가 되어 살고들 있잖아요.

통장에 돈이 좀 모이면 행복해지고, 지갑에 돈 떨어지면 불안해지고, 돈만큼 누가 우리를 지배합니까?

하나님도 그 정도까지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하신다니까요.

제가 지금 백만원씩 드리면 아마 당장 큰 은혜 받으실걸요?

오늘 본문은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냐, 돈이냐 하는 말씀이 그러므로로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느냐와 삶의 염려가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해 의식주에 염려와 걱정이 많은 사람은 돈을 섬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다면 자꾸 눈에 보이는 현실을 염려하는 습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을 잘 보면 돈을 주인으로 좇는 사람들이 돈 벌고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이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걸하다시피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도 끄떡 없다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부터 챙기면 둘 다 잃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챙기면 둘 다 얻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하나님 위에 있으면 그 인생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번 돈은 반드시 마귀에게 이용당합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크던 작던 거의 불의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짓게 되니 당연히 끝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버는 돈은 완벽합니다.

잠언10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뒷탈이 있을 리가 없고 부를 선하게 사용하기에 근심거리가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하나님과 우선 순위가 바뀌면 돈은 인간을 무섭게 파괴합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우선이 되면 생명과 구원을 등한시 한다는 걸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하나님 없는 돈 만큼 황홀하고 무서운 적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물론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지금 우리나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당장 발등의 불인데 돈버는 게 우선이지 어떻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느냐, 당장 내일 갚아야 할 돈과 날아온 고지서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냐?’

예수님이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몰라서 이런 말씀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자그마치 6명의 동생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던 분입니다.

목수일로 대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 예수님인들 만만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이깟 먹고 사는 문제에 뭘 그렇게 마음을 쓰냐, 그렇게 건성으로 말하지 않으십니다.

34절을 보면 내일 일까지 미리 염려하지 말아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생활고가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짐을 가볍게 하고, 그 짐을 덜고 살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방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서 돈 벌려고 애쓰는 것 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내 삶에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것을 우선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 땅의 문제는 더 쉽게 풀린다는 것이죠.

물론 이 말씀이 세상에서 아무 경제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의 경제활동도 극대화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이치를 알았다면 어떻게 그게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지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당장 현실적인 경제 문제로 염려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은 당연히 아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염려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몇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먼저 자꾸 생활의 염려가 엄습해 올 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리 없어져도 표도 안 날 공중의 새를 열심히 기르시고,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는 들꽃을 가장 예쁜 색과 모양으로 입혀주시는 인자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욥기 3841절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이게 하찮은 미물까지 아끼시고 동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바울사도가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그리스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 모두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셨죠.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느니라.

불신자들까지도 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금수와 초목과 불신자들까지 돌보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로 씻어 자녀가 되게 하신 우리를 모른 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그것을 좀 생각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고백된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내 마음 속에서 꺼진 줄 알고 있던 염려의 불길이 다시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하신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풀을 입히신 것처럼 지금까지 나를 돌봐주고 위기마다 피할 길을 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늘 이 문제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보라’, ‘생각하여 보라이렇게 계속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예수님은 염려 앞에서 과거를 생각해 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너희가 염려한다고 그 키가 한 뼘이라도 자라더냐는 것입니다.

과거에 염려해서 해결했던 일이 있는 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염려해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염려를 주는 문제는 내 능력 밖이라는 소리입니다.

어차피 염려로는 일이 해결 될 수는 없으니 염려까지 더해 괴롭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염려가 습관이고 생각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가 나쁜 것은 염려는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현실 에 점점 의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걱정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에 해롭기만 한 걸로 끝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불신하게 되는 게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다면 염려하지 말고 오늘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과 해결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눈에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더 분명하고 불변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다 처음보다 그런 믿음으로 삶의 염려들을 조금씩 이겨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다들 만만찮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 성도님들 얼굴 보면 얼마나 밝고 어여쁘신지 모릅니다.

짐짓 겉으로 그렇게 꾸민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근심거리는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편하고, 밤에 그래도 잠이 오고 근심에 찌들지 않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을 은연 중 알도록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을라고 애를 쓴다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근거가 없어도 그렇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소망의 빛이 보이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듭니다.

우리가 그렇게 근거없이 난관적인 사람이 아니잖아요?

작은 근심하나에도 얼굴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고 불안감에 안절부절 못하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우리의 보호자와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삶의 걱정과 염려를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계속 잘 되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같은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안합니다.

아무리 어린 윤우도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에게 아빠라고 안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같지 않으니까 기도도 안하게 되고 내 앞 날이 안심도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내 보호자가 되시냐는 것이죠.

그걸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고 돌봐주신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믿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증표는 예수님께서 수도 없이 말씀하셨고 성경에 기록된 그 말씀들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를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독생자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예수님이 인증샷을 눌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전능자의 보호를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처음엔 이게 말이 되나 싶은 낯설기만 진리가 성경을 배워갈수록 점점 수긍이 가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게 진실과 진리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게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깊이 자각하게 하십니다.

그 때 비로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눈물로 감사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이런 중에 그동안 의심하고, 불안하고,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이 나의 창조자이고 보호자라는 사실이 드디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믿음의 시작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 문제는 풀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신가 막막해지고, 아찔해지고, 휘청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시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겠습니까?

나와 하나님이 어떻게 관련이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는 생각이 무얼 근거로 들겠습니까?

우리는 망상을 믿을만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을 떠나 온갖 불행과 저주 아래서 살던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다는 이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이 이제 내게 부어지셨다는 것이 또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의 연속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내 앞에 무슨 재앙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사라집니다.

내 모든 삶은 하나님의 선하신 관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이 무엇이든 주신다는 게 믿어지는 것이죠.

실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것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지금 그것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선한 결과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 결과는 반드시 내 영혼에 선한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를 단 한 점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불의하고, 변덕스럽고, 하지도 못할 일을 해주겠다고 생색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내주시고 기꺼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말 안 해도 다 아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아버지를 예수님의 말씀과 모든 행적을 통해 확신해갈 때 생활의 염려와 물질의 부족에도 불만하지 않고 자족하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면서도 만족한 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먼저 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왕으로 인정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내 삶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계획과 미래와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실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 때 내 생각과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의로운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산상수훈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하나님나라의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다 나와 있습니다.

요약하면 한 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고 내 것만 챙기려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지 않으면 단 돈 천원도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선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해주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로 구하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년 치를 미리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양식이 부족해서 매일 벌어다 먹이시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아버지 앞에 나가서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경제활동을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길 기도하고, 우리 손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점점 더 깊은 관계성을 얻게 되는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한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일은 오늘 해결되고, 내일 일은 내일에 가서 또 해결됩니다.

미국 디트로이트 철로 변에 한 가난한 한 흑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못받고 자란 소년은 반에서 꼴찌를 했고 모두에게 놀림거리였습니다.

소년의 성적표를 받고 생각에 잠긴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하나님은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후히 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도대체 너희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어 봐야 겠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TV는 매일 두가지 프로만 보고 일주일에 두 권씩 책을 읽어라. 그리고 독후감을 써서 엄마에게 큰 소리로 읽어다오.’

소년은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어느날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돌을 하나 보여주며 이 돌의 이름을 아는 사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때, 소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소년을 조롱하며 우스꽝스런 답변을 기대하며 술렁일 때 소년이 말했습니다.

그 돌은 흑요석입니다. 용암이 분출될 때 갑자기 냉각되어 생기는 돌입니다.’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소년은 고등학교를 전교3등으로 졸업하고 예일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하던 대로 지혜가 부족할 때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의료선교사가 꿈이었던 소년은 후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최초로 샴 쌍둥이를 분리 수술에 성공했던 벤 카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해결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샴쌍둥이 수술의 업적도 일주일에 책 두 권씩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막막한 미래와 태산 같은 문제들도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고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장래에 대한 고민과 결혼문제, 자녀문제, 병에 대한 염려들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록 맡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굶어 죽었다는 사람 들어 봤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한 끼 먹던 사람이 두 끼 먹게 되고, 두 끼 먹다보니 세 끼 다 먹여주시더라는 게 우리 모두의 간증 아닙니까?

먹고사는 문제로만 아등바등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할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지 못한 교회 밖의 사람들은 먹여 살리실 아버지가 없으니 자기 힘으로 죽어라고 삶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이 주시는 모든 계명들을 내 삶의 유일한 행동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와 우리 자녀들과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2015년5월3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