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소금과 빛(마태복음5장13절-16절)

남수연 2015. 1. 26. 14:45

예수님은 세상을 향한 신자들의 역할을 오늘 두 단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소금과 빛입니다.

소금은 짠 맛으로 음식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것이고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르게 말하자면 세상은 부패되고 있고 또 어둡다는 뜻입니다.

그런 세상에 대해 우리가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십니다.

뿌듯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 상당히 부담스런 말씀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둠을 비추고 하는 일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나 하나 책임지기도 벅찬 데 어떻게 다른 사람 사는 것 까지 참견하며 살겠냐는 생각이 들죠.

요즘 같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에서 남을 간섭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절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나 혼자 조용히 내 신앙이나 지키겠다는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오늘 지시 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혹은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십니다.

원하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세상 속에 소금이 되었고 세상 속의 빛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는 저절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의 소금이고 교회 안에서만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무슨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 수 도 있고 그런 피곤한 삶은 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신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값어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고생도 감수하고 희생도 기꺼이 치릅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매일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라고 한다면 결국 우울증과 권태와 무의미한 삶에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아무 부담 없이 집에서 마냥 뒹굴다 보면 한없이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나중엔 TV도 지겹고, 소파도 불편하고, 결국 못 견디고 옷을 줏어 입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에 전화로 대학의 기부금을 접수하는 콜센터가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접수한 기부금으로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전화로만 사람을 상대하다보니 사기도 떨어지고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책임자가 아이디어를 내서 직원들과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을 직접 만나도록 기획을 했습니다.

그러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평균 기부금 모금율이 3배로 껑충 뛰었고 직원들이 성취감을 갖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죽음의 집의 기록’이란 책은 그가 20대에 사상문제로 투옥되어 옥고를 겪던 4년간의 고통스러운 생활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죄수들에게 시키는 가장 혹독한 고문이 이런 거라고 합니다.

물통 두 개를 놓고 이쪽 물을 저쪽으로 저쪽 물을 이쪽으로 계속 옮기게 하는 일입니다.

또 절구에 모래를 가득 넣고 하루 종일 찧게 하는 이런 무가치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값어치 있는 일이면 죄수들이 견뎌내지만 이런 무의미한 일을 계속 시키면 죄수들이 자살하거나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금과 빛의 사명은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보람이 있는 삶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단지 이생에서 만사가 형통하고 내생에서 영생을 얻는 것만 우리에게 보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쓸모 있게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신자들의 자긍심이고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그런 보람있는 삶은 바로 우리를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힘으로 손 쓸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썩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발전한 세상의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습니다.

마피아조직이 공권력을 무기력화 시킨 멕시코 같은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기사를 보니 작년9월에 시위하다 체포된 대학생 43명을 경찰에게서 넘겨받아 살해하고 불태워버린 갱단 주동자를 검거했다고 하더군요.

IS이슬람국가 조직원들의 인신매매, 참수, 폭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북한 정권에서 김일성 3대 체제에 인격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며칠이 멀다하고 평범하던 이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고 토막내는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심지어 자연도 자정능력을 잃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파괴한 자연은 멀지 않아 무섭게 인간사회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이번에 과학저널 사이언스지에 발표 된 내용을 보면 인류의 재앙을 막기 위해 지구가 버틸 수 있는 한계선이 위태롭다고 합니다.

9가지 항목의 ‘지구한계선’ 중 이미 질소배출량이나 온실가스량 같은 4가지 항목이 한계선을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자녀세대의 재앙을 막을 길이 없다고 호소하더군요.

세상이 부패하고 썩어서 절망적이란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오늘 일상이 평온해 보일지 모르지만 언제 우리를 삼키려 들지 모릅니다.

겉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죄악과 부패가 위험수위까지 차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세상을 우리에게 예수님은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소금이라고 하시고 빛이라고 하신 것은 멋진 말로 우리를 추켜세우시는 게 아닙니다.

세상과 우리의 사활이 걸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잘하면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고 그 역할을 잘 못하면 우리도 길바닥 같은 세상에 같이 버려져 뒹군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가 부정으로 가득차면 우리가 다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우리의 활동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곳에선 결코 우리의 행복과 안전이 지켜질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만이나 하고 우리 사회가 아직 희망이 있다면 솔직히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사회가 아무리 교회를 욕해도 많은 통계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정부자료에 의하면 장기를 기증한 사람의 93%가 신자들입니다.

자녀에게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에 서약한 사람의 97%가 신자입니다.

사적으로 북한을 도운 재물의 90%가 신자들의 지갑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아난민을 도운 재물의 87%가 신자들의 돈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아무리 교회를 욕해도 세상의 소망은 오직 교회 뿐이라는 것을 굳건히 믿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문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하나 나오면 그 가정이 죄악으로 썩고 부패해서 망하는 것을 그 한 사람의 신자가 막아냅니다.

어린 아이 한 명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다가 온 식구를 구원하는 일은 종종 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짠 맛을 내려면 음식 속에서 소금이 녹아야 하듯이 우리의 일부가 녹아야 세상에 짠맛을 낼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이 소금 같은 신자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의 역할, 짠 맛은 구체적으로 어떤 게 내는 것일까요?

우선 성도들의 짠맛은 예수님의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서 예수님 맛이 나면 그게 짠맛입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그 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희생할 때 세상에서 소금의 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살리려면 예수님 맛을 내가 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짜증내고, 빈정대고, 가족을 무시하셨겠습니까?

가정이 썩지 않게 하려면 우리 자신을 녹여 그런 짠 맛을 내야하는 것입니다.

녹아지지 않은 소금 상태로 있다면 절대로 짠맛을 낼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이웃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 일부를 녹여 짠맛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을 해내려면 우리가 으깨지고 녹아지고 일부분을 떼어 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지갑을 좀 열어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하고, 수고를 곁들여야 합니다.

직장에서 청소도 좀 하고, 남의 일을 좀 거들어주고, 그런겁니다.

우리에게 있는 짠 맛은 그렇게 대단한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순교하는 시대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하는 시대도 아니지 않습니까?

점점 강팍하고 악에 받쳐 출렁거리는 세속에서 침착하게 우리 마음을 지키며 우리 주변에 작은 친절을 베푸는 행동이 악의 세력에게 조정당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소금의 짠 맛으로 절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13절을 보면 소금이 짠 맛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서민들은 정제된 소금이 아니라 사해 해안을 따라 형성된 암염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암염은 여러가지 불순물과 섞여 돌처럼 굳어진 소금입니다.

불타는 소돔을 바라보다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롯의 처의 형상을 한 소금기둥도 사해 남쪽에 있습니다.

이 소금을 잘못 보관하면 소금기가 녹아서 다 빠져나가고 불순물 덩어리만 남게 됩니다.

그 돌덩어리를 어떻게 다시 짜게 만들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냥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지나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소금이 없어진 세상보다는 짠 맛을 잃은 소금의 운명에 촛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소금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세상도 아니고 소금도 아니게 사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이죠.

여기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것은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힌다는 것은 치욕적인 삶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무익한 삶이고, 우리가 가진 존귀한 지위가 박탈당하고 모멸당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도 보는 눈이 있어 다 판단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지는 않아도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며 위키백과에서 빛과 소금을 이렇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을 가르칠때 나온 비유중의 하나로 "너희는 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이 비유의 의미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처럼, 부패한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소금처럼 살라는 의미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가르침이 잘 실천되고 있지는 않다’

세상에서 이렇게 신자들을 다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감쪽같이 모르게 비밀리에 예수님을 믿으면 편할 것 같지만 오늘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면 결국 말씀대로 버려지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좀 부족해도 당당하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고, 신자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신 짐을 좀 지고 책임을 갖고 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라는 이름, 세상의 소금이라는 별명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더 말씀대로 따르게 하는 안전 장치도 됩니다.

현관문에 교회 표찰 붙인 것 때문에 행동 조심해 본 적 있으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소속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면 분명히 밝히고 거기에 따른 의무와 책임도 다 하고 사는 것이 맞습니다.

기독교신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술자리에 가서 콜라 드시고, 담배 태우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무리 우리가 신앙 안에서 자유롭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에 부합되게 사는 것도 성경의 원리입니다.

바울사도가 그랬잖아요.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자가 되어 전도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무할례자 편이 되어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겠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고 십자가를 높이 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심판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죄에 대해 지적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당한 예는 아니겠지만 제가 교회 앞에 나가면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저를 보면 어정쩡하게 담배를 뒤로 감추는 적이 많습니다.

제가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당연하게 하던 일이 뭔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인식하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아테네 도시가 어둡다고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다죠.

정신 차린 눈으로만 보아도 세상은 어둡고 사람들 마음은 캄캄합니다.

모든 죄인들은 영적인 눈이 감긴 소경으로 태어나니 삶이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삶을 비참하게 느끼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면 왠지 비참해진 느낌을 갖습니다.

나가서 기분전환한다고 좋아지지 않습니다.

양심이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지 못하다고 우리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이유가 꼭 무언가가 필요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괜찮은 상태인지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영적인 복을 받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항상 비참한 상태에 있겠습니까?

어둠을 더듬으며 사는 것입니다.

잠언 4장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깜깜한 상태에서 여기저기 부딪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의 상태를 이야기 해주시잖아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가 다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가 빛의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또 세상이 어두운 것은 세상을 장악한 어둠의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12절은 세상의 어두움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세상의 어두움에의 배후에는 이 세상의 주관자인 악의 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자의 어둠을 물리치고 인간의 심령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은 세상에서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 빛을 세상에 밝혀야 되는 사명의 이유를 베드로전서2장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모든 것의 전후관계가 잘 정리가 되십니까?

어둠의 자식으로 소경이 되어 태어난 우리를 눈이 뜨게 하셔서 창조주와 구세주를 보게 하셨고 영원한 빛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영광스런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도록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빛이 정말 비취셨다면 아무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습니다.

14절에서 말씀하시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무엇으로 숨기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산기슭을 따라 판자집들이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간 산동네들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 주소 앞에 산 몇 번지라고 붙은 게 바로 산동네입니다.

낮에는 다닥다닥 붙은 집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와 가재도구까지 숨길 수 없이 다 드러납니다.

밤이면 올망졸망한 불빛들이 창문마다 새어나와 산동네는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가진 사람들은 이와같이 감출 수 없이 빛이 스며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얼굴에 그 빛이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여유가 있는 집이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영적인 어둠이 느껴지고 그 얼굴에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도님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이 앞에서 처음 전도되어 온 분들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아주 잘 보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빛에 비취임을 받지 못한 새신자들의 얼굴은 굉장히 어둡습니다.

피부가 검어서 그런게 아니예요.

그런데 차츰 예배를 드리고 말씀이 심령에 비춰지고 은혜가 임하면 점점 그 얼굴이 신비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지위나 학벌이나 부와 명예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을 아는 아름다운 빛이 얼굴을 변하게 한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봅니다.

이게 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성막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오면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하잖아요.

백성들이 그 광채가 너무 신비하고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보니까 그들의 마음이 혹해질까봐 모세가 나오면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에게 그런 빛이 생깁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에게 있는 빛이 바로 이 빛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진 못했지만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 그 것이 우리에게 있는 빛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이 빛만이 세상의 어둠을 물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빛이야말로 어두움의 영들을 몰아내는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 주변에 짙게 깔려 있는 어둠의 영들의 계략을 우리가 무력화 시키고 몰아내면 항상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빛으로 더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과 일터와 앞날을 가로막는 어둠이 떠나고 평안과 형통이 있는 것입니다.

빛이 비쳐야 어둠이 떠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워낙 강력해서 우리 인생의 어두운 면들을 몰아내고 그로 인해 타격을 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빛은 상징이나 멋진 표현이 아니라 실제 어둠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이 빛은 또 어디서나 주님을 증거하는 강력한 빛입니다.

미국에 큰 기독교 부흥을 이룩했던 무디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날 무디목사님이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식당 안은 술에 취한 사람들의 거친 말투로 금방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무디목사님이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로 가서 거기 모인 사람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 받고 돈을 낸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디목사님이 나간 뒤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험악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술집이 마치 교회가 된 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한 목사님이 그때를 회상하며 하신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온 이스라엘의 서민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빈곤에 쩔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배운 것도 없는 자기들에게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충격적으로 들렸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아무 희망도 없는 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설마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으리란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평민들이 로마제국을 상대로 소금과 빛이 되어 승리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믿음도 부족하고, 의지도 약하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내 삶의 터전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정의로운 태도를 갖고 부정과 악행을 멀리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대한다면 그게 소금이고 빛이 된 삶입니다.

어느새 우리 주변의 부패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장 위태한 신자의 삶을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나를 녹이려 하지 않는 것과 빛을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본회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으려는 것은 부르심에 대한 거부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퇴보입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땅에 버려져 밟힐 것이며 빛이 꺼진 순간 등불은 생명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녹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잘 기억하며 우리 주변에 짠맛을 내고 예수님을 아는 빛을 빛추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5.1.11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