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례적으로 좀 직설적이고 과격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구원과 관련된 만큼, 심각하고 중대하기 때문이죠.
본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끼리의 자리다툼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 끼리 누가 더 실세인지를 놓고 자주 옥신각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제일 큰 자가 누구냐는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를 일인자로 지명할 것인지 그 심중을 떠보려고 에둘러 묻는 말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이 땅에서가 아니라 천국의 복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죠?
사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중에 천국에서 받을 복보다 솔직히 지금 이 땅에서 받을 복이 더 우선이지 않습니까?
천국을 위해 현세의 삶을 투자하고 준비하라고 예수님은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다들 절대로 그렇게 안 살죠.
어쩌면 값 싼 보험 하나 들어 놓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겨우 장래를 대비했다는 명맥만 유지해 놓고 이 땅에서 다 쓰는 것이죠.
지금 백만원이 천국에서 천만원이 된다 해도 당장 여기서 백만원 쓰고 싶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비해 제자들은 지금 천국에서 누가 세력을 잡을 것인지 다투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말로는 천국을 준비하는 것 같지만 천국의 상급에 욕심을 내고 다툴 정도로 실감나게 믿진 않습니다.
만약 싸운다면 천국이 아니라 여기서 누릴 것 때문이겠죠.
이게 참을 수 없는 우리 믿음의 가벼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자들도 천국에 욕심낸 게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제자들의 질문을 헬라어 시제로 보면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권을 회복할 이 땅의 메시야 왕국에 대해 궁금할 뿐이라는 것이죠.
결국 제자들의 관심도 오직 이 땅의 삶이었고 여기서 큰 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렇게 다 남보다 크고자 합니다.
기업의 총수들도 그들끼리의 세계에서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하고 서열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청와대에서 가끔 있는 경제인 오찬 같은 데 가면 자리 서열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잖아요.
대통령 좌우에는 삼성과 현대 회장이 자리 잡고, 맞은 편엔 전경련 회장을 앉히고, 다 청와대에서 재계 서열을 따라 자리배치를 한답니다.
그 세계에서는 그 순서에 대단히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기업들이 문어발식 기업 확장을 해서 몸집을 불리려고 하는 것이죠.
권력을 잡고 사람들을 부리려는 것은 타고난 인간의 죄성입니다.
권력자들은 밑에 부리는 사람들을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특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2세들은 자신을 로열 페밀리로 압니다.
대기업만 그런 게 아니라 어디서건 사람들은 재빨리 상대를 판단하고 자기보다 수준이 아래라고 생각하면 속으로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밑에서 서러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악착같이 일하면서 생각합니다.
두고 봐라, 내가 돈만 벌면, 이 수모를 갚아주리라.
제자들도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이래저래 희생하고 수모도 당했으니 이젠 권력을 좀 누려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최고의 권력자가 될지 안달하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땅 이야기에 정말 천국 이야기로 답변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은 동문서답인 셈이죠.
복음서에 보면 대개 사람들은 이 땅의 일을 묻고 예수님은 영원한 것으로 답변하십니다.
또 사람들이 심중을 감추고 묻는 말에 대해 진짜 의도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화하신 내용들을 보면 뭔가 대화가 겉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순간도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살 일들과 세상일들로 머리 속이 꽉 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 나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 현실 문제에 답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살아가면 이 땅의 문제들은 너끈히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문제들이 결코 하나님나라와 분리되어 일어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을 갖고 오늘 말씀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어린아이를 불러 앞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서 큰 자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이야기 하십니다.
지금 이 질문을 한 사람들은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일을 보고 배운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차 없이 그들을 향해 ‘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천국 권력의 서열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에게 한마디로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위를 논하기 전에 너희가 들어갈 자격이나 있는지 제대로 점검하라는 것이죠.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면 우리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말씀을 진지하게 살피고 우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백성이라는 증거가 뭐라고 하십니까?
이 어린아이 같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아기들 보면 정말 말갛고 깨끗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미 복잡하고 사특해진 우리 마음이 어떻게 어린 아이같이 천진무구하게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가?
예수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어린아이 같다는 것은 심성의 천진무구를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4절에 보충해서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그 의미를 이해할 분명한 팁을 주셨습니다.
어린아이의 심성 중에 특히 어른과 다른 것은 자기를 높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징징대고 떼쓰고 욕심을 부릴지는 몰라도 자기를 과시하고 거들먹거리는 교만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그러면 징그럽죠.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야 한다는 것은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한 마음이 없는 낮은 마음을 말합니다.
일부러 낮추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실체를 과장하거나 포장해서 낮추려고 하는 게 아니듯이 천국백성 된 사람들은 자신의 죄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닫고 저절로 주제파악이 된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죄인 됨을 깨달았다 해도 수시로 본성적인 교만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 뼈아픈 사실입니다.
한번 겸손하게 행동하려고 해보면 우리 안에 교만이 얼마나 고개를 쳐들고 불쑥 불쑥 올라오는지를 알게 됩니다.
회개하기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교만한 생각과 행동을 한 다음 당당한 게 아니라 한없는 수치심이 느껴진다는 것이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왜 내게 필요한 지 점점 더 알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신앙이 늘 그런 상태에 머무는 것은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속의 겸손과 겉의 겸손이 일치되어가는 삶입니다.
겸손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돌이키라는 것은 내 의지를 다하고 애를 써서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너희가 어린아이 같이 겸손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힘써 겸손해지도록 낮추고, 그게 되지 않을 때마다 회개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속적으로 그걸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걸 해나가지 않으면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가 갈수록 느끼는 게 아무리 싫고 힘들어 보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매뉴얼대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때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위대함을 생각하면 경외심에 몸이 졸아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든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인간처럼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를 만들어내시냐는 거예요.
인간이 로봇을 만들면 인간이 모든 것을 프로그래밍하고 입력 된 움직이게 만들지 않습니까?
로봇 스스로가 생각을 하고 판단하고 움직이게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이 피조물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자유의지라는 것을 만들어서 넣어주셨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메카니즘을 가진 창조물을 만드실 수 있는지 저는 제일 경외심이 듭니다.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주는 산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칠십억의 사람들이 각각 자기 멋대로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사는 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허용하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전하신 하나님 나라를 창출해 가고 계신다는 거예요.
정말 우리의 머리로 상상할 수 가 없으신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인간에게 이 자유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신기한 장치를 하나 해 놓으셨잖아요.
그게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나님이 새겨놓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이고 이게 사실 모든 인간에게 주신 생존 매뉴얼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나님의 법을 입력해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죄로 인해 인간의 양심도 손상되고 완벽한 기능을 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 또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고 거기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이죠.
모든 인간의 양심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각인되어 있고 인간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지만 이 양심이 그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당연히 만물을 관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양심 속에는 남을 멸시하고 우쭐대면 안된다는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남보다 높이고 남을 무시하는 순간 양심의 법에 의한 심판이 자동으로 작동됩니다.
해보면 압니다.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 하고 나면 가책이 되고 불안하고 평안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지속적으로 양심을 어기면 인격이 파탄되고 남에게도 지탄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법을 어기면 처음엔 자기 양심이 자기를 심판하고, 그 다음 남이 심판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정해 놓으신 법칙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심은대로 거둔다’입니다
교만, 거짓, 탐욕 같은 악을 심으면 그 인격과 환경에 그 결과물이 주렁주렁 열리며 이생에서도 쓴 열매를 따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뉴스에서 과거에 뿌린 죄악의 씨앗이 만들어낸 쓴 열매를 거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는 것에도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남을 대하면 그 좋은 열매가 내게 돌아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그 뿌린 대로 우리 삶에서 좋은 결실들이 맺힙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해지며, 점점 좋은 열매들이 자라나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분명하게 성경으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인생이 고통스럽고 원대로 잘 풀리지 않고 힘든 이유가 다 우리자신과 주변인들의 죄로 인해 파생된 것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생고는 우리의 약점과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네 손이나 네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손과 발을 찍어 내 버리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손도 자르시고 발도 자르시고 눈도 빼고 하나하나 다 자르시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게 낫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왜 스스로를 낮추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남의 발 밑에 처량한 자로 두기 위해서가 아니잖아요.
겸손하면 나도 행복하고 내 주변도 행복해 집니다.
그리고 진짜 잘 생각해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나보다 나아요.
길에서 폐지를 줍고 힘들게 손수레를 끄는 노인들 보십시오.
그런 부지런함과 생활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얼마전 TV에서 다섯 살 때부터 뇌전증이라는 간질을 앓고 있는 아들을 포함해 세 자녀를 아내 없이 혼자 돌보아 온 70대 아버지의 삶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뇌부분을 찾아내서 잘라내야 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병원 짐을 싸들고 서울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을 끌어안고 묵묵히 그 순간이 지나가길 견디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저렸습니다.
아들이 살아나오지 못할 수 도 있는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병원 기도실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그 아픔을 어떻게 그렇게 의연하게 견뎌내고 평생 그 짐을 지고 살았는지 그 한없는 고통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정말 겁나서 그렇게 못살 것 같았습니다.
다 나보다 낫습니다.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여도 괜찮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경하는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천국백성의 증표이며, 우리의 삶을 평안하고 복되게 하는 것을 믿고 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을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교만이 심각한 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미끄러뜨리는 실책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린아이나 세리나 가난한 자처럼 도움이 안되는 사람을 은근히 차별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그런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연약한 사람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밀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연약한 작은 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지 않는 교만과 똑같은 결말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지만 본문에서 한 장 넘겨 19장 13절을 보면 오늘 일이 있고나서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제자들의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제자 마태의 눈에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왜 유독 눈에 띄었을까요?
어쩌면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했던 세리출신의 마태가 제자들 집단에서 그런 취급을 항상 받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다 해도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런 나약한 모습을 갖고 삽니다.
신앙의 은혜와 혜택을 많이 체험한 신자들이 연약한 신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실족하게 하는 것은 화가 있다는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아직 믿음이 약한 자들과 새가족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각개전투가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애당초 정해 놓으신 법이 아닙니다.
어느 부모가 형제들이 서로 외면하고 서로 고립되어 사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성도들은 교회라는 공동체로 묶여 예수님의 신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핏줄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은 성도들은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새로운 영혼들이나 연약한 성도들을 얼른 끌어안아 한 몸이 되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분명하게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나보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 내게 주시는 의무입니다.
또 아직 믿음을 온전히 갖지 못한 우리 곁에 있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향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6절에 얼마나 예수님이 엄격하게 경고하시는 지를 잘 주의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물속에 그냥 빠지는 것도 아니고 떠오를까봐 맷돌을 목에 걸고 빠지는 거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땅에 파묻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심각한 어조로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실족한 결과가 무섭고, 교회 공동체가 그럴 소지가 충만한 연약한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교만과 무관심과 차별과 권력다툼 같은 온갖 죄가 다 드러납니다.
교회는 강제성도 없고, 월급타려고 묶여 있는 곳도 아닙니다.
강력하게 결속되기가 힘든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맘에 안 들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이 돌아서서 나가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질 않아요.
7절에 보면 그래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없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나 실족한 사람이나 다 화가 되는 것입니다.
미끄러뜨린 사람은 맷돌을 목에 걸고 물 속에 뛰어든 격이고 시험에 든 사람은 상처를 입고 우리 밖으로 뒤쳐나간 양이라는 것입니다.
무리를 벗어난 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잖습니까?
예수님은 본문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반드시 찾아내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주신 것 아닙니까?
그 잃은 양이 바로 나였잖아요.
우리 중 한 마리도 잃는 것은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힘써 연약한 성도들을 도와서 우리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을 떠났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잃은 양들을 항상 살피고 찾아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가 외롭지 않게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서로를 섬겨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런 관계도 별로 싫고 조용히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하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없는 생각입니다.
교회 안에 결속되어 성령의 보호를 받는 것만이 어둠의 세력이 장악한 위태로운 삶에서 먹히지 않고 강한 자로 생존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결국 누구도 해결 못해줍니다.
그런데 교우들은 어려움에 빠진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19절을 보세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교회공동체의 기도에 대해 특별히 응답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성도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해도 기도를 통해 주님의 도우심을 이끌어 올 수 있다는 것이죠.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사람이 몇 사람이 있을지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내가 힘들 때, 그리고 기도제목이 생겼을 때 합심해서 기도해 줄 동역자를 많이 가지려면 우리가 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관계를 만들면 됩니다.
내가 다른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나도 기도를 받게 되는 것이죠.
어떻게든 다 같이 교회에 붙어있어야 우리의 영적 생명이 안전하고 복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하시죠.
우리 같이 작고 믿음도 없는 연약한 자를 하나님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돕는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이 긴밀하게 보고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철저히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죠.
다만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대로 나를 낮추고 겸손히 행함으로 영육간의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내 구미에 맞는 사람들만 모인 교회는 없습니다.
나랑 다르고, 고집스럽고,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 믿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배운 말씀을 실천하고 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 작은 자들을 서로 용납하고 끌어 안는다면 그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큰 축복과 영광으로 남을 것입니다.
2015년5월3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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