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가 세월호 때처럼 메르스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메르스로 인한 국가 손실이 수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외국투자기관들이 분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광, 유통, 요식업을 비롯해 우리 생계에도 파장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중부지방의 가뭄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구촌도 기상악화와 기근과 인간의 야욕과 폭력으로 종말의 기운이 점점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예수님께서 지구의 역사적 종말을 예언하신 뒤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앞 24장에서 세상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라간의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모든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열처녀 비유 말씀을 하시고, 그 다음 오늘 달란트비유가 있고, 그 뒤에 예수님의 재림과 양과 염소를 나누는 심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본문이 배치된 이런 위치로 볼 때 오늘 말씀이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라는 메시지 이상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본문이 헌신을 격려하고 상급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지만 결말은 의외로 구원과 심판의 문제로 끝이 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접받고 앉아있길 좋아하지 수건 두르고 섬기길 근본 좋아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싫어하는 현대 신자들이 늘어가고 교회도 이제는 젖병 물려주는 일에 지쳐 피곤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명히 주인의 일에 전력을 다한 종들과 그렇지 않은 종을 구원과 심판이라는 결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피곤한 성도들에게 위로만 전하고 노래만 불러줄 것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에스겔 33장 32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예수님은 주님의 재림과 종말이 임박했음을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뤄지지 않을 사건을 왜 그렇게 당시부터 긴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을 통해 기록 된 서신서에서도 임박한 종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께서도 제자들의 마음에 종말에 대한 긴박감을 계시해주셨을까요?
우리 모두는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생의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종말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은 한 세대 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종말은 코 앞에 임박해 있는 것이죠.
임박한 종말의 때에 예수님은 본문 바로 앞 13절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오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달란트비유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반드시 주인 앞에서 결산할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주인의 일을 위해 충성한 두 사람이 칭찬을 받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주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으르고 악한 종은 주인의 호된 책망을 받고 쫒겨 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단 주인과 관련이 되어 있는 종들,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근거로 한다면 미래의 신자들의 종말론적 판결은 지금 예수님께 충성하느냐 불충성하느냐로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에 올라탄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달란트 비유의 내용과 의미를 본문을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는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맡기고 먼 나라로 가는 한 주인이 등장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12장에는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까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세 명의 종에게 재능에 따라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밑천을 나누어 줍니다.
여기서 명시하는 것은 성도들의 모든 삶의 자산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여건들이 남보다 뛰어나고 가진 것이 많은 것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고, 남들보다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좀 가난한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2절은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부자가 자랑할 것이 없고 가난하다고 의기소침할 이유가 없는 것은 지으신 분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항상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재능이건 물질이건 외모건 남보다 덜 가졌다는 궁핍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적인 어떤 부족함을 불행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없는 걸 감사해야 할 이유를 야고보사도는 대담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니라
지금 가난한 게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신자들은 가치관이 자꾸 성경적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우열에 민감한 것이지 본문을 보면 주인에겐 그게 대단치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대기업 다니나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나, 좋은 대학 다니나 공부를 많이 못하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결산할 때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주는 판결이 똑같습니다.
너희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 보다 내 충성이 더 대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희생과 은혜에 비하면 다 똑같이 지극히 적은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작은 충성에 비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나눠주신 자산은 엄청난 가치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인이 나눠준 한 달란트라는 화폐는 우리 돈으로 환산할 때 대략 3억 정도의 가치입니다.
종들에게 나눠 준 밑천이 그냥 구멍가게나 해 보란 수준이 아닌 것이죠.
가장 적게 받은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분히 일할 만큼 넉넉하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도 3억의 값어치를 받은 것이니 누구도 내가 가진 여건들이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금의 건강이 하찮은 것입니까?
남보다 뛰어나게 영특하진 못해도 살아가기 충분한 정상적인 지능을 받은 게 3억이 안되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벌어올 수 있는 우리의 일터가 하찮은 것입니까?
내가 믿음이 부족하고, 받은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이 엄청난 밑천을 손에 쥔 두 종은 즉시 가서 사업을 벌여 갑절의 이익을 냅니다.
공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최근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도폭발 훈련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 인근의 절에 가서 승려들을 전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다섯 명의 승려들이 전도되어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두 달 만에 열다섯 명을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왜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 오려고 안간힘을 쓰겠습니까?
구원을 받고 내게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안 사람들은 그걸 묻어 놓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즉시 나가서 그 돈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곧 십자가를 향하여 가십니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던 모든 죄와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죄인에게 활짝 열린 이 속죄의 은총과 구원의 길을 만민에게 전파할 사람은 천사가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 전파되어야 끝이 올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준비되면 그 때 끝이 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고 하나님의 종인 모든 성도들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속죄의 사역을 완성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저절로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제자들에 의해 증거 되고 이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죄의 속성에 이끌려 사는 하자가 많은 우리에게 하필 이 일을 시키실까요?인간에게 복음을 맡기신 바람에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오늘 본문에서 주인의 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장차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움과 즐거움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속자라면 당연히 아버지 집을 같이 세워야 한다는 것이죠.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믿고 허랑방탕하게 살게 내버려 두는 건, 빌딩 몇 채가진 졸부들에게나 해당됩니다.
대기업의 오너들이 상속자들에게 시키는 경영수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삼성가 고이병0회장은 생전에 자식들에게 어떤 문제든 ‘왜’라는 질문을 꼭 여섯 번씩 하라며 신중한 처신을 가르쳤습니다.
무엇이든 메모하게 하는 것도 이회장의 교육철학입니다.
현대 고정주0회장은 새벽 다섯시면 출가한 자녀들을 다 집에 불러 아침식사를 같이 하며 부지런함을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정몽0회장과 정의0 장의 출근시간은 여섯시 반이라고 합니다.
엘지의 창업주 고구인0회장은 구자0회장에게 4년동안 공장에서 일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구회장은 야전점퍼를 입고 먼지 속에서 일하고 이틀에 한번 씩 숙직을 한 덕택에 구회장은 현장 일에 모르는게 없는 전문가라고 합니다.
세상의 기업주들도 자식에게 상속수업을 받게 하고 기업주의 경영철학을 전수하려고 치밀하게 교육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뻘쭘하게 그 영광을 거저 받는 몰염치한 자식들이 되게 하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순결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죄악과 부패로 찌든 몰골로 부끄럽게 서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 본문에서처럼 우리가 한 작은 충성을 보고, 그 날에 큰 칭찬을 하시며 주님이 준비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넘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구원받을 길을 말하자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셨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세울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나라 백성으로 연단되고 훈련되게 하시는 유일한 교육과정입니다.
내 인생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보려고 할 때에야 비로서 우리 안에 그 나라 백성의 성품교육이 이뤄지는 게 신비입니다.
날 위해 백 날 사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단 한 가지 성품도 갖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심을 때 성령의 열매를 거두듯이 위의 것을 위해 일할 때 위의 것이 우리 심령에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오늘 비유에서처럼 현실 속에서 장사하는 실제적인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주님의 일이 대단히 차원이 높은 아리송한 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들에게 장사가 주인의 일 자체였던 것처럼 우리의 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입니다.
나가서 돈을 벌면 건강하게 의식주를 챙기고 남은 돈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것은 함께 세상의 시험을 이기고 믿음의 유업을 가족들이 함께 받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신 천국의 상급을 알면서도 그렇게 전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10년 후는 대비할 줄 알고, 일 년 뒤에 결혼자금이나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돈을 모아 두면서 우리의 영원한 다음 생을 위해서 왜 실제적으로 준비하지 않는 것입니까?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진짜 같은데, 다음 세상은 아직 불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세가 확실한 만큼 현재의 삶을 거기에 투자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믿어지는 대로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달란트로 가장 먼저 해야 하고, 계속 투자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이 생기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믿어지고 기독교의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들 때까지 부지런히 배우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거듭나지 않았는 데 어떻게 내세를 확신하고 지금 소중하기만 한 내 생애를 올인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 외신에 이란 혁명법원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18명에게 최대 24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란에서 기독교를 전도하고 가정교회를 만들었다는 혐의입니다.
주일예배 조차 짐이 되는 자유민주주의 현대 교회 신자들과 이들의 믿음과 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구원의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건강과 물질을 들여 노력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억의 돈을 땅에 묻어둔다는 설정이 억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게 값어치 있는 믿음을 묻어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세가 불확실하기에 대강 준비하는 흉내만 낼 뿐인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충성하고 이 세상에서 귀중한 것들을 천국을 위해 쌓아둘 지혜가 생깁니다.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더욱 분발하고 진력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주인의 명령대로 주인의 집을 위해 나가서 일한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각자가 두 배라는 엄청난 성과를 올립니다.
자본금의 두 배의 수익을 올리려면 상당 시간이 흘렀으리라 예상할 수 있겠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충성에는 반드시 결과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종들이 어떻게 갑절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실력으로 그런 성과를 낸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대부호였던 주인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들이 한 사업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었습니다.
주인의 고객들과 주인의 명성이 분명히 그들의 사업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또 주인은 멀리 가 있지만 사람을 보내 종들의 사업을 보고 받고, 뒤를 봐주었을 것입니다.
거액의 자금을 맡기고 무심했을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삶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지원과 보장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매일 살아가는 데, 하나님께서 왜 전적으로 우리를 후원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잘될수록 우리 영혼에 재앙이 되는데요.
야고보사도의 말대로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원하는 건 더 멀어지고, 삶은 지치고 진력이 나고, 보람도 만족도 없다면, 바꾸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자산들, 시간, 돈, 건강, 지혜, 재능, 외모, 믿음, 이 모든 것을 사용할 목적을 바꾸셔야 합니다.
오늘 종들이 주인을 위해 일했듯이,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우리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종들이 신바람나게 나가 주인의 돈으로 장사해서 매일 이익을 거둬들였듯이 매일 우리 삶에 알찬 결실들을 거둬들이는 재미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결실이 즉각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예 이 땅이 아니라 천국에서 열매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도 종들이 하는 일의 뒤를 봐주었던 주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을 결실할 수 있도록 매순간 기쁘게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비유 중에서 가혹한 처벌을 받은 한 사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3억을 그냥 땅에다 묻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돈을 은행에 맡기기도 했지만 땅에 묻어 두는 일도 흔했습니다.
이 종은 막대한 거금을 받고는 장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행에 맡긴 것도 아니고 땅에 묻어 묵혀 두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설정이죠.
나중에 주인도 돌아와서 이 종의 처신에 대해 어이없어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주인이 정확하게 두 단어로 지적해 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그에게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악의 원천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저항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적개심과 반항심이 계속됩니다.
이 사람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았던 것은 주인에 대한 불순종과 반역이 원인이라는 것이죠.
본문을 보면 주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종의 여러 면모가 드러납니다.
그가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 입으로 말을 합니다.
24절에 보면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노력도 안하고 긁어 모으려는 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에 대해 곡해하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며 종들에게 거액의 재산을 나누어 맡겼다는 것은 주인의 대범함과 종들에 대한 신임과 애정을 나타냅니다.
또 돌아온 주인이 종들과 결산하는 모습을 보면 종들이 창출한 이익을 자신이 챙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종에게 맡깁니다.
이런 모습은 만유의 선한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가지신 관대함과 자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그런 주인에 대해 비뚤어진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이유 없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싫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언제 어느 순간에 하나님에 대항하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입장이 되어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물처럼 낮아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죠.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 받은 종들이 주인에게 위임받은 돈으로 즉시 나가서 장사를 시작한 것을 보십시오.
큰 돈을 위탁한 주인의 전폭적인 신임과 사랑을 알기에 기쁘게 즉각 순종했던 것입니다.
주인과 결산할 때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는게 느겨집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기뻐해줄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속죄로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한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자발적으로 이득을 남겨주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의 속죄의 축복인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이 어둠으로 내쫒긴 것은 일을 안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일에 게으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새로워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게으릅니다.
자기 건강을 위하고, 쾌락을 위해서는 부지런을 떨고, 무슨 일이든 감수를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몸이 무겁기만 합니다.
상대를 대할 때 게으르다는 것은 애정과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늦게 들어온 자식에게 뭐든 먹이려고 주방으로 가는 엄마의 발걸음이 재빠른 것은 좋은 것이면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엄마의 사랑 때문입니다.
부탁을 해보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금방 나타납니다.
오늘 주인을 좋아하지 않는 종은 주인이 위탁한 돈으로 주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그냥 땅 속에 거액을 묻어 놓았습니다.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좀 받아 드려야지’ 하는 마음조차도 생기질 않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면밀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악하고 게으른 종은 다른 사람들이 갑절의 수익을 내는 동안,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 것도 안하고 놀지는 않았겠죠.
아마도 주인의 일이 아닌 자기 재산 증식을 위해 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을 묻어두고 하나님이 주신 자산으로 세상에서 내 인생만 성공하려고 하는 삶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주인의 즐거움에서 영영 제외되는 참담한 재앙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한다고 해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될 때 후한 상급과 칭찬을 약속하며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들을 분명히 알게 될수록 장차 이 땅에 두고갈 것을 쌓아두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도 오늘 주인을 위해 신나게 장사했던 두 종처럼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고 그렇게 사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15년6월14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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