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각각 멋진 집을 지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폭우와 태풍이 몰아닥치고 홍수가 나자 두 집의 운명이 갈라졌습니다.
반석 위에 지어진 집은 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모래 지반에 지어진 집은 처참하게 붕괴되고 맙니다.
여기서 집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우는 세상의 집, 가정과 인격과 세상적인 업적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적으로는 이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날 구원의 확실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똑같이 폭풍우가 몰아 닥쳤다고 하십니다.
살면서 인생의 집이 무너질 것 같은 큰 일이 없으면야 좋겠지만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나 세파는 몰아닥친다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의 집은 흔들리지 않고 버텨줘야 합니다.
또 우리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는 심판 날에도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교훈을 잘 새기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두 집의 운명은 어디에 집을 지었느냐로 갈라졌습니다.
반석 위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듣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생활이 하루하루 쌓이면 결과적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키라고 하신 이 말씀들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5장부터 7장까지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산상수훈이라는 설교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키라고 하시는 것은 산상설교 내용들이죠.
박애주의자들은 이 산상수훈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르침이라고 하며 극찬을 합니다.
간디도 구약성경의 율법을 읽으면 잠이 오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으면 마음에 깊은 감동이 온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과연 산상수훈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감동적인 설교일까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많이 알고 있는 내용들이 이 산상수훈에 나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도 돌려 대라. 너에게 꾸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거절하지마라. 등등.
이 내용이 이걸 지켜야 되는 사람입장에서라면 그렇게 감동적이기만 합니까?
바로 이런 말씀들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가 세우는 집은 모래 위에 세운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산상수훈의 계명을 잘 지켜야겠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50점 밖에 안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산상수훈은 인간으로서는 ‘못 지킨다’가 더 맞습니다.
한번 지켜보려고 노력을 해보면 압니다.
원수 정도가 아니라 단지 내게 상처를 주고 인격적으로 꼴보기 싫은 사람도 우리는 결코 사랑하지 못합니다.
달라는 대로 어떻게 다 꾸어줍니까?
이런 말씀들을 지키고 싶지도 않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생에서는 적당히 하나님을 믿으며 내 욕구대로 살고 천국에 가서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원대로 되지 않을 거랍니다.
우리의 세속적 가치관과 태도를 완전히 유턴해서 주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천국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본문에서 태풍에 집이 무너진 사람은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이 둘이 교회 안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상당한 도전을 주시는 심각한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이 계명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냐가 오늘 말씀의 관건입니다.
먼저 전제로 할 것은 예수님께서 지키지도 못할 높은 수준의 윤리를 성도들에게 지키라고 하셨겠냐입니다.
이런 차원이 높아 엄두도 못 낼 계명을 요구하신 이유는 결론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1. 우선 우리의 죄성과 계명 준수와의 이 영원한 평행선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이 문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계신 장면을 보실까요?
산상수훈의 시작인 마태복음5장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사람들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뭔가 마음을 휘어잡는 말씀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말씀하시고 백성들은 산 아래에 모여 언약을 맺으실 때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장엄한 현현 앞에서 두려워 떨었지만 지키면 분명히 행복을 약속하신 그 법을 지켜보겠다며 서약을 했습니다.
이게 옛언약, 즉 구약입니다.
이 장면과 오버랩 되지 않습니까?
요즘 오후예배와 수요예배에서 이 부분을 잘 배우신 분들은 쉽게 연상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70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 시내산을 일반적인 산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특별히 ‘하르’라는 단어로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앉으신 산도 시내산을 표현했던 이 ‘하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입니다.
제가 헬라어 단어를 가끔 말씀드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그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던 때와 오늘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는 장면이 한 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 짝이 있다고 이사야서에 써 있죠?
성경의 사건들은 짝이 있어서 두 내용의 진실성을 서로 입증하고 정확한 해석을 해주는 열쇠가 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계명을 가르치시는 이 장면은 바로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던 사건과 의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시내산에서처럼 지금 예수님과 주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 새언약, 즉 신약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본다면 조건은 똑같습니다.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안 지키면 언약백성에서 제외됩니다.
옛언약은 우리가 아는대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모세는 이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규례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쳤지만 결과는 아주 무참했습니다.
출애굽 일세대는 언약의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다음세대는 신앙을 전수받지 못하고 가나안풍습 대로 살다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쫒겨 납니다.
하나님의 법을 못 지켜 실패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산 위에서, 다시 백성들에게 천국의 윤리와 계명을 제시하며 나하고 언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단 이대로 지키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습니까?
시내산 계명이나 산상수훈이나 똑같이 못 지킬텐데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보면 계속 모세의 율법과 비교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난이도가 한참 더 높습니다.
예를 들면 옛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 했지만 새 계명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했다는 식입니다.
허용되지 않은 대상에게 연정을 품고 희열을 느껴도 간음이란 것이죠.
인간은 다 음란하잖아요?
어찌 이렇게 까지 완벽하게 계명을 지키겠습니까?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멸시하면 살인죄와 같다고 하잖아요?
새계명은 겉만 아니라 속도 보시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구약의 율법도 못지켰는데 이정도의 새계명을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성도들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젠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못 지킬게 뻔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용서밖에 방법이 없잖아요?
단 그 댓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할 때 이스라엘은 동물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붓고, 그 피의 일부를 자신들에게도 뿌려 속죄했습니다.
일시적이였기에 매번 동물의 피로 속죄를 받았다고 히브리서에 말씀합니다.
그게 구약시대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무한한 용서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아 마음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용서만 받고 마음이 안 바뀌면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젠 그 법을 따라 살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과 우리 마음이 평행선이 아니라 이젠 합의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말씀대로 사는게 매일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는 그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끌어당기는 죄의 옛 인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멀리서, 피곤한 몸을 일으켜 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왔잖아요.
구약성도들하고 다릅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이런 일을 이루실 것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에스겔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내가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레미야32장에서도 말씀하죠.
내가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리라
아예 마음 바탕을 바꿔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9장14절에서 정리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물며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 우리에게 본래 주셨던 그 성품이죠?
그것을 아예 마음 판에 새겨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라면 오늘 산상수훈을 읽을 때,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데 저절로 공감을 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면 왜 내가 그 못된 인간에게 그래야 해?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원수를 미워하고 나면 내가 괴롭습니다.
남을 험담하고 돌아서면 후회가 되고,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지 않은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가 절로 나옵니다.
성령께서 이 산상수훈을 십계명처럼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태산 같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지킬 때 만족과 행복과 기쁨을 주고 뿌듯한 자부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먼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면 산상설교는 가장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그저 아름답게 꾸며낸 신기루 같은 말씀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모든 명령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성령을 받아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했던 말씀아시죠?
너희가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가 그렇게 좋은 삶을 원하는 데 도와주실 성령을 보내주지 않으시겠냐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판에 성령께서 산상수훈을 새겨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 다음은 힘써서 그 말씀을 지켜내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대로 지키며 살고 싶지만 믿음이 연약하고 그렇게 신앙생활에 전념하지 못합니다.
요즘처럼 분주하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그렇게 평소에도 철저히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제가 처음 목회를 하던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성도님들이 피곤하고 힘들게 한주간 살다 교회에 오신 걸 알잖아요?
주일예배만 드리는 신앙생활이면 괜찮지 않을까 타협이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신도 때 그렇게 살지 않았거든요.
우리 딸한테도 그렇게 살라고는 안 할 겁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강하고 유리한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간당간당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딘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처럼 힘들고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세상에 적당히 발을 걸치고 정해 놓은 수준만큼만 신앙생활을 하는 건 둘 다 재미없는 일입니다.
주일에 놀러도 못하고 반나절을 보내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주일신앙 정도로는 믿음의 실질적 혜택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삶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의미있고 보람있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하구요.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만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린다면 성도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적당히 세속적인 삶을 살며 간신히 신앙생활을 괜찮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세속의 삶을 철저히 신앙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현실과 분리 된 어떤 감정의 신비적인 한 영역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냥 현실인 모든 일상에서 우리의 태도와 인격을 바꿔서 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감정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의지적인 행동이 더 본질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씀 안에서 행한다면 삶을 실패할 리가 없잖아요?
물론 인생에서 큰 소나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큰 우산이 되어 주시고 착실히 다져놓은 믿음의 실력으로 너끈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정신을 차리고 힘써 말씀을 지켜 인격에 아로새기고 삶을 공고히 세워가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바람 한번 불면 굴뚝이 날라 가고, 태풍이 오면 문짝이 날라 가고, 조금만 비가 오면 물을 퍼내며 그렇게 살겠습니까?
인생의 집도 믿음으로 세워야 바람과 폭우와 홍수에 안전합니다.
이런 견고한 반석 같은 믿음의 삶은 매일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일주일 걸 몰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은 오래했어도 한결같이 평온하고 강한 영적 상태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지켜 듬직하게 살다가 내일 말씀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조금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아예 과거의 습성이 나와 버립니다.
그게 우리 죄가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죽 방법이 없으면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치르고 무조건 용서를 해주셨겠습니까?
내 마음을 성령으로 거듭난 새마음으로 매순간 점유하지 않으면 과거 죄의 기질이 점유합니다.
우울하고 불행감에 빠지고 절제하지 못하고 나태해지며 악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죠.
같은 환경이라도 새마음인 믿음으로 보면 괜찮다, 좋아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되는 데, 옛마음으로 보면 당장 죽을 것 같습니다.
이 싸움이 매일 살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꾸 주저앉고 침체되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런 죄의 질긴 본성에 질 때마다 애통해하며 또다시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연약함이 있어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분명합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신 다음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왜 권세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신 정체성입니다.
위대한 척 하실 필요가 없이 위대하시고, 진실한 척 하실 필요 없이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은 척 하실 필요 없이 긍휼에 넘치시는 스스로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낮은 자든 높은 자든 누구를 만나도 항상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하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른 인격의 가면을 바꿔 쓰잖아요?
교회에 나와서 성도들을 대하는 것과, 가족을 대하는 것, 만나는 사람마다 대하는 얼굴과 말씨까지 다르잖아요?
자신의 정체성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죠.
마음에 들고 자신 있는 내가 있다면 어디서나 그 모습으로 살 수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최고의 정체성은 어떤 현재의 신분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애들을 보면 부모 앞에서는 참 당당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사랑받는 자식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겠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면 달라질 것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한결 같고, 두려워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세상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도 명확해집니다.
이런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 더 확인하고 기도를 통해 믿음을 다지는 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이 사실을 확실히 기억하며 살도록 스스로에게 계속 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다, 나는 예수님께 속한 자이다’
우리의 귀에 계속 이렇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예수님처럼 권위있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결론입니다.
왜 예수님은 사실인즉 지키기 힘든 산상수훈을 주셨을까요?
산상수훈은 이 땅에서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천국시민법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천국에서 살게 될 삶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나라가 얼마나 사랑과 공의로 아름답고 충만한지를 보여주시는 설교입니다.
거기에 악이 없고 미움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땅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하지만 이런 곳이 바로 우리가 장차 영원히 살아갈 곳입니다.
무한정 사랑하고 남이 달라는 대로 다 주시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자가 유한한 세상에선 남에게 퍼주면 내 것이 사라지지만 천국은 아닙니다.
천국에 물자가 부족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풍요로우면 물질적인 것은 중요치가 않습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잘 해주고 서로를 높여주는게 행복인 곳이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그런 가치를 깨닫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 혼자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네 가족, 친구들은 어디에 두고 너 혼자 여기에 왔느냐 물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재난 영화를 보면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쓰나미가 덮친 상황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가족들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은 그런 상황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짐을 지시길 축복드립니다.
산상수훈에서 주신대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짐을 지시고, 성도들을 섬기는 짐을 질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우리 짐도 무거운데 남의 짐을 지기가 버거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짐의 무게가 백이라면 남의 짐 오십을 질 때, 우리 짐의 무게는 오십으로 줄어듭니다.
우리가 느끼는 짐의 무게는 많든 적든 항상 백으로 느껴지잖아요.
주님이 원하시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짐을 기꺼이 질 때 주시는 만족과 기쁨은 오히려 우리 오십의 짐도 넉넉히 지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킬 때 이 땅에서 우리 마음과 삶에서 이미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차근차근 세운 우리 인생의 집은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수고했다, 잘 지었구나’ 인정받고 기쁨이 되는 영원한 집을 세워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6년7월10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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