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산상수훈 중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벌써 찔리고 긴장이 좀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그냥 덕담 차원의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게 한가롭고 주변적인 일을 다루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판이라는 말은 올바른 판단을 위해 객관적으로 사실을 알아내고 분석하는 비판적 사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적 사고 능력은 요즘 같이 제각각 옳다고 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살기 위해 어느 때 보다 더욱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악과 참 가치를 분별하는 사고력을 요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 주관적인 잣대와 감정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어른을 매섭게 비판하더군요.
미국의 여덟살짜리 초등학생이 공화당의 대선후보인 트펌프후보에게 편지를 보내서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더군요.
이 어린이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너무 무례하다.’
‘우리 어린이들도 당신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도 언젠가는 투표하게 된다는 걸 꼭 기억하시라.’
여덟살 짜리도 이 정도는 비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를 빙자해서 남을 비난하죠.
지난주 산상수훈의 말씀은 팔복의 심령을 가진 천국시민의 헌법이라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들은 미래의 천국을 위해 지금 당하고, 견디고 참기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매순간, 매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성도들이 그 나라의 법을 존중하고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국시민의 모든 가치와 삶의 방식은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다른 모든 교훈에서도 현대의 신자들이 원하
고 기대하는 목적에 들어맞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좋지만 사업도 좀 잘되고, 자식들 문제도 잘 풀리고, 건강하고, 소원성취하고 싶은 그런 것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보장해주시겠다는 약속은 아쉽게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재산을 더 모으라기는 커녕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보물을 진정 하늘에 쌓아두는 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세상에 우리와 우리의 모든 소유를 두시려는데, 우리는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다 다 부어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해봤자 팔십인데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으며 당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실현불가능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라며 예수님을 속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꼭 맞는 누군가를 떠올렸겠죠.
자기를 멸시했던 사람, 다급할 때 도와주지 않은 사람, 외식하며 길게 기도하는 사람 얼굴이 떠올랐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좀 와서 들었어야 했는데 하며 아쉬워했겠죠.
예수님이 이런 모두의 속마음을 향해 말씀합니다
비판하지 말라.
사람이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천국의 자녀로서 꼭 다루어야 할 강력한 죄성입니다.
그 뿌리는 지독한 교만과 타인에 대한 미움입니다.
하루만이라도 비판하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려고 해보면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가운데 정말 우리 입에서 비판의 소리가 사라지는 은혜가 저를 위시하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우선 우리가 비판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비판한 결과 우리도 그대로 비판을 당할 거라는 것이죠.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으로 뿌렸든지 그 열매를 거두는 게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계의 법칙입니다.
요즘 세간을 뜨겁게 달구는 노회장님의 성매매 사건을 보면 뿌린 것이 언젠가는 형체를 드러낸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차라리 의식이 있을 때라면 뭐라 해명이라도 하셨을텐데, 의식도 없이 치부를 드러내야하는 상황이 너무 너무 민망한 것 같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비판하면 그것이 내게도 돌아옵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하면 그걸 듣는 사람들은 ‘저 사람은 항상 남을 안 좋게 얘기 해’ 라며 우리를 비판합니다.
나만 매의 눈을 가진 게 아니고, 나만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남도 나를 똑같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서면 다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죄인들입니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 비판하는 말에 맞장구를 쳐 놓고 돌아가서 저 사람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비판하면서도 까칠하게 남을 비판하는 사람을 피하려고 합니다.
늘 불만스럽게 남을 비난하는 말을 듣는 것은 정말 피곤하죠.
비판하는 죄는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이유에서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비판이 단지 사람들에게서 돌려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절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고,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말 해석에는 누구에게 비판을 받고, 누구에게 헤아림을 받을 지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단지 사람들에게도 안 좋은 판단을 받고 내 인격이 망치는 게 끝이 아닌 것이죠.
왜 우리의 비판했던 것으로 나 자신을 비판받고, 우리가 남의 잘못을 헤아렸던 대로 내 잘못의 헤아림을 받습니까?
저 사람은 늘 거짓말을 한다고 비판했다면, 그렇게 비판한 나 역시 과연 진실한지 조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이 보였다는 것은 그게 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구분합니다.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라고 정죄한 그 죄의 기준으로 똑같이 나를 조사할 것입니다.
많이 비판한 사람이 그 많은 비판에 따라 일일이 자신도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들 저 사람에게는 대들보 같은 큰 죄가 있고, 내게 있는 것은 톱밥 먼지정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작은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이야말로 들보 같은 죄가 그대로 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올바로 세워진 사람일수록 더 큰 죄책의 무게를 느낍니다.
남보다 죄를 더 지어서가 아니라 바르게 살고 있어도 내면의 동기가 나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약점이 나타나는 연약한 죄인들이나 겉으로 잘 관리하는 자신이나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신을 철저하게 탐조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가 남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진짜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본질적인 죄에 있어서의 평등성입니다.
정말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게 있다면 인간의 죄성입니다.
항상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비판성향이 강하다면 죄를 깨닫는 영적체험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죄의 확신이 깊이 뿌리 내린 토양이라야 은혜의 나무가 튼튼하게 자랍니다.
죄의 확신이 깊을수록 죄사함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의 안도감을 누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티를 빼주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일수록 실상은 자기 시야를 가려버린 거대한 들보를 자기 자신만 못 봅니다.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죄의 본질을 너무나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할 만큼 정의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면에 있는 동기는 정의가 아니라 교만입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고 스스로의 계급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정해놓은 그런 종류의 계급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심판받아야 할 자신을 모르고 심판자가 되어 칼을 휘두르는 사람을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유일하게 한 분이십니다.
2. 다음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형제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십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보면 바탕에 깔린 원리가 있는 데, 그것은 화목입니다.
과거엔 서로 적대관계였지만 이제 뜻이 맞아 관계가 회복되고 정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대상이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본성적으로 무관심 내지는 나를 위한 이용의 대상이었던 타인과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무형틀에 매달려 피를 다 쏟으며 고통 속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천국의 심령이 들어오면 하나님과도, 가족과도, 이웃과도, 나 자신과도 화목이 찾아오고 올바른 관계가 회복됩니다.
구원을 알아야 나하고도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힘든 게 자기 자신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름답게 회복된 관계를 망치는 게 바로 비판입니다.
이건 다시 그 관계를 깨버리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로 세우신 세상의 교회, 회복된 하나님나라에 도전하는 세력을 심판하십니다.
비판은 분명히 회복된 관계를 망칩니다.
비판을 받는 순간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자국으로 남습니다.
사람들은 다 뒤끝이 있습니다.
용서한 것 같지만 상처는 본인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들은 비난조의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분명히 내 약점이고 단점이라 부모입장에서는 고쳐주려는 의도였지만 자식에게는 아픈 상처가 새겨집니다.
가르쳐야 할 것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혀에는 죽이는 것이 있습니다.
비판의 혀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우리가 비판해서 그 사람이 변화됩니까?
사람들은 절대 남에 의해 뜯어 고쳐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 뜯어고치고 싶다면 예수님처럼 목숨을 줄 각오로 하면 혹시 될지도 모르겠죠.
사람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잘못과 죄악들은 죄인의 본성에서 그렇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런 뻔한 속이 얼마나 들여다 보이셨겠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을 하면 일흔 번 씩 일곱 번, 사백구십 번을 용서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 불쌍한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수천 번도 더 용서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용서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차 없이 마음으로 정죄하고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들의 죄가 내게 대해서 그렇게 대역죄도 아닙니다.
그냥 말실수 좀 했고, 자기만 챙겼고, 나를 존중하지 않은 그런 소소한 잘못들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남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속으로 무시하고, 실수하고 나쁜 짓을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교회에 의도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신사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고,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인 동호회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며 인간의 깊은 죄의 뿌리를 보고 나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우는 곳이 교회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곳입니다.
연약한 죄인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며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며 관대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가운데 점점 자라나는 믿음의 실력을 검증해 보이는 곳입니다.
비판이 줄어들고 사랑이 많아지면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무더위에도 기꺼이 음식봉사를 하고, 기왕이면 더 맛있게 대접하려는 모습은 분명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호집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성도님들에겐 아무 음식이나 못 가져오겠다고.
성도님께는 좋은 음식을 내놓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 말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참 감사했습니다.
저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들을 좀 과하게 고급으로 하는 편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교회에 봉사하지만 교회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제게 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저는 참 좋습니다.
교회에서 서로 최고의 대우를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최고로 대우하시잖아요?
우리에게 오른뺨 맞으면 왼 뺨도 돌려대고 달라는 대로 다 주고, 그런 것은 우리를 천덕꾸러기 되라는 말씀 아니잖아요?
교회는 서로에 대한 섬김으로, 따뜻한 말로,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 받고 힘을 얻어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곳입니다.
너무 정의만 실현되고,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매일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잔치하고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대식가란 소리도 듣고 식탐이 많다는 소리도 들으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어요?
천국이 하나님을 모시고 이렇게 기쁘게 잔치하고 빈부나 호불호의 담을 허물고 어울려 사랑을 나누는 곳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과 언약을 맺던 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화목제를 지낸 뒤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마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친밀감과 행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해지면 같이 먹고 마시잖아요?
그래서 해마다 똑같은 여름캠프지만 하나님 앞에서 같이 놀고 먹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천국인 가정과 교회와 삶의 터전을 지켜내려면 주님의 말씀을 잘 기억합시다.
비판의 입을 닫고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게 잘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산상수훈을 지켜보려고 하면 억지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필요를 아시고, 좋은 길을 정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있으니까 너희가 이 길을 따르라는 것 아니시겠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에 험난한 일도 만나겠지만 그 모든 문제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해결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릴 적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워낙 집이 가난해서 용돈이란 게 없었던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날 학교 앞 문방구에는 오십원짜리 요구르트 얼린 걸 팔았다고 합니다.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돈을 꿔서 그걸 사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못된 친구녀석이 매일 이자를 오십원 씩 내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걸 집에다 말 못하고, 마음도 약한 이 어린 친구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백원을 갚고, 오십원을 갚고 그렇게 쌔빠지게 갚았는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천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누나가 그 사실을 알고 이 놈을 찾아가서 귀싸대기를 때리고 나서 그 빚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우리의 원통한 일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누가 내 일을 해결해 주겠습니까?
하늘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다고 예수님이 그러시잖습니까?
너희는 잔머리 굴리며 살지 말고, 가장 행복한 매뉴얼인 주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천국의 자녀로 훈련하고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잘못이 뻔히 보이는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조력자이신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고취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닫고, 지켜낼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힘써 순종하는 것이지 묘하고 신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도 갑자기 백만볼트 전류가 흘러 순간적으로 괴력을 발휘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힘이 아홉이라면 성령님은 한 개의 힘을 살짝 얹어 주십니다.
아홉이 성령님이 주시는 힘이고 한 개가 내 힘이라면 우리는 딴 사람이 되버립니다.
단지 내 죄성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선한 의지에 살짝 힘을 실어주시고 우리가 순종하며 지켜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다른 나로 바꾸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성과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하시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서서히 천국의 성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 죄의 본성은 바뀌지 않지만 나쁜 습관에 의해서 생긴 성향과 기질들은 말씀들을 힘써 지켜나갈 때 분명히 개선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저 사람 달라졌어’ 그런 말도 가능한 것이죠.
죄성에 이끌려 남의 단점을 말하고 불평하며 비판할 때 우리의 죄성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입니다.
성질을 자꾸 내는 사람은 그게 습관이 되고 매사에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결국 모든 관계에 금이 갑니다.
죄성을 먹이면 점점 죄성이 강화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남의 잘못도 들추지 않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고 사는 게 너무 줏대 없어 보이고 너무 밋밋한 삶이 될 것 같습니까?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지키면 맹물 같은 사람이 되고 삶의 짜릿함과 감칠맛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따라오는 죄책의 고통이 없어지고, 사람관계가 편해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는 그 맛이 어딘데요?
그래서 점점 적극적으로 말씀대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맛도 죄지으며 느끼는 쾌락의 맛 못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선을 하고 그러는 것이잖아요?
뉴스를 보면 매일 사건사고에 악인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해괴한 악행들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 것은 더 큰 악행, 더 큰 사고, 더 큰 재난뉴스입니다.
그러나 간혹 선으로 악을 대항하는 이야기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랑스 트럭테러의 한 동영상을 보면 미친 트럭을 저지해보려고 오토바이 한 대가 끝까지 달라붙었다가 결국 십구톤 트럭바퀴에 밀려 옆으로 쓰러집니다.
그런 장면들은 우리의 귀가 아니라 마음을 깊이 사로잡습니다.
우리 안에 죄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련한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악해지는 것보다 선해지는 게 더 강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게임 등급을 올리는 일에 생사를 걸 듯 하죠. 그게 뭐라고요.
포켓몬 고 게임하는 사람들 보니 그렇잖아요?
취미생활의 강도를 높이는 일에 시간과 돈을 쓰고, 세상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갖추는 데는 열을 올리지만 영적 품위를 높이고 영적 자산을 늘리고 풍부한 영적 지식으로 자신을 강하게 하는 데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상류계층이 아니고 학식이 풍부하지 않다 해도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르고 내 심령을 훈련한다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는 아름다운 덕성과 품격이 되고 점점 예수님을 닮은 성도들이 되어갈 줄 믿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죠.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자녀답게 훈련하시는 보배로운 교훈들입니다.
이런 신앙의 훈련들은 누구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고귀한 법을 주시고 지키도록 도와주시는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착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에서 고되게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일이 잘되고 좋을 때도 있지만 대개 삶에 지친 우리는 매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옵니다.
또 우리는 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 마음으로 교회에 옵니다.
우리가 모두 비판하기를 그치고 서로를 넓게 용납해 준다면 가정이 천국이 되고 교회가 천국이 되고 직장이 천국이 되어 갈 것입니다.
심판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2016년 7월24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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