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 해를 결산해 보니 많이 들 거두셨습니까?이 정도면 참 만족스럽게 결실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백배의 결실을 할 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왜 이렇게 열매가 없고 마음의 곳간이 허전한가 하는 마음이 든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알차게 결실하는 방법을 깨닫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씨뿌리는 비유설교는 거의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을 거의 다 보낸 시점에서 ‘너희에게 열매가 있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 열매 없고 결실이 부족한 우리에게 백배의 결실을 하도록 격려하시며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 씨뿌리는 비유 설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쉬운 내용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신앙 상태를 꿰뚫는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 대해 나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해석해주십니다.그 해석과 연결해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리는 씨앗은 천국말씀이고 네 가지 밭은 네 종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천국말씀은 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뿌려졌습니다.
농부가 성의 없이 여기저기 씨를 뿌렸다는 설정이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에 흔한 농법이라 듣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농부들이 종자 자루를 옆에 차고 다니며 씨앗을 흩어 뿌린 뒤 나중에 쟁기로 갈아 엎는 모습들을 늘상 보아왔기 때문이죠.
요즘처럼 반듯하게 개량 된 밭이 아니라 암반이 많은 이스라엘 지형에서 흙이 깊은 곳을 찾아 구석 구석 밭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모양이 각각인 작은 밭들에 씨를 뿌리다 보니 씨앗이 길가며 얕은 돌 위며 가시덤불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먼저 길 가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마음이 길 가와 같다는 것은 가장 큰 위기에 처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해석하십니다.
사람들은 길가 밭의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죄와 세상 지식과 경험들로 점점 단단하게 됩니다.
자연인들은 보이고 느껴지고 이해되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삽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영적인 진리들은 자연상태의 인간에겐 어떤 감각을 통해서도 전혀 지각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했다는 이야기들은 낯설고 이상할 뿐입니다.
이런 상태는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릴 여건이 전혀 안됩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겨질 수가 없이 바닥에 굴러다니니 새들이 와서 냉큼 씨앗을 먹어 버렸다고 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려면 막막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단지 예수님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여전히 길가에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채 막연하게 종교적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를 말하실 때 가장 크게 충돌했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했던 하나님과 달라 화가 난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 가운데도 성경의 진리를 말씀대로 가르치면 싫어합니다.
자기 생각과 같지 않은 말씀을 견디지 못합니다.
특히 죄와 심판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좋은데, 심판하는 하나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의 심판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해석하며 사랑의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심판하실 리가 있냐는 의문부호를 붙입니다.
또 어떻게 속죄의 길이 예수님 한 분이냐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무신론자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공식석상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선하게 행동하면 하나님이 누구든 구원을 하신다는 거예요.
선을 행할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습니다.
점점 악해가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어디에 인간이 선하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기독교신자라지만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알지 못하고 길가에 서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 속 하나님일 뿐이고 저 멀리 초월해 있는 하나님이니 두렵고 떨릴 이유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말씀대로 배우고 말씀대로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항상 깨달음이 없다면 길가에 서있는 신자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뿌려진 씨앗을 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십니다.
본문 그대로 직역하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입니다.
이 비유의 해석으로 예수님은 악한 자가 와서 말씀을 가로채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는 곳에 사탄이 노리고 있다 깨닫지 못하는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가로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않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럼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해법이 될 말씀을 두 가지 살펴봅니다.
에스겔36장26절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이 말씀은 장차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의 심령을 바꾸어 주신다는 보배로운 약속입니다.
길가와 같은 밭은 먼저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속죄해 주신 구주가 되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게 가장 시급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신지, 왜 내가 죄인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부지런히 배우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 때 성령을 주셔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육신적인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교회 안의 길가 신자들은 호세아 10장12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스스로 자기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딱딱해진 마음을 회개로 갈아엎어 부드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틸리케라는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소한 하루에 15분가량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갈아엎는 고통을 가지지 못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씨가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으면 그러한 사람의 마음은 조만간에 길바닥이 되어 버린다’
말씀을 계속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마치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된 걸로 착각하고 결국 회개도하지 않는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나라 전통신앙인 기복신앙의 자리에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만 올려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며 결실하는 그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바위가 많은 이스라엘 지형 중엔 흙이 얕게 덮힌 땅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에 대해 말씀합니다.
얕고 부드러운 흙 위에 떨어진 씨앗은 얼른 싹을 틔웠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태양이 뜨겁게 내리 쬐자 수분을 빨아들일 뿌리가 없어 말라서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돌밭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해석해주십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뭔가 위로가 되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좋은 건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류 쳄버오케스트라에 맞춰 웅장하게 찬양하고, 인문학과 철학과 유머를 겸비한 설교자의 유창한 설교를 들으면 왠지 거기에 뭐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나보다 더 수준이 있어 보이는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합니다.
고급 사교계에 회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괜찮다는 것입니다.
3천억을 들여 지은 강남의 교회, TV로만 보았지만 얼마나 굉장합니까?
어지간한 호텔이상으로 호화스럽잖아요.
이번에 전도축제를 열었는데, 1020명이 교회를 다니겠다고 결신했다고 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엄청난 일이죠.
우리가 한 명의 결신자를 얻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성도들의 기도와 수고도 물론 있었겠지만 강남의 유명교회, 큰 공룡교회의 위력이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런데 흙이 얕은 돌밭에서 일시적으로 싹이 난 씨앗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원어의 뜻은 죄를 짓는다, 배반한다는 강하고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 믿음을 시험하는 환난과 박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죠.
믿음을 시험하는 시련의 바람이 불어 뿌리가 약한 신자들을 흔들면 주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고 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달에 이라크의 어린이 4명이 IS라는 이슬람과격파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말고 무하마드를 믿으라는 테러범들에 말에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하는 그 어린아이들이 참수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참담하면서도 어떻게 그 어린 것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배신하지 못하고 목숨을 버리고 따랐는지 고마울 뿐입니다.
이런 순교의 상황이 아니라 작은 풀뿌리에도 걸려 우리는 넘어집니다.
어떤 시련 중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끝까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의리를 지키려면 믿음의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이 얼마나 허약하고 위태한지, 본인도 믿는건지 아닌지 괴롭지만 보는 사람도 참 안타깝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려면 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가 되고 깨달아지도록 배워야 합니다.
돌과 같은 마음을 뚫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 바위 같은 마음도 틈이 생기고 믿음의 뿌리가 영의 심원한 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뭔가 내 믿음의 뿌리가 약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기도를 통해 경건한 생활을 익혀가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뿌리가 깊은 믿음이 되서 어느 상황에서도 결실하는 신앙으로 키워줄 것입니다.
다음은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어렸을 때 길가에서 제일 많이 보던 풀 중에 가시가 돋힌 풀이 있습니다.
뚝방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다리 여기저기가 긁혔던 기분나쁜 풀입니다.
번식력이 대단해서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가에도 혼자 무성하게 자랍니다.이런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 자라기도 전에 가시풀이 먼저 자라서 햇빛을 가리고 기운을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이 해석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죠.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말씀을 듣고 은혜도 느끼며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속도보다 염려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입니다.
자족하고 감사할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걱정거리가 떠오르자 믿음의 속도보다 더 빨리 염려가 번성하며 올라오는 것이죠.
우리가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게 당연지사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오늘 말씀은 걱정하는 습관으로 인해 결실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걱정거리를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고 염려 대신 평강 중에 대처하면 그 일에도 반드시 결실이 있습니다.
또 가시덤불은 마음속에 무한 번성하는 재물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지 오래입니다.
가족도 돈 문제 앞에서 사정없이 깨지는 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돈과 상대가 되겠습니까?
니체라는 철학자가 ‘신은 죽었다’라며 인간의 독립을 선언한 뒤, 신의 자리를 차지한 건 인간의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은 권력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라고 현대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돈이야말로 인간이 간절히 염원하는 권력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죠.
세상에서는 돈있는 자가 ‘갑’이 됩니다.
강남 아파트의 경비원이 분신한 전말을 볼 때, 돈 좀 있다고 ‘갑질’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역겨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아파트 입주자회의에서 이번엔 용역업체를 아예 바꿔 버리기로 결정했다죠.
경비원들의 고용승계도 보장하지 않고, 또 ‘갑질’을 했더군요.
‘갑질’로 대변하는 인간 내면의 권력욕을 부추기는 게 바로 이 돈입니다.
심리학자 그륀펠트팀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더군요.
학생들 세 명을 한 팀이 되게 해서 두 명에게는 주제를 주고 글을 쓰게 하고 한 명에게는 두 사람의 글을 평가해서 순위를 매겨 차등을 두고 돈을 지급하는 역할을 시켰다고 합니다.
실험을 하는 중, 모든 팀에게 다섯 개의 과자를 주어 먹도록 했는데 각 팀마다 재미있는 현상이 동일하게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세 명이 과자를 한개 씩 먹고 남은 두개를 평가를 맡은 학생이 자연스럽게 먹어치우더라는 것입니다.
단지 돈을 지불할 역할만으로도 벌써 ‘갑’ 행세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좀 행세하게 해줄 수 있는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내면에 무성하게 덮혀있으면 말씀이 질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최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돈이 곧 행복이라는 마귀가 만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돈은 절대로 최고의 행복을 인간에게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또 세상의 향락이 말씀의 결실을 가로막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향락은 정당하고 보편적인 즐거움을 벗어난 죄가 가미된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재미는 영적인 즐거움과 균형을 맞추고 적당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엔 마니아가 되고 나중엔 중독에 이르는 게 세상이 주는 재미입니다.
이런 가시덤불들이 우리 마음 밭에 무성하게 자라는 걸 주의 깊게 분별해야 합니다.
가시떨기들은 수시로 김을 매주어야 합니다.
텃밭이라도 가꿔보시면 얼마나 잡초가 순식간에 무성해지는지 아실 것입니다.
가시덤불만 잘 거두어내면 결실을 볼 가능성이 제일 많은 게 이 밭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아마도 여기에 많이 걸려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덤불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 죄의 본성을 대표하는 염려와 돈과 향락인지라 만만치 않다는 것이죠.
이 가시덤불을 거둬내려면 그 이상의 값어치와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걱정이 취미였는데 그리스도의 평강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아갈 때,
나를 위해 돈을 비축하고 나를 위해 쓰는 게 최고의 기쁨이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썼을 때의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갈 때,
세상의 재미보다 은혜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얼마나 즐거움이 샘솟는지를 알게 될 수록 우리 안에 가시덤불들을 거둬낼 수 있는 것이죠.
바울사도를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 목숨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에 가서 주님이 준비하신 그 아름다운 유업들을 보고나니 이 땅에서 애착했던 그 모든 것이 배설물이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결실해야 할 영원한 것이 무언지를 알려면 간단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게 바로 영원한 것입니다.
그걸 위해 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야 말로 잘 자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합니다.
몇 배의 결실을 맺었건 예수님께서는 다 좋은 땅이라고 하신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양적으로 얼마나 결실을 맺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열심히 노력해서 내게 맞는 믿음의 결실을 맺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인간은 다혈질이건 내성적이건 마음이 약하건 독하건 다 천성이 악하고 나쁜 마음입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좀 착해 보이기 쉽지만 본성은 다 악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만이 하나님 앞에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거듭나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해서 우리의 본성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의 변화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의 악한 본성을 제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죄의 본성을 더 잘 제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인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죠.
이런 마음은 말씀을 잘 듣고 지키고 끝까지 인내하여 결실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인내하며 삶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듭니까?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고 인내하면 반드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하게 될 줄 확신합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정말 말만 들어도 기분 좋은 이 결실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재물이 불어나 부자가 되고 손대는 일마다 잘되고 번창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시겠죠?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이룬 모든 것들은 하나님나라에선 단 한개도 결실로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룩하는 성공과 재물과 명예와 행복이 어떻게든 하나님나라와 관련이 되어야만 그것이 결실로 쳐진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해서 그 다음 뭐하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 부동산이 늘어 가면 뭐하겠습니까?
부자들이 하는 저주받을 ‘갑질’만 할 뿐입니다.
심리학자 폴 피프라는 사람이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현대인에게 자동차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죠.
4차선 도로에서 어느 차가 뻔뻔하게 끼어들기를 하나 조사했더니, 고급차가 30%, 소형차는 7%라는 통계가 나왔다고 합니다.
횡단보도 정지선을 침범하고 버티고 섰는 자동차를 조사했더니, 소형차는 거의 밟지 않은 반면, 고급차는 45%가 정지선을 밟고 서서도 당연하게 서있더라는 것입니다.
상류층일수록 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에게 그런 위험천만한 재물을 삼십배, 육십배, 백배씩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적인 복이 곧 하나님을 잘 믿는 백성에게 주시는 복이던 구약시대에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했더니, 복을 받았더라. 이 공식이 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 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 성케 하신지라
하나님을 경외했던 여호사밧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저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더라
지금도 우리에게 세상적 축복을 주신다면 이 공식에 먼저 맞아야 됩니다.
물질이 충족해도 하나님을 계속해서 경외할 만큼 믿음이 인정받은 다음에 주시는 게 맞다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 좋은 땅에 뿌린 씨앗이 맺은 결실은 단지 이 땅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맺은 열매들을 말씀합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성공한 사업,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 나의 재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한 시간과 재능, 복음을 위해 뿌리고 거둔 전도의 열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값비싼 결실인 것입니다.
올 해 얼마나 많은 귀한 결실을 맺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부족한 게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도 성장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봉사와 헌신도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오늘 네 가지 마음 밭 중 포기해야 할 밭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도 다 한 때는 길가 밭이었고, 겉만 흉내 내는 신자들이었고, 지금도 어느새 염려와 돈에 대한 집착이 무성하게 마음을 덮는 가시덤불 밭이 됩니다.
왜 내 삶이 풍요롭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않고 허전한지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착하고 좋은 밭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하면 반드시 만족스런 결실이 우리의 안과 밖으로 풍성하게 맺힐 것입니다.
좋은 밭은 분명히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했다고 오늘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 밭을 살펴서 부족한 부분들을 힘껏 보완해서 더욱 풍성한 결실로 기쁨과 보람이 가득 찬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4.12.7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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