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간도 먹고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거기다 걱정 근심까지 짊어지고 힘들게 버티다 오시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달 갤럽에서 135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삶의 질에 대한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조사 문항 중에는 국민 스스로가 느끼는 삶의 질 체감지수가 있었습니다.
이 결과 우리 국민들은 삶의 목표 실현에서 ‘고전 중’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46% 였고 ‘고통 받는 중’이라고 답한 사람이 40%였다고 합니다.
86%의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이죠.
철학자 강신0 박사는 ‘지금 우리는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염려사회에서 염려 없이 사는 방법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염려의 원인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염려의 원인인 미래를 부정하면 염려 상태가 완화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고 생각하자는 것이죠.
그럼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니 염려사회 속에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 같으면서도 역시 철학자의 말이라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나눌 본문도 우리의 염려를 염려하시는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예수님의 진심어린 위로가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냥 우리를 위로나 해주시려는 것일까요?
단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란 어차피 근심하고 염려하며 사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염려와 믿음이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는 사는 데 염려할 일이 분명히 발생한다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염려는 거기에 대해 불신앙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 염려하며 살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염려할 일이 많은 것은 분명한 데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니 그러고는 싶지만 그게 되겠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게다가 그게 내 힘으로 해결될 수가 없을 때어떻게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고 남들은 내 속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내 형편과 마음의 이런 갈등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걱정하지마, 다 잘 될거야.’ 이런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은근히 짓누르고 있는 근심을 벗어나 새롭게 용기를 낼 수 있게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실제 우리의 많은 염려와 걱정들이 해소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염려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5절에 보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있다고 하시죠.
먹고사는 문제로 근심 속에 사는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은 잘 될까, 벌여놓은 사업이 손해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다 노년에 먹고살게 남아나려나, 혹시 큰 병이라도 걸리면 치료비를 어떻게 감당하나.
이런 문제로 염려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먹구름이 끼고, 좋았던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모든 게 금방이라도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염려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짐까지 지고 문제 속에서 사는 건 휘발류통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거나 똑같은 것입니다.
문제보다 염려가 더 우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염려하면 뭔가 문제에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키가 작아 걱정한다고 해서 키가 일 센티미터도 자라지 않습니다.
다른 문제도 걱정한다고 해서 원하는 일이 결코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마음은 일을 더 망치기가 쉽습니다.
염려하면 사람이 부정적이 됩니다.
그래서 의욕이 떨어지고 바른 판단을 못하고 자신감도 사라집니다.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낳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많은 사람치고 시원하게 일이 해결되고 환경이 뻥 뚫리는 일이 좀체로 없습니다.
대개 걱정거리에 이어 또 걱정거리가 생기고, 근심에 근심이 쌓이는 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결국 지나치게 먹고사는 문제를 염려하다 귀중한 몸도 버리고 영혼도 구원받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염려는 믿음을 발휘하지 않는 나쁜 습관이니 절대적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염려를 물리치고 믿음으로 살기 위해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이는 이 땅의 모든 일들이 걱정거리고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음을 갖는 것이 염려를 이기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모든 것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십니다.
그 예로 예수님은 ‘저 날아가는 공중의 새를 좀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저 연약한 새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좀 보라는 것입니다.
새들은 하늘을 우아하게 나르며 놀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들이 재배하지도 않은 곡식들을 물어다 먹습니다.
농사를 짓는 분 입장에선 얄미운 새들일지 모르지만 새들은 그렇게 먹고 살도록 하나님이 자기 몫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것을 새들이 뺏어 먹는 게 아니라 사람 몫에다 플러스 새 먹이까지 열매를 맺게 해주신 것입니다.
수많은 새들이 저렇게 굶지 않고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지금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70억 인구도 하나님은 새들처럼 넉넉히 먹여 살리실 수 있습니다.
왜 지구상에 굶어 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고 끼니를 마련하기가 막막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인간이 싫어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친근하게 섬기고 이웃들과 오순도순 살아가라는 뜻에 불순종하고 내가 주인이 되고 나만 생각하다 인간사의 이 모든 고통을 불러온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그렇지 않습니까?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걸 원치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것뿐이 아니라 사실 저 사람이 못사는 것을 은근히 원하는 게 사람 심리입니다.
이렇게 서로 자기가 더 가지려하다 보니 흉악한 사회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빈곤문제와 고통의 원인이지 자연재해가 원인이 아닙니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정치와 경제와 전쟁의 양상으로 나타나 지구상에 굶주린 신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이 새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뜻대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은 70억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가 인생의 주인 되었던 삶을 회개하고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오셨습니까?
그다음은 창조주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우리 입에도 꼭 먹을 것을 넣어주십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지 매일 그렇게 우리가 먹고 사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길 가 풀 숲에 피어있는 들의 백합화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저기 피어있는 백합화를 좀 보아라.
저렇게 고운 옷을 입기 위해 스스로 한 일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피고 질 뿐이지만 비단에 금실로 수를 놓은 솔로몬의 옷보다 이 꽃의 영광이 더 빛난다는 것입니다.
작은 피조물까지도 최상의 것으로 입히시고 그것들이 최고의 가치로 빛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너희들을 영화롭게 둘러주시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절대로 헐벗고 천하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호자로 인정하는 한 하나님은 창조주의 책임으로 우리의 의식주를 맡아 주십니다.
3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아신다는 것은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의 의식주를 위해 손을 놓고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새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하늘을 날라다니며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기가막힌 동영상 작품을 그 때 그 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게 창조의 목적입니다.
둥지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되는 것이죠.
우리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의 법칙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심고 키우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럼 결국 자기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돌보심이 어디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의식주의 문제가 왜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고 근심이 됩니까?
노력해도 안되는 아주 나쁜 불평등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OECD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불평등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36개국 중 36위를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해결하기 힘든 갈등으로 절반 이상이 빈부격차를 꼽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일을 덜 해서 가난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잘 살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죠.
네팔의 어느 지역 사람들은 거의가 신장이 하나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다 신장을 하나 씩 떼어서 팔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 안하고 놀아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나라 노년 빈곤층 문제나 불평등 문제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루를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만 살겠습니까?
그제 있었던 판교 환풍구 사고를 보십시오.
행사를 기획했던 사람이 그 무거운 책임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가 SNS에 올린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는데 하루 만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지난 한 주간도 큰 사고 없이 가족들이 편히 지낸 것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적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내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무식해서 용감한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 삶을 충실하게 가꾸어 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과 소유들을 안전하게 두르시고 보장해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이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불확실한 직장문제와 장래의 문제들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철저히 계획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 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의식주문제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해결해 주시겠다는 경품까지 내 걸으셨군요.
이 말씀에서 주는 교훈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가치관에 대한 변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와 하나님의 나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 땅의 문제를 둘 다 유리하게 쥘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당장 눈앞에서 이 땅의 것들이 손해나고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하다는 것을 아시면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고 나서 하나님나라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순서를 바꾸신걸까요?
먹고 사는 문제에 빠지면 거기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결국 돈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나라의 의로 먼저 강화되지 않으면 의식주 문제, 결국 돈 문제에 매여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순서를 바꾸신 것 아니겠습니까?
돈 벌다가 주일도 못 지키고, 믿음을 못 지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본문 앞 24절을 보면 확실하게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이 주는 영향력은 거의 괴력입니다.
돈으로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숭배하고 부자가 되길 갈망합니다.
이 세상은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지배합니다.
강남의 아파트에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힘없는 경비원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들어보니 가관도 아니더군요.
돈 벌어서 다 그런 짓 하고 싶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쫓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이 주는 위력을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은 분명히 맘몬이라는 우상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갈 때 어떻게 하시려고요.
삼성 이회장님 같은 분이 가진 천문학적인 재산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죽을 때는 수의 한 벌 밖에 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회장님이 병원에서 퇴원하면 침대 채 방으로 실려 올라가기 위해 집안 엘리베이터를 병원에서 사용하는 대형 엘리베이터로 교체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병원 침대에 누운 채 대형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그게 무슨 더 호사라고 하겠습니까?
업혀서 올라가나 침대에 누워 올라가나 늙으면 다 그렇게 자기 몸 하나도 남에게 의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아놓은 그 많은 재물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편49편 말씀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우리 생각에는 이 땅에서 많이 벌어서 호의호식하다 죽기 전에라도 좋은 일해서 천국에 좀 쌓으면 좋을 것 같은 데,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재벌들이 죽기 전에 사회에 좋은 일 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거의 그러질 못하잖아요?자식들에게 물려주면 물려줬지.
그래서 결국 다음 세상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삶을 먼저 훈련받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돈 먼저 벌어놓고, 내 의식주를 안전하게 마련해 놓고 그때 가서 믿어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보다 지혜자이신 예수님은 결말을 통찰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만 영과 육이 균형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육의 일들은 너무 강력해서 언제고 영의 일을 밀쳐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따르는 게 무엇인지는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라. 등등.
정말 지켜내기 힘든 많은 조항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법은 우리가 살아왔던 스타일과 본성에 맞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간절히 추구해나가야지 ,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과 의지를 다해서 그걸 따라야 합니다.
의지라는 것은 사전에서 ‘특정 목적의 달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이라고 정의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 거의 고착화된 뇌의 작용입니다.
성격대로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달려가는 본성을 대항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삶으로 바꿔나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망해가는 세상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할 수 있는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풍족하고 많은 것을 더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세상 사람들도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지 않습니까?
기부하며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가수 션과 정혜영씨 부부 같이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더 많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분들도 작은 돈이라도 기부하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물질을 많이 갖는 것보다 더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돈 많이 갖고 불행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땅의 봉사와 희생도 보람 있고 이렇게 가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하는 일은 단지 이 땅에서 없어져 버리는 게 아니라 영원한 나라까지 기억된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왜 일어나지도 않을 일, 해결하지도 못할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냐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가 염려해서 되질 않습니다.
내일이 스스로 알아서 염려하게 두라는 말씀입니다.
내일 일어날 모든 일들은 우리 소관으로 조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모든 것을 준비했다 해도 내일 그 일이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자주 생활에서 이 걸 우리가 경험합니까?
내일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갑작스런 변수와 예측 못한 돌발적인 환경과 기타 등등으로 인해 우리가 염려하며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일이되야 거기에 맞춰서 일이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일로 가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버겁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 것으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의식주와 삶에 대한 문제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 곁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주가 돌보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염려는 떨쳐버리십시오. 그리고 만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게 맡기십시오.
염려는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육체를 쇠잔하게 할 것입니다.
내일을 철저히 계획하되 염려는 제거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생활 속에서 오늘 하나님의 인도를 감사하고 내일 감당할 일들을 도와주시길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가져가지도 못할 것들을 많이 모아 이 땅에 쌓아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았지만 별로 모으지도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도 만족하고 더 필요한 것은 또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의지적으로 지켜나갈 때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또한 더해주실 것입니다.
2014.10.19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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