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의 천국비유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설교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쉽고 강한 인상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영적인 진리를 쉽게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다른 비유에 비해 더 강하고 충격적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대번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비유설교의 의도를 정확히 그들이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한 임금이 아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하객을 초대했습니다.
미리 초청장을 보낸 사람들에게 결혼식 당일에 종들을 보내 참석해 줄 것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기 생업을 핑계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또 몇몇은 왕의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왕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동네를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이왕 벌어진 혼인잔치에 자리를 채울 하객을 마구잡이로 불러들입니다.
왕은 결혼식장을 가득 채운 하객들을 보기 위해 들어왔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불행히도 손발이 묶인 채 어두운 밖으로 던져집니다.
그리고 비유가 아닌 예수님의 사실 선포가 한 줄 나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는 그 때나 지금이나 듣는 사람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설교입니다.
구원 못 받는다고 판결을 받은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어이가 없을 일이죠.
또 함께 그 말씀을 듣는 사람도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함은 받았지만 과연 택함을 받았냐는 문제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안에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면 잔치석상까지 가서도 쫒겨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혼인잔치 비유는 난해한 비유 가운데 속합니다.
그러나 사실 난해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정말 보물과 같은 진리가 이 속에 담겨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하시는 대로 영적인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천국을 임금의 아들을 위한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잔치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기쁘고 웃음꽃이 피는 혼인잔치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라는 최영0 씨의 시집이 있습니다.
이 제목이 사람들의 마음을 끈 것은 잔치가 끝난 인생에 허무감을 다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엔 월드컵 경기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스페인을 향해 ‘스페인, 잔치는 끝났다’라고 쓴 기사를 보았습니다.
잔치가 끝났다는 말 뒤로 휑하니 허무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잔치가 끝나가고 쓸쓸함과 허탈감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또 다른 잔치거리를 찾아보지만 우리 삶에서 잔치의 즐거움은 어느 것이든 너무 짧게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말, 삶이라는 말에는 슬픈 여운이 감도는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영원한 천국의 잔치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인생이 남의 잔치자리에 설거지나 해주는 그런 삶이 아니라 잔치를 즐기는 주인공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시작되는 창세기에서 인간 역사의 시작은 아담과 하와의 아름답고 행복한 결합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성경이 끝나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영원한 연합인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끝을 맺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결혼잔치의 기쁨을 주시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완전한 일치감과 사랑으로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잔치집 같은 영원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왕은 모든 것을 빈틈없이 갖추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완벽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자신 있게 하객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왕의 잔치가 얼마나 호사스러운지 구약성경 에스더서에서 느껴볼 수 있습니다.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평민들을 위해 이런 호화로운 잔치를 배설했던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왕의 이야기입니다.
왕궁 잔치의 휘황한 광경을 담장 밖 평민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잔치를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3장에서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니고데모에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하늘나라의 영광과 비할 수 없는 기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아는 것을 말하고 본 데로 증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를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생의 삶이 끝나면 이 혼인잔치에 초대받고 응답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잔치하는 삶을 살 것을 말씀대로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생애의 일면은 천국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 중 사람들과 함께 나누셨던 수많은 잔치들입니다.
당시 세례요한과 제자들,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했다고 합니다.
보통 하나님을 경건하게 잘 믿는 사람들이 금식을 통해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을 많이 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선 종종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의 집에서 벌어지는 흥겹고 질펀한 잔치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손가락질 받고 자존심을 상하며 살아왔던 죄인들이 예수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이니 그 삶이 대번에 잔치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신 덕택에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즉 탐식하는 사람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은 누구나 기쁘게 잔치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누릴 풍성하고 만족한 삶을 잔치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혼인잔치의 완전한 기쁨입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과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였던 그 죄인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지금 이 땅에서도 잔치하는 삶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내 삶이 잔치집 같이 변했다는 확신이 드십니까?
여전히 불꺼진 우울한 방입니까?
구원을 받은 우리는 천국에서만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당첨된 복권을 지갑에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얼굴에 어떻게 웃음을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당장 날라 오는 고지서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고 살겠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성도에겐 감출 수 없는 잔치의 기쁨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불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본래 죄인들의 심령에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외부에서 기뻐할 조건이 좀 생기면 겨우 잠깐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안에 천국을 소유한 기쁨이 들어오면 언제든 믿음만 가지면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이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이런 기쁨의 원천을 이미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언제든지 이 기쁨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낼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기쁨이 다 고갈되고 주변에 먼지가 풀썩거릴 만큼 메말랐다면 믿음으로 이 기쁨을 이끌어내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이 있어야 우리 심령을 짓누르는 근심과 문제들이 가벼워집니다.
문제가 먼저 해결되야 기쁨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영원히 우리 심령의 갈등은 해결도 안되고 영원히 기쁨은 내 인생에 오지 않습니다.
기쁨은 누가 뭐래도 구원받은 성도의 표식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믿음으로 즐거워하며 나 자신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천국의 기쁨을 위해 이 땅에서 모든 기쁨을 유보하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듯 하나님께도 지금 우리가 기쁨으로 행복하게 삶을 누리는 게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고 즐겁게 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미국교회에서 목사님이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는 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들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감이 없다는 것을 보며 적잖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남과 비교해서 나를 대단하게 여기거나 나만을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즐겁게 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 결국 모든 불행의 화살을 남에게 던지게 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나를 잘 위로하고 즐겁게 할 방법들도 잘 연구해서 누리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쁨의 원천 자체가 내 안에 없다면 내 삶을 잔치집으로 바꿔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다음, 이 천국잔치에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에 왕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유대민족과 종교지도자들을 말씀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모욕하고 살인한 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먼저 초청받은 이들이 한결 같이 혼인잔치 참석을 거절한 것일까요?
5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댄다 해도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
왕이 초대한 잔치의 즐거움과 기쁨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그들에게 인생목적은 유일합니다.
밭으로, 또는 사업하러 자기의 현세의 이익을 도모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유가 마치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것 같이 행동하지만 실은 자기 이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들을 때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교회오기를 지체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현실에 이익 때문이라는 것이죠.
당장 밭에 일거리가 있고 사업을 벌여 놓았으니 영적인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죠.
최악의 초청자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는 부류들입니다.
당시에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박해하던 종교지도자들을 말씀합니다.
지금도 가장 박해받는 종교는 단연코 기독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악령들에 영혼을 도적질 당한 악한 무리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왕의 심판을 본문에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살인자는 진멸당하고 그 동네는 불살라졌다고 말씀하죠.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공들여 키우려던 사업도, 추수할 밭의 작물들도 다 불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유익과 의무를 미루고 내가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재물과 건강과 출세와 취미생활이 결국 남아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무시하고 죄인들이 애지중지 경영하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 날에 아무 의미 없이 불살라질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일차적으로 서기70년에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로마 티투스장군에 의해 짓밟히고 백 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된 뼈아픈 역사를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받을 심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인간에게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반드시 돌려받으십니다.
이 온 천하도, 우리의 생명과 주어진 이 땅의 시간도 다 하나님의 창조하고 부여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제 것인 것처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분명히 직시하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창조주를 통해 목적이 있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분명한 목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또 영광스럽게 창조해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목적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모든 인생은 반드시 그 선악간의 행위대로 하나님 앞에 결산하고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날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 한다 해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엄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기가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핑계치 못하고 본문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유구무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들 대신 초대받은 제2차 손님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1차 손님들의 구원의 초청에 대한 거절로 인해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말씀합니다.
물론 이방민족의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 계획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너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대민족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복음이 먼저 이방민족들에게서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게 하죠.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유대민족을 넘어 모든 종족과 민족에게로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전해졌고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고 이 자리에 우리가 나와 앉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가지 제동이 걸립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 쫒겨 났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까지 가서야 구원받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복이 무엇이기에 잔치 석상에서 쫒겨나냐는 것이 오늘 메시지의 또 하나의 요지입니다.
고대 왕의 결혼식을 보면 초대할 사람들에게 예복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왕이 누군가를 부를 땐 좋은 옷을 보내는 관습이 고대 왕국에서는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오늘 초대된 사람들에게도 예복이 지급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이 풍습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예복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 자들이 입을 거룩한 옷을 말씀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의 의상에 대해 성경은 몇 군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과거의 내가 완전히 죽고 새롭게 태어난 거듭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천국 혼인잔치에 들어갈 예복을 입은 자들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무리들이 천국의 잔치에 참여한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푹 잠긴 자들이 천국문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19장7절에서는 이 예복이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러니 종합하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영원한 의의 옷인 예수님을 믿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거룩한 행실을 동반한 믿음이 천국에 들어갈 때 입을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이런 조건에 무언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고 다 자격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왜 쫒겨난 사람은 왕이 지급한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요?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왕의 질문에 대해 그 사람이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옷이 없어서 못 입었거나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왕이 지급한 예복이 못마땅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겼거나, 소홀히 생각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옷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점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설 수 있는 유일한 의는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놓을 어떤 의도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래 교회를 다닌 관록도,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한 것도, 기도와 전도를 많이 한 것도, 결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갈 때 한 터럭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의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의 의로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오직 예수님을 의지해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끝으로 살펴볼 것은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석상에 나타난 사람을 내쫒고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장로교의 예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을 이미 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복음을 듣고 스스로가 구원받기를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예정된 자만 복음을 믿게 되어 있냐는 오랜 논제입니다.
여기서 또 감리교와 장로교의 입장이 양분됩니다.
감리교는 구원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입장입니다.
장로교는 구원받을 자들이 이미 태어나면서 정해진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성경에 이 두 가지를 다 주장할 만한 상반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교리가 나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택함을 입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는 듯 보입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선택과 예정의 두 가지가 혼합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이 말씀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석상에 나온 사람을 내쫒은 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택함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왕이 친구여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었다는 것은 예복을 입고 안 입고의 일차 책임은 당사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분명히 예복을 입지 않은 책임이 왕이 아니라 입지 않고 나온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본문이 명시합니다.
그랬기에 그 사람이 입이 있어도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 입을 예복은 왕이 마련해 주는 것이지만 입어야 할 책임은 절대적으로 본인에게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은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믿기로 결단하고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구원은 인간의 선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굳이 택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데는 구원의 과정엔 무언가 택함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신기한 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한결같이 내 힘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받거나 설교를 듣고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사실에 동의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것은 물론 자기의 선택과 의지로 합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믿어지고 천국과 구원이 믿어지는 때가 되면 그때 이 믿음이 내가 선택해서 믿었던 과거의 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 내가 의지와 이성으로 믿었던 그 믿음하고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신뢰가 어느 순간 확 내 안에 들어온 그런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구나, 내가 이것을 믿는 것이구나’ 확신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출처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 믿음을 주지 않으셨으면 어쩔 뻔 했나는 진정한 수혜자의 겸손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이런 믿음 이전에는 아직 내 의지로 믿었고, 내가 믿기로 선택했고, 한편 믿어준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언제든 자기 의지로 믿음을 떠날 수도 있고, 작은 헌신과 봉사에도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택함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육체도 자랑하지 못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잘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와 인격과 사랑이 믿어지는 믿음을 향해 계속 나가야 합니다.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더욱 말씀과 기도와 순종과 은혜를 추구하는 삶으로 결단하고 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보고 들으며 어떤 마음들이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집에서 물건을 좀 정리하다 과거에 남편이 출장 가서 보내온 엽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짧은 내용인데 읽는 순간 남편의 마음과 인격과 말투와 기분이 그대로 느껴지더군요.
오늘 예수님께서 이런 과격해 보이는 비유의 말씀을 하는 그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살진 짐승이 아니라 아들을 잡으시고 천국 잔치 입장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진심을 말하고 또 말해도 의심하고 외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이 결국 맞게 될 비참한 말로를 이보다 더 간절하고 가식 없이 말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엔 사람에 비위를 맞추거나 미사여구로 홀리거나 진실을 과장하거나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삼년 반의 구속사역 중에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충돌과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들을 적수로 생각하신 적은 한번도 없으십니다.
저들을 긍휼히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셨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 둔 마지막 주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것 같이 예수님 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길 간절히 원하셨던 주님은 그들이 아까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며칠 전 제가 잠시 강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손님이 왔다 갈 때 따라 나갔다가 강아지를 못 본체 밖에 두고 문을 닫고 들어온 것입니다.
나갔다 돌아와보니 1시간이 지나서야 강아지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계셨습니다.
밖으로 나가 아파트 정원 구석 구석 들여다보며 강아지를 찾는 데 참 막막하더군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가 내 수중에서 사라져도 그 마음이 정말 묘하게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 마음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을 놓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경비실에 가서 물어보니 다행히도 누가 계단에서 배회하는 강아지를 데려다 놓았다고 했습니다.
방송실 낯 선 곳에 비닐 끈에 목이 묶여 있던 강아지와 감격의 상봉을 했습니다.
강아지를 안고 집으로 올라오는 데 강아지를 번쩍 하늘로 쳐들고 ‘찾았다’ 라고 외쳤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는 주님의 잃은 양과 목자의 비유가 실감이 나더군요.
예수님은 지금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혼인잔치를 거절하고 집을 나가 유기견처럼 떠돌다 사나운 악령에게 찢길 운명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향해 진실을 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실 시간이 이제 더는 없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은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취하십시오.
그리고 이생에서도 잔치하는 인생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입고 천국에 들어갈 예복은 유일한 구원자되신 예수님을 믿는 의의 옷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도의 행실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 받은 자들을 엄선된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을 부정하던 우리를 택해 주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감사로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4.6.22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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