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예수님의 새가족 (마태복음12장46절-50절)

남수연 2014. 6. 5. 22:13

예수님의 새 가족

마태복음12장46절-50절

5월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에 예수님의 새 가족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달 오월이라고 우리가 말을 합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올해 가정의 달이 아름다운 오월이 아니라 오열하는 오월이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세월호 사건 뿐 아니라 무너져가는 위기의 가정들도 슬픔으로 오열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참 힘든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은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의탁할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그래도 이 땅에서 가정만큼 편히 몸과 마음을 쉴 곳이 어디 있습니까?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와 편한 이부자리에 누우면 그 순간 잠깐이라도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게 없는 행복감도 내 집이기에 느끼는 것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내게 힘든 일이 생기면 사실대로 얘기하고 대책을 함께 강구할 사람은 가족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가정이 자랑스러운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다 그렇게 축복해 주시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점점 더 귀하고 아름답게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께도 이런 지구상의 행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좀 가난했지만 이 세상에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일찍 가장이 되신 예수님은 가족들의 생계를 맡으시고 단란하고 믿음직한 가정을 꾸려나가셨을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고 동생들이 형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훌륭한 가장의 역할을 하셨을 게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한결 같이 부드럽고 온화하신 인품으로 가족들이 다 안전을 느끼며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의아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가정을 떠나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에 한창이신 예수님의 사역현장에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뜻밖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의 무리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바로 내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가족들이 밖에서 들었다면 얼마나 모욕과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아꼈던 가족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왜 이렇게 돌변한 것일까요?

오늘 같은 주님의 반응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얼핏 보면 삼십년을 사랑했던 가족들은 안중에 없다는 듯 주님을 따르는 새 가족을 두둔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거나 대하는 상대마다에 따라 인격이 바뀌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회도 실수도 없이 일관되게 우리를 한결 같이 사랑하며 인도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품에 일관성이 없다면 어떻게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진심을 다해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가족들에 대해 갑자기 돌변한 모습으로 대하시는 예수님께 대해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평소의 인품과 대치되는 말과 태도를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안티기독교인들은 그런 부분을 들먹이며 예수님에 대해 인신공격을 합니다.

우리가 의문을 느끼는 주님의 언행 속에는 더 관심을 집중시켜서 꼭 깨닫게 해야 할 더 귀중한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가족들에게 모욕이 되고 상처가 될 수 있는 위험한 화법을 쓰셨다면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오해받으실 상황을 자청하면서라도 관심을 끌고 밝혀야 할 구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혈통적인 가족관계가 영적인 가족관계 보다 가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있다면 그 진의를 잘 살펴서 영적인 보화를 캐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보며 그 속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한 순간만 보아서는 오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나중에 변명을 듣고 나면 이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때로 순간적으로 한 내 행동에 대해 상대가 오해할 것 같아 혼자 고민하며 마음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차저차 변명을 좀 하고 싶지만 기회가 없을 때 답답하고 괴롭죠.

성경에서도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지 않고 한 두 구절만 보면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오늘 말씀도 이 앞에 있는 내용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오해가 됩니다.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라고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서 여전히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때 입니다.

앞에서 무언가 말씀하셨고 계속해서 이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럼 앞부분에 있었던 사건과 지금 상황을 관련시켜야 정확한 주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볼 때 이런 세심한 관찰을 하고 사실을 따지는 지 아십니까?

한 두 줄의 기사처럼 적어놓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고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 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주시는 지 이런 모든 믿음의 자료들을 말씀 속에서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님이 우리의 지각을 조명하시면 마치 예수님을 만나본 것처럼 체험적인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죠.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 그리고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교제와 삶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엄격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구약성경에서 계속 예언했던 그 메시야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일 예수님의 주장대로 그 메시야라면 확증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시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바로 메시야라는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제자들도 전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한 귀신이 나갔다가 일곱 귀신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 더 심각한 형편에 빠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하는 자의적인 종교생활의 위험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다 오늘 말씀과 연결되는 것이죠.

아마도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되어 있고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간에도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한 눈에 봐도 시골사람처럼 보이는 허름한 행색의 모친과 형제들이었습니다.

고향 나사렛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진 이 가버나움까지 아마도 걸어서 찾아왔다면 행색이 더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까지 들은 바리새인들은 그야말로 독기가 잔뜩 올라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공교롭게도 이 때 등장한 남루한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은 분명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찬스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에서 올 것임을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왕권과 권력과 실력을 갖춘 정치적인 인물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죠.

유대의 왕으로 받아들일 만한 대단한 인물을 기대했던 유대인들에게 가난한 목수출신의 평민 메시야는 정말 수치스럽게 느꼈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예언대로 오셨습니다.

이사야서53장2절에 기록된 대로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침 이 때 나타난 초라한 행색의 가족들을 예수님 곁에 세워놓고 출신 성분을 조롱거리로 삼으려던 것이죠.

게다가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을 보면 가족들이 예수님이 미친 것으로 생각해서 데려가려고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반격할 절호의 찬스인 것입니다.

그래서 47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그런 속셈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이 말씀을 읽으면 그런 뉘앙스가 확실히 풍기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때로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가족들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쟁쟁한 인물들이 친척이라고 들먹이는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내세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안이 좀 창피할 때도 있죠.

예수님도 그 순간 그런 입장이셨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상황을 통해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엄중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현재 육신의 가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말씀하시는 의도는 육신의 혈통만으로는 절대로 메시야의 가족이 될 수가 없다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이 누구를 겨냥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이 아브라함 혈통과 율법을 자랑하며 당연한 하나님의 백성행세를 하지만 절대적인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서의 ‘로암미’ 선언과 똑같은 것입니다.

호세아서 1장9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가르쳐도 하나님을 벗어나 죄를 향해 달려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이 지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로암미 선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더 이상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혈통에 율법까지 지키니 구원을 당연지사로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지금 호세아선지자 때 말씀하신 그 예수님께서 다시한번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숨이 느껴지십니까?

어찌 그렇게 너희들은 패역한 조상들의 뒤를 따르냐는 것입니다.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을 버리는 아픔을 지금 사랑하는 혈육의 가족을 부인하는 아픔으로 표현하시는 것이죠.

지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천상의 가족을 찾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연적인 출생으로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의 출신성분을 주님의 피로써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가족을 삼아 데려가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종교관으로 구원을 자부하던 이 종교지도자들은 천국백성으로 초청하는 예수님을 박대하고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구원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구원의 길을 막고 다른 사람도 못들어가게 한다고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종교인들에 대한 로암미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현대에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어쩌면 로암미 선언을 받아야 하는 형편에 있을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 만큼 구원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온갖 율법을 지나치게 추가해 가며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칫 종교적인 열심이거나 겉모습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우리가 항상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심이셨듯이 우리의 전 인격을 다해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오해가 풀리셨을 것입니다.

걱정했던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새 가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한 사람이 바로 오늘 문전박대 당한 예수님의 아우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영적인 가족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새가족으로 삼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우리를 향한 일관된 선하심을 더욱 굳게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새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선 오늘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가족이라고 하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49절에 보면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주님의 가족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새 가족입니다.

또 본문 50절에서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통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자격은 구별 없이 다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새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하나님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새 가족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내 의지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뜻이 대체 무엇인지 몰라 안타까운 심정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데나 펼쳐도 지키면 복이 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일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속 일관되게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는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해 보여도 한 꺼풀만 들추면 죄가 자자합니다.

이 죄악이 걸국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것이잖아요?

우리에게 있는 자연적인 죄의 본성이 저절로 쉴새없이 죄악을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숭고하고 고결한 신념으로 인간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결과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교묘히 숨겨진 죄의 잔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면 다 보게 됩니다.

그러니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방식이자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하심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에수님의 새가족들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다른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 가정의 가장이 되어 주십니다.

재력과 권력이 있고 신뢰할 만큼 좋은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며 고민하고 애타는 많은 문제들이 좀 더 쉽게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이만 해도 아버지들이 가족에 대한 인식이 참 빈약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하고, 가정을 어떻게 잘 꾸려가야 하는 지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요즘 부모들은 그래도 참 자식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강한 것을 봅니다.

제가 아는 분이 딱한 친구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친구의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눈에 암이 생겼다고 합니다.

한 쪽 눈이 그런가 보다 했 데 다른 쪽 눈도 그만 암이 생긴 것입니다.

두 눈을 다 수술해서 적출하게 된 것입니다.

부모마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아버지가 의사에게 자기 한 쪽 눈을 아들에게 이식을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암세포가 남아 있어서 다른 안구를 이식해도 곧 암세포가 자랄 거라는 것이죠.

자기 자식에게 눈도 하나 마음대로 줄 수 없어 괴롭다고 울더랍니다.

부모이기에 자기 눈이라도 뽑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원한다고 해도 우리가 자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의 아버지는 육신의 부모보다 더 완전한 사랑이 있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손과 발을 못에 박히셨지 않습니까?

앞이 캄캄해 질 때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주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엇인들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시니 염려하지 말고 의논하고 함께 해결하자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를 하나 하나 응답하시고 인도하시는 게 얼마나 놀랍고 사실적인지를 날마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일 일을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구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인도해 주십니다.

제가 요즘 해야 할 일이 좀 많고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서 걱정이 되고 좀 초조해지더군요.

그런데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정해진 시간 안에 지혜를 주셔서 더 많은 것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감사하고 즐겁게 현실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오죽 잘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기도했더니 정말 산더미 같던 과제물이 잡기만 하면 술술 써지는 거예요.

혹시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봐 염려하십니까?

내 원대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 이젠 우리가 알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했던 것은 나중에 더 심각하게 염려할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시길 믿고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이 세계 실종아동의 날이라고 합니다.

한 기사를 보니 아들을 잃어버린 28년 전 내 인생시계는 멈췄다는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3살 난 외아들이 친구와 놀러나간 뒤 행방불명 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을 찾아다닌 게 28년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어디 있는지 모를 아들걱정으로 약을 먹어야 밤잠을 이룬다고 합니다.

며칠 전 기념식에서 한 아버지가 7살 때 실종된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3년 동안 널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오늘 새벽에도 눈물로 하나님께 널 다시 가슴에 끌어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빠가 끝까지 널 찾을 거니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우리 가족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

장내는 행사에 참석한 실종자 가족들의 흐느끼는 소리로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아픔들이 아름다운 가정의 달 5월을 오열하는 달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눈을 적시던 잃었던 자식들입니다.

잃어버린 자식들을 찾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오신 예수님을 오늘 바리새인들처럼 외면하지 않길 원합니다.

영원히 천국으로 데려갈 우리를 찾아내셔서 주님의 보혈로 죄를 씻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식들이 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천상의 가족이 되어 영원히 누릴 영광과 복락을 생각하면 이 땅의 수고와 고생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함께 하는 가족들로 인해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로 천상의 혈연관계가 된 믿음의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길 원합니다.

친구를 위해, 형제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성도들의 사랑과 연합이 하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의 가문입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이런 사랑으로 더 똘똘 뭉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축복이 앞으로도 계속 충만하게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2014년5월2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