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큰 잔치
마태복음9장9절-13절
오늘은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본문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세리였던 마태가 제자로 부름을 받고 시끌벅쩍한 잔치가 벌어진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수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모인 좀 우스꽝스러운 잔치였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어디가면 누구하고 어울릴지를 은연중에 선별합니다.
대개는 자기보다 사회적인 지위나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을 선호하죠.
좀 유명인이나 높은 계층의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랑거리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선별해서 찾으셨던 사람들은 병들고, 귀신들리고, 냉대 받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병든 자식을 먼저 돌보시는 창조주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랑으로 마태를 찾아가셨고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불행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길지 않지만 한 사람이 구원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은혜로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마태가 구원받고 제자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9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가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마태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에 그만두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마태의 결심이 그렇게 즉흥적이었을까요?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새 출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같은 업종에서 직장을 옮기는 것도 얼마나 고민되고 결정하기 힘든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일어날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믿기로 결단하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배경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지만 분명히 만족스럽지 못한 환경과 심리적인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데‘ 하나님이나 한번 믿어볼까’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마태도 역시 불만족한 환경 속에서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먼저 세리라는 마태의 직업에 대해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지금도 세무공무원, 세무서 같은 것을 떠올리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죠.
월급명세서 받아보면 제일 먼저 수령액을 보고 그 다음 세금을 얼마 떼었나를 봅니다.
그리고 늘 부당하게 세금을 많이 떼인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집니다.
세금에 대한 원초적인 저항이 사람들에게 있죠.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세리라는 직업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착취와 세금 폭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때를 생각하면 쉽게 상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지번주소가 생기게 된 것이 일본인이 토지를 강탈하려는 목적으로 이완용을 시켜 토지마다 번호를 매긴 것이 시초라고 하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토지의 40%를 무연고로 처리하고 강탈해서 일본인들이 대지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군산항에는 뜬다리라고 있습니다.
밀물에는 높아지고 썰물에는 낮아지는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부잔교입니다.
당시 일본이 호남평야의 쌀을 하루에 화차 150량을 날라다 일본 땅으로 실어갔다고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쌀을 실어가기 위해 물때랑 상관없이 언제고 선박을 접안시킬 수 있는 이 부잔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봐도 당시 착취가 얼마나 심했을지 알 수 있죠.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에 착취당한 것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 대대로 예언되어 왔던 메시야가 나타나 해방시켜 줄 것을 고대하는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했던 시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금징수자가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또 당시 세리는 특별한 월급이 없이 로마당국이 지정해준 세금을 걷어낼 때 적당히 자기 몫을 붙여서 챙겨가게 되어있었습니다.
합법적으로 얼마든지 세금을 더 걷어 주머니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대부분 당시 세리들이 굶주린 서민들과 달리 잘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졌는 데 누가 양심적으로 하겠습니까?
이런 세리에 대한 사람들의 보복은 세리를 창기들과 똑같은 계급으로 낙인찍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을 팔고 로마에 빌붙어 돈을 버는 세리나 몸을 팔아 도는 버는 창기를 진짜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돈은 좀 모았지만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참아야 하는 게 마태의 인생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좀 무시당하는 시선 느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교사 직업 덕택에 어디가도 무시는 당하지 않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제이스도시락을 운영할 때 오0 교회 행사에 단체 주문을 받아 배달을 간 적이 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가 도시락을 직접 가져온 것을 보며 행사 담당한 젊은 목사가 참 복잡한 눈빛을 하더군요.
동정도 무시도 아닌 그런 묘한 시선도 참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내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느낄 때 참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잘나가던 기업임원들이 비리로 취조 받다 모욕감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기도 하죠.
이런 냉대와 모멸을 당하며 사는 마태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돈은 좀 모았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없었습니다.
먹어도 배가 안 부른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가졌어도 인간은 구원받기 전엔 결코 만족할 수없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불만족, 죄인으로 살아가는 두려움이 마태를 계속해서 짓눌렀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자기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에 대해 실망하고 잡은 손을 좀 느슨하게 합니다.
우겨싸인 환경, 인생에 대한 허무, 죽음 앞에서 엄습하는 두려움, 이런 것들이 계속 쌓이고 점점 짓눌릴 때 인간은 비로서 영적인 관심을 갖습니다.
그 때 마태는 메시야일지도 모르는 분의 출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마태가 일하던 곳이 가버나움 세관이잖습니까?
거기가 예수님이 사시던 그 동네입니다.
갈릴리 지방과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주 사역지였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사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의 현장을 지켜보고 말씀집회에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일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말씀에 아직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은밀한 기대가 싹텄을지 모릅니다.
그 생명이 흘러넘치는 곳에서 왠지 가슴이 벅차고, 이 갈증 나는 삶을 내팽개치고 진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집회현장에 수차례 드나들며 결심이 굳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완전히 믿기까지 이런 탐색의 시간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탐색 중에 계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그날 아침, 이건 제가 쓰는 드라마입니다.
한 무리의 열심당원들이 세관 앞에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고 지나갑니다.
마태의 굴욕은 최고점을 찍은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날 마태의 앞을 지나시며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 내 인생을 멈추고 싶지만 내 힘으로 그럴 수 없을 때 그 때 예수님이 그 죽음을 향한 질주를 멈춰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날 우연히 그 곳을 지나시다 즉흥적으로 마태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 삼으실 마태를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도 그랬잖습니까?
이미 무화과 나무 아래서 묵상하던 나다나엘을 보고 계셨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우리의 선택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주목하여 뒤쫒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절대자의 도움이 절실하고, 삶이 지겹고 무의미할 때 그 때를 맞춰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금방 잡힐 거리만큼 가까이 곁에 오시는 것이죠.
결국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환경과 사람과 질병도 그래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잘 되었으니 나쁜 환경도 곧 고치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 당하는 여러 시련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길이 마냥 평탄하면 겨우 예배한번 드리는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그것도 제대로 못 지키기 십상입니다.
삶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 힘들고 낙심할 때, 해결해야 할 태산같은 문제들이 있을 때는 절망할 때가 아니라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기회의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 깊이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태처럼 주님을 따르기로 모두들 참 잘 결정하셨습니다.
마태의 인생이 부르심에 응답한 것으로 인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며 우리의 삶도 그런 축복이 임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은 예수님을 따른 마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큰 잔치를 합니다.
침울하고 어둡던 마태의 인생에 기쁨과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살면서 잔치란게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잔치할만한 일들이 아무 것도 없는 침울하고 근심이 잔뜩 끼어있는 집들이 참 많습니다.
마태의 집에 그동안 무슨 잔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집에서 잔치까지 벌여 비난을 자초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인생이 잔치하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진리와 길을 발견한 사람들의 자신감과 만족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뒤 큰 잔치를 베풀고 기쁨으로 재산을 풀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153마리의 고기를 잡지만 미련 없이 다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삭개오에게 가장 중요했던 돈, 어부였던 베드로의 물고기, 그동안 각자의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이고 생명과 같던 것들이 구원의 기쁨에 비해 뒤로 밀린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낙심했다가도 내가 영원히 거주할 진짜 천국의 삶을 생각할 때 기쁨이 서서히 솟구쳐 현실을 이겨내야 그 구원이 정상인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건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만난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축제 같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필리핀의 쓰레기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난지도 쓰레기장 같은 마을에서 아이들이 음식물을 뒤져서 먹고 삽니다.
그 곳에서 선교사가 하는 교회에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데 아이들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열 살 안팍의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기쁨에 넘쳐 춤을 춥니다.
한 여자아이가 나와 간증을 하는 데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오늘은 제 생일이지만 집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 너무 감사해요.
그 말을 들으며 선교사님이 우시더군요.
아무리 어려도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은 심령은 이런 기쁨과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많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은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지고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이 넘치는 사람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그래서 결국 온 가족이 구원받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점차 구원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당연히 놀라운 반전의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한 누가 복음을 보면 마태의 이름을 알패오의 아들 레위하고 기록합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 레위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마태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으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의 삶을 살며 그 이름이 얼마나 마태에게 창피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아마도 그 이름을 감추고 마태라는 이름으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된 뒤 누가는 마태의 이름을 레위라고 기록합니다.
마태가 레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이상 조롱이 아니라 실제 레위의 이름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자기 스스로를 여전히 겸손하게 마태라고 부르지만요.
누가복음하고 본문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차이들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자신이 그냥 일어나서 따르니라 라고 기록했지만 누가는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그냥 음식을 잡수셨다고 기록하지만 누가는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가 참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태에 대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마태가 무슨 말을 한 기록이 한군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제자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묵묵히 제자들 뒤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 마태를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제쳐두고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복음이 없잖습니까?
베드로는 항상 앞에서 설치느라 예수님의 사역을 꼼꼼히 살피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항상 제자들의 뒤에서 조용히 주님을 따르던 마태는 모든 상황을 주목하였고 가장 긴 복음서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마음을 읽었고, 그의 열등감과 상처를 놀라운 사역으로 치유하고 사용하셨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진짜 인정하고 세워주십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할 것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애와 부활과 승천의 증인이 되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법정에 증인으로 세울 수 없었습니다.
세리의 증언은 인정받을만한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 법정에서도 증인으로 설 수 없던 마태를 온 세상에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고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세심한 배려이신지요.
우리들 각자도 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우리가 가진 것들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삶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 가치있고 보람있게 사용된 마태와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이 기쁜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11절에 보니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기회를 보고 쫒아다니던 바리새인들이 이 기쁨의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어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냐.
원수들은 항상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유도해 의심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마태와 같은 세리들과 어울리는 것이 내심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의혹을 가질만한 상황을 마귀는 놓치지 않고 덫을 놓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대신 대답하십니다.
의혹이 들 때 불신케 하는 마귀의 말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바리새인의 질문과 좀 동떨어진 대답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왜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식사를 하냐고 묻는 데,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대답이 엉뚱한 것 같지만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죄인이나 세리들과 상종하지 않습니까?
부정탈까봐 그렇습니다.
율법에 부정한 물건이나 시체에 닿으면 부정해지기에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세리 같은 죄인과 상종하는 것 자체로도 자신이 부정해진다고 믿었기에 교제 자체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이 지금 세리의 죄로 부정한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며 어떻게 자신을 더럽히며 죄인을 사귀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참 절묘하게 자신을 의사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의사는 병자의 병이 옮을 까봐 피하는 자가 아니라 병자의 병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죄가 두려워 피하는 율법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죄인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다루실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온 세상의 죄로 자신을 오염시키고 그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를 끝장내실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라는 구약 호세아의 말씀의 뜻을 다시 배우라.
호세아 당시의 잘못된 제사처럼 바리새인의 율법 지키는 본심이 틀렸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해 제사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를 속죄할 방법으로 동물을 대신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제사의 목적은 죄에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댓가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죄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로 우리 삶에 저주와 질병과 가난과 눈물이 실제적으로 군림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형벌을 벗어나기 위해 대신 죽어야 할 대속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란 것이 제사법의 목적입니다
제사를 많이 드리면 드릴수록 자신의 죄가 많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어이없이 제사를 많이 드린 것으로 자랑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신앙의 행위나 결과를 자랑하고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낙심하고 실패합니다.
오직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께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 천국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거기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사를 더 많이 드리고 율법을 더 많이 안다면 더 죄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신앙의 경륜이 오래면 더욱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맞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죄도 이해하고 긍휼히 여겨야 맞는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이 완전 정반대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 지금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도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명목적인 신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분명히 갖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만 한편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틈틈이 우리의 구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얼마나 내가 죄에 대해 자각하고 회개하는 지를 통해 점검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무섭고 뻔뻔한 시대입니다.
죄를 병이라며 서로가 면죄부를 줍니다.
우리가 동성애자, 살인자, 전과자, 성폭력자 같은 죄인들을 대할 때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런 종류들이 다 죄라고 분명히 지정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불우한 어린시절의 환경 때문에 병 든 피해자라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와 주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역시 성경이 분명히 죄라고 지적하는 일에 핑계대지 말고 순순히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두는 것이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천국이 확실하지 않다면 저는 여기 있을 필요도 없고 성도님들을 교회 나오시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있지도 않은 천국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고난 받고 죽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토를 달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봐도 내가 죄인이 아닙니까?
누가 죄 짓도록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가 죄를 짓는 것은 본질이 죄인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왜 죄를 이야기하면 현대 신자들이 기분나빠합니까?
거듭난 신자들은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오히려 시원합니다.
내 죄가 드러나면 회개하고 하나님과 막힌 것들이 사라지고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내 죄로 찔리지 않는다고 죄가 없는 게 아닙니다.
자각이 없다면 더욱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며 성경이 죄라고 지적한 것들을 스스로 시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거짓말 하는 것 회개해야 합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척하는 교만 회개해야 합니다.
불손한 언행, 무자비한 마음, 음란, 방탕,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죄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나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과거의 내 삶의 방식대로 살며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죄를 회개한 기억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서도 분명히 불확실할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한 목사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책망받고 심판받을 것입니다.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교회 가족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설교를 하지 않아서 머잖은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누군가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얼마나 제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겠습니까?
목회를 하며 제일 두려운 게 그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왜 내가 목사가 되었나 후회가 되고 어쩔 수 없이 성도 한분 한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십니다.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파멸시킬 모든 죄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회개한 죄인만이 진정한 구원의 행복을 느끼고 마태와 같은 큰 기쁨의 잔치를 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모두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주의 보혈로 용서받고 다시 축복받는 행복한 죄인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3.12.8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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