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부스러기 은혜도 족하다 (마태복음15장21절-28절)

남수연 2013. 11. 11. 17:27

 

지난 주 대학수능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저녁 뉴스에 수험장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아이를 수험장에 들여보내고 눈물을 쏟는 한 어머니의 모습에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부모마음이 다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흉측한 귀신에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간청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대로 응답하셔서 사탄에 매였던 딸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라는 책을 쓴 버트란트 러셀이란 철학자는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본문 내용이라고 합니다.

러셀은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러 나온 여인을 ‘개’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그 인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살아계신 아버지라는 것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증거를 근거로 합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내 인생을 걸고 믿을 만한 분인지, 주님의 언행이 과연 진실하신지 깨닫고 확신하며 믿는 것입니다.

반드시 확인하며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확신이 안드는 내용을 언제까지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이 정말 확실하게 믿어지든지,

아니면 성경말씀을 통해 캐내고 캐내서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내 지각을 통해 확인하고 믿기로 결심하든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러셀이 말한 대로 인격모독 발언을 하는 분이시라면 분명 주님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시라면 우리도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과연 예수님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 같은 무지한 죄인이 하나님의 인격 운운하는 게 가당치도 않은 일지만 오해가 되는 부분을 좀 풀고 가자는 것입니다.

본문을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곤경에 처한 여인의 믿음을 떠보고 계속 시험하시다 그 믿음을 인정하시고 딸을 고쳐주신 내용으로 보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던가 또 끈질기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 이렇게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신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갖고 오늘 말씀을 상고할 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음으로 깊이 깨닫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또 우리 삶에 잘 적용시켜 인생의 무거운 숙제를 잘 풀어가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먼저 절박한 위기 앞에서 예수님 앞에 나온 가나안 여인의 형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여인에게는 목숨과 같은 딸이 있었습니다.

22절에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딸의 고통이 바로 자신의 고통이라는 것이죠.

김선성도님이 미국에 있는 딸이 지난 주 연주회를 하는 데 너무 떨린다고 하시더군요.

미국과 여기가 거리가 얼맙니까?

자식의 고충은 부모에게 시간과 거리도 초월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어려운 환우를 위한 모금프로그램에 선청성 난치병으로 중환자실에서 힘겨운 치료를 받고 있는 7개월된 0하엘이란 아기와 부모의 사연을 보았습니다.

몸 전체래야 겨우 팔뚝만한 여자아기가 코에 호스를 끼고 곧 숨이 멎을 듯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참 가련했습니다.

젊은 목사 부부가 7년 만에 얻은 아이였습니다.

중환자실이 하루에 30분씩 두 번 면회가 되잖습니까?

그 두 번의 면회를 위해 집에도 안가고 병원 복도에서 날을 새더군요.

하엘이가 여기 있는 데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사실 태어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기인 데, 키운 정이야 얼마 되겠어요부모의 저 헌신적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부모가 손으로 아기를 만지며 축복찬송을 부르는 데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아기가 방긋이 웃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부모의 얼굴에 비치는 행복감은 세상에 부러울 것 없다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 일곱달 된 자식이 뭐길래 두 젊은 부부가 인생을 다 던지더군요.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이 그런 것이잖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을 던지셨잖아요.

오늘 가나안여인이 딸을 사랑한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나 잘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랑하는 딸에게 귀신이 붙은 것입니다.

귀신이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지배하면 정말 처참 합니다.

성경에도 귀신이 마음대로 사람의 육신을 불에도 던지고 물에도 던진 사례가 나옵니다.

사랑스럽던 딸의 인격에 다른 흉측한 영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내기 위해 무슨 일인들 안해 봤겠습니까?

용하다는 신당마다 찾아가 빌고 굿도 하고 의원도 찾아가고 다 해보았겠죠.

그런데 딸을 구해낼 순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에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주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칠흙 같은 절망 중에 한 줄기 빛처럼 소망이 여인에게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정말 흑암 같은 인생에 빛을 발견한 것 아닙니까?

이 이방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신빙성이 있는지 나름대로 조사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2절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예수님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여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야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여인이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순회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을 어디서 만날 방법은 없었습니다.

무작정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 이웃나라까지 찾아가 떠돌 수도 없는 일이죠.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여인이 사는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시돈까지 50킬로 정도의 거리입니다.

결코 가깝지 않은 이 먼 길을 예수님이 걸어서 이 곳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물론 염두에 이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뜻밖의 방문에 여인이 얼마나 뛸듯이 기뻤겠습니까?

그리고 딸을 살릴 유일한 예수님을 죽기 살기로 붙들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여인이 엄청난 수모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참 자존심이 상하죠.

어렵게 입을 떼었는 데 거절당해보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얼른 숨어버리고 싶은 참담한 마음이죠.

예수님의 맨 처음 반응은 23절에 나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듯, 거들떠도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울부짖는 여인이 어찌나 성가셨는지 제자들이 어떻게 좀 해서 보내시라고 채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여전히 냉냉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제자들을 뚫고 예수님 앞에 까지 나와 연신 절을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애절하게 구합니다.

예수님의 냉혹한 말씀이 여인에게 떨어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쯤 되면 언니나 이모 같으면 젠장,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어머니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은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더욱 자신을 낮추며 매달립니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예수님, 좀 너무하시네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좀 심하신 것 같습니까?

그러면 이제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반전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내용은 한 여인의 기도를 들어주신 개인적인 사건을 다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복음이 이방나라에 전파될 것이라는 구원의 큰 섭리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택받은 민족이지만 거부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극소수만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죠.

21절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가셨냐가 중요 포인트입니다.

유대 땅에서 나오셔서 이방나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그냥 한 인간의 행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걸음이십니다.

이번에 부산에서 열린 WCC총회 개막식에 박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개최국의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력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이 대회를 반대하는 보수기독교측과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통령의 행보에 사람들이 얼마나 의미를 갖다 부칩니까?

어느 행사에 참석하고 어느 재래시장에 가서 송편을 먹고 과일을 샀다 이런 것이 다 뉴스에 보도되죠.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셨다면 그 걸음이 얼마나 큰 뜻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유대땅을 나오신 것은 앞 장에서 바리새인들과 격론을 벌인 다음입니다.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먹기 전에 항상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물건에 접촉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세부적으로 만든 규례입니다.

언제 부정한 물건에 손을 댔을지 모르니 무조건 씻고 보는 것입니다.

옷은 매번 세탁할 수 없으니 옷 위에 그냥 물을 뿌리는 방식을 정해서 지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부정 탔다고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죠.

모세의 이 정결의식을 지키지 않으면 무조건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것을 이렇게 깨끗이 씻는 것으로 대치한 게 유대인의 규례들입니다.

이 관습을 지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아 예수님을 비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삼년 반의 사역을 통해 오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셨습니다.

사복음서의 그 많은 기적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삶을 회개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야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냥 지금처럼 종교식으로 믿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죠.

이 논쟁 뒤에 결국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최후의 평결을 내리십니다.

7절에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외국나라인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이 행보의 의미는 정확합니다.

구원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나라 외국으로 전해진다는 정확한 암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방나라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신 이유를 당시에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약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다만 2천년전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떤 뿌리에서 나와 어떻게 우리가 믿게 되었는 지 내 믿음의 역사성을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 같은 믿음은 언제고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먼 나라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예수님께서 이방에 구원을 주실 것을 예표하는 사건이라면 왜 즉각 여인의 간청에 응답하지 않은 것일까요?

여인에게 보인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인의 믿음을 떠보려고 그러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절박하고 간절한 사람들의 문제에 똑같이 아픔을 느끼며 즉각 응답해 주셨습니다.

괜히 시간을 끌고 떠보고 그런 것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가 나오면 무조건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같은 반응을 보이신 적은 한번도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여인의 믿음을 떠본 것도 아니고 인종차별을 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방인 죄인들과의 단절 된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죄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계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여인은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메시야를 통한 구원은 이스라엘백성과만 맺으신 언약입니다.

여기서 마태사도가 예수님의 침묵의 의중을 깨닫고 이 여인을 가나안사람이라고 굳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 추악한 범죄로 심판을 당한 이 지역의원주민입니다.

가나안민족인 두로와 시돈에 대해 요엘서3장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가나안사람이 본래 천국의 유업과 하나님의 축복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연히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미 타고난 죄성대로 자발적으로 범죄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은혜를 거부한 존재들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지금도 나가서 하나님의 복을 전하면 거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약속했던 유일한 민족은 이스라엘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인간들 중에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죄인으로는 지키기 고달픈 율법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버겁게 살았던 민족입니다.

실패했을 때 혹독한 시련과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반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다 이스라엘에 역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지금 배우고 믿는 것이잖습니까?

메시야의 구원을 직접 약속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들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함께 한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고 그 다음 모든 나라가 구원받는 것이 예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모든 민족에 대한 구원계획은 물론 창세기부터 부분적으로 계시되어 왔지만 가장 직접적인 약속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주어집니다.

마가복음16장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모든 인류가 이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완벽하게 보장 된 약속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은 이방나라와 죄인들이 구원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는 본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죄인들입니다.

결국 이 가나안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장차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예수님의 보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방의 구원을 위한 상징적인 자리에서도 왜 여전히 이스라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걸까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다.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들에게 던질 수 없다.

분명히 방금도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부하는 것을 당하고도 왜 주님이 계속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약속을 받은 본 자손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스스로 파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아픔, 너무나 그 영혼들이 아까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혈통으로 나셨고 동족이기 때문에 느끼는 아픔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낳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기 위해 이천 년 이상을 돌보시고 인도하신 아버지의 아픔인 것입니다.

홍해의 기적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시고, 광야에서 40년을 동거하시고, 가나안의 대적들을 위해 싸워주셨던 그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습니까?

부모라면 한 자식이 잘 되도 기우는 다른 자식 때문에 속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에이, 하고 이방나라로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고 이루시기 위해 단지 이스라엘을 이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들을 사랑하셨고 구원받기를 끝까지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 때 우셨다는 그 단어는 죽은 사람을 향한 애곡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정말 애곡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함없이 신실하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인격이 너무 좋고 안심이 되지 않으십니까?

인간은 사람을 대할 때 항상 이용해먹을 생각이 앞서는 죄인입니다.

나를 위해 어떤 이용가치가 있을까가 사람을 대할 때 엄청난 속도로 인간의 머리 속에서 계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가치로 따지지 않으십니다.

내가 무슨 능력이 좀 있고 교회를 위해 이용가치가 있어서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천국을 기업으로 주시고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좀 실수하고 부족하고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별 것 없어도 우리 삶을 여전히 돌봐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진실하신 예수님의 인격이 지금 우리를 대하실 때도 동일하시다는 것을 믿으시고 안심하고 주님을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자녀의 떡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딸을 귀신에게서 구원해달라는 말에 뜬금없이 떡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이 곧 떡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셨죠?

요한복음6장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구원을 위한 생명의 떡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런데 왜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이 생명의 떡을 주시고 이방인에게는 줄 수 없다고 하시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방에도 떡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지금의 입장에 좀 안맞는 말씀 아닌가요?

이 의미는 본문과 똑같은 사건이 기록된 마가복음에서 정확한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 말씀 앞에 주님의 말씀을 한 절 더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그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나시죠?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왕 구원하실 건데 굳이 ‘개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표현이 마음에 좀 걸리시죠?

가만히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당사자는 별로 이 말씀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처럼 느껴집니다.

당사자가 괜찮다는 거예요.

사실 제삼자가 뭐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여인이 딸을 살리기 위해 수모를 꾹 참고 이 모욕을 견뎠다 이렇게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그런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고 말씀하셨을 때 이 여자는 너무나 기쁘게 그 말씀에 오히려 희망을 찾아냅니다.

여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내가 주인 집 개라고 인정하신다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도 부스러기 은혜는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으로서 주님의 은총과 혜택을 받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족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뭐 개면 어떻습니까?

우린 이 말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할머니들이 손주 안고 입을 쪽쪽 맞추시며 ,내 강아지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죄가 어느 상태인지 모르는 사람은 좀 기분이 상할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을 양으로 표현하나 이방인을 개로 표현하나 무슨 차이입니까?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라는 단어는 ‘집에서 키우는 개’의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개를 말할 때는 쓰는 단어랑 다릅니다.

여인이 그래서 얼른 자기를 주인의 상에서 얻어먹는 그 집 개니 당연히 먹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강아지를 키워보신 분들은 그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정말 밥 먹을 때면 식탁 밑에 와서 어찌나 껄떡거리는 지 그런데 그게 절대 무시가 되지 않습니다.

고기 한 점이라도 억지로 남겨서 꼭 던져주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위중한 상태라 가족들이 병원에 모여 걱정들을 하고 있는 데 뜬금없이 어머니께서 아이구 오늘 밤 백구 저녁밥 누가 주냐며 걱정을 태산같이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백구 저녁밥 걱정할 땐지 자식들이 의아했던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 밥 먹이는 것은 주인 책임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방의 구원도 결국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여인을 인격을 비하하는 의미로 개 취급했다고 절대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본 사건을 놓고 성경 앞 뒤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건이 나옵니다.

앞에는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는 칠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시라는 상징을 뜻하십니다.

그런데 두 사건 뒤에 보면 그들이 먹고 부스러기가 남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양을 딱 못 맞춰서 부스러기가 남았겠습니까?

이 부스러기는 이방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 은혜, 복음의 부스러기 떡으로 지금 우리가 이 풍성한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이런 내 죄를 다 가려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감격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지 않고 주인 상의 부스러기 은혜를 달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감탄사를 붙이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여인의 대답을 기뻐하셨을까요?

여인이 창조주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이스라엘만 구원할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광대하신 창조주께서 쩨쩨하게 이스라엘만 구원하시겠냐는 여인의 신기한 믿음에 놀라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믿는 자는 책임지실 것이라는 당당한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구원의 진리를 기가 막히게 꿰뚫은 여인의 지혜와 믿음에 유대인의 배신에 대한 시름을 잠시 잊고 예수님이 정말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가나안여인의 절박하고 숨막히는 현실이 때때로 우리 삶에도 찾아옵니다.

모든 문제의 가장 완전한 해결의 길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가장 좋은 결말은 그래도 우리가 우물우물 기도하며 아버지 앞에서 눈물 흘리며 도움을 구했을 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 직업과 결혼이 제일 절실한 문제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길 오늘 가나안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이 가정을 이끌고 내 인생을 살아갈지 고민하는 부모들, 자녀의 문제가 늘 손톱 밑의 가시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부모님들도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에 맡기시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2013년11월10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