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열 처녀 비유 (마태복음25장1절-13절)

남수연 2013. 6. 18. 11:23

 

지난 한 주간 제가 선교대학원에서 미얀마로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미얀마는 불교가 국교인 나라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정말 딱 맞는 나라입니다.

생활은 아마 우리 1960년대 정도의 문화수준인 것 같습니다.

상상을 초월하게 모든 게 궁색하고 가난합니다.

삶이 이렇게 구차하고 조악한 게 참 마음이 안쓰러웠습니다.

저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 데 영의 아버지와 인생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니 만사가 불통인 것이죠.

충격적인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버는 돈의 40%를 불교사원에 바친다는 것입니다.

다음 생애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나길 바라며 돈만 생기면 금박을 사서 사원의 불상에도 붙이는 게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불상은 얼굴만 사람모양이지 몸은 금박으로 뒤덮여 완전 눈사람처럼 부풀어 있는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인 양곤에 있는 쉐라곤 파고다란 거대한 탑은 전체가 순금으로 덮여있는 데 거기에 사용한 금을 값으로 대강 따져도 3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안에 있는 불상은 금과 사파이어, 루비, 각종 보석으로 치장해 호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게 다 가난한 국민들이 갖다 바친 것입니다.

크고 작은 불탑들이 벌판을 가득 메운 바간이란 곳은 정말 희한한 곳입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불탑이 평원에 가득 차 있습니다.

다 사람들이 돈을 모아 쌓은 탑이라고 합니다.

좀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내려다 보니 그 많은 불탑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게 참 장관이더군요.

신과 영원 대한 인간의 염원이 참 간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탑들이 하늘의 하나님이 아닌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마귀를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니 정말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묵직한 영적인 어둠이 덮여있는  그 위에 하나님의 장엄함과 영광이 또 온 천하에 충만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의 주인이십니다.

여행 내내 사람을 속박하고 한 조각 평범한 행복도 누리지 못하게 짓누르는 마귀의 세력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뺏어가는 사악한 존재요 원수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대나무로 얽어 만든 쓰러져가는 집 대신 그 좋은 벽돌 좀 가져다 자기 집들이나 좀 짓고 살지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십여명 남짓한 선교사들이 우상과 가난과 무지에 갇힌 철옹성을 향해 힘겨운 영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미얀마의 현실정입니다.

우리교회가 잘 성장해서 이런 곳에 선교사도 파송하게 되길 기도했습니다.

다들 대한민국에 태어난 데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달나달한 셔츠를 입고 다니는 빈곤에 쩔어있는 저들의 삶을 볼 때 우리가 가진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어제 정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 편안한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또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여행이 그렇잖습니까?

돌아올 때 아쉬움도 있지만 내 집에 돌아가 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안정되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을 다 살고 눈을 감았을 때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인생을 마치고 육체의 장막을 벗어났을 때 갈 곳이 없고 갈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불안함이 어떻겠습니까?

정탐여행 내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아름다운 천국이 실제 우리 것이 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언제가 세상의 끝이냐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된 세상의 종말과 재림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지막 그 날엔 예수님께서 하늘의 권능으로 다시 오시고 모든 성도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날은 어떤 이에겐 가장 두려운 날이 될 것을 열 처녀의 이야기를 통해 경계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쉬운 비유로 재림을 설명하기 위해 혼인잔치의 인물들을 등장시키십니다.

그런데 그동안 들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비유는 독특하게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일상을 술술 풀어놓으시는 것 같은 데 중간 중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요소가 들어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것을 발견하셨습니까?

분명히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는 데 다섯은 들어가고 다섯은 못 들어갑니다.

열처녀들의 구원을 결정지은 기름은 과연 무엇일까?

왜 신랑은 그렇게 가혹하게 미련한 다섯 처녀를 거절했을까?

이런 몇 가지 의문점을 갖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처녀 비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예비하신 은혜를 부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먼저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이 인류의 역사에 피할 수 없는 종지부가 있습니다.

작은 별 지구에서의 모든 삶은 종료되고 영생과 영벌의 삶이 이후로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치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사건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해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재림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시대의 징조와 상황들을 말씀하며 거듭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셔서 지구의 역사를 종결짓고 영원한 생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입증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모든 신비와 비밀들이 완전하고 아름답게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까지의 성경예언들은 말씀대로 다 이뤄졌지만 이 땅에 두 번째 오실 재림은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은 그 때를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완벽하게 이뤄진 것을 보아왔듯이 재림도 약속대로 분명히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의 징조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4장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입니다.

종말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는 이미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유엔에 가입한 2백여 국가 중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또 종족별로 볼 때 세계에 7천개 가까운 종족에게 2025년까지 자신의 말로 번역 된 성경이 보급될 것이라고 위크리프성경번역선교회는 추정합니다.

시대적으로 점차 드러나는 징조들을 떠나 주님이 재림하실 가장 핵심적인 조건인 복음의 확산이 거의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곧 오십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맞이하는 그 날은 상상하지 못했던 경축의 날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날을 고대하고 깨어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의 모든 수고를 거두고 안식할 영원한 행복을 위해 기다리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열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다 졸며 잠이 들었지만 신랑은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걸음은 확고하게 한 걸음씩 우리를 향해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역사가 종결되는 그 날, 예수님은 주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사모하는 신부들을 데리러 오십니다.

마태복음24장31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날에 우리는 나를 위해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못박히신 그 빛나는 상처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함 없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만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가장 간절히 고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일 수도 있겠지요.

자식들의 성공일 수도 있고 건강과 부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우리가 더 간절히 기대하고 꿈꾸고 기뻐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모든 수고가 끝나고 주님의 손에 이끌려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날입니다.

이 소망을 잊지 않는 모두에게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간절히 주의 날을 사모하고 기쁨으로 고대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면류관을 반드시 주실 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신랑을 맞이 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열처녀가 혼인잔치를 위해 신랑을 맞으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의 결혼풍습과 좀 다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혼인잔치가 초저녁에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싱가폴에 있을 때도 더운 나라다 보니 거기 사람들은 결혼식을 주로 저녁에 시작해 한 밤중까지 계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결혼식을 위해 밤에 멀리서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열 처녀들이 미리 등불을 들고 맞으러 나간 것이죠.

상황을 보면 신부의 들러리들로 보이지만 들러리란 말은 없습니다.

신랑은 분명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고 신부는 주님의 교회 전체입니다.

10명의 처녀들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다리다 늦어지는 신랑행렬로 인해 모두가 잠이들었다는 비유는 주님의 재림이 제자들의 생각보다 늦어질 거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시 성도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늦어져 깊이 잠에 빠질 때까지 늦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이미 그때도 사람들이 재림이 더딘 것을 보고 주님의 강림을 조롱하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대보다 재림이 늦어지자 아예 재림에 대한 진리조차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죠.

주님은 왜 이렇게 재림의 시기를 늦추고 계신 것일까요?

성경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베드로후서3자9절에 기록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회개하고 구원얻을 때 까지 기다리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언제입니까?

주님이 승천하신 뒤 한 천9백년이 지나서야 우리나라에 겨우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반면 오래 기다리다보니 곤히 잠에 빠진 열처녀들 처럼 성도들은 재림을 기대하지도 않은 채 영적 잠에 빠져 있는 것이죠.

신랑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는 점점 커지는 데 마지막 때 교회들은 잠들어 있을 거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내포된 말씀입니다.

악한 영은 짙은 어둠으로 성도들을 잠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라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랑을 맞이해야 구원을 받는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끔찍한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 다섯 처녀는 구원을 받고 다섯 처녀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도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아예 믿지 않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다같이 외형적으로 교회의 구성원이었고 주님의 재림을 믿었는 데 운명은 전혀 달랐습니다.

여기서 보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냐 안했냐로 구원이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름이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흔히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처럼 기름은 성령이고 성령을 받지 않은 성도는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것을 말씀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머지 다섯처녀도 기름을 사왔거든요.

여기서 처녀들이 예비해야 했던 기름은 성령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위한 성도들의 철저히 준비된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아버지의 영역이지만 인간들 편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충분히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했냐 안했냐에 대한 설교라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다른 것이냐?우리의 신앙적인 노력이 있어야 구원을 받느냐라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맞습니다.

성도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행위들이 분명히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 성경에는 무수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는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 다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은 불변합니다.

다만 참된 믿음은 반드시 진실하고 헌신적인 신앙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떠벌이지 못하도록 행위로 드러나야 구원받을 믿음이라는 것을 주님은 항상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구원받을만한 진실 된 것인지 스스로 확인하고 각성하고 구원받을 믿음을 갖도록 주님이 미리 우리에게 경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다섯 처녀와 같은 낭패를 당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미련한 다섯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왜 신랑은 나중에 기름을 사온 처녀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까요?

구원과 관련 된 말씀이니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혼인예식에 신랑이 늦게 왔다고 이야기를 설정하셨다는 것을 단서로 해야 합니다.

오늘 날로 말하자면 결혼식장에 신랑이 한 다섯시간 쯤 늦게 나타났다는 설정이죠.

요즘 문화에서 본문과 똑같은 비유를 말씀했다면 공감이 가겠습니까?

아마 비유의 묘미도 공감도도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기 때문이죠.

그때까지 기다릴 신부도 하객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당시에는 교통사정이란 것이 오늘 같이 정한 시각에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전화도 없고 저쪽 사정이 어째서 늦게 출발하는 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 종종 신랑이 늦게 당도했었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고 이 비유도 수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신랑이 늦게 올 수 있다는 것을 예측했었기에 지혜로운 다섯처녀는 넉넉하게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열명 중 반이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달랑 등에 담겨있는 기름만 믿고 나선 다섯처녀를 주님은 미련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등불을 밝힐 목적이라면 등뿐 아니라 기름 역시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자동차로 움직일 때 거리를 가늠하고 미리 기름을 넣는 것은 당연한 지혜입니다.

그걸 못 맞춰서 자동차가 길에서 서 버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경고등이 들어온 차를 몰고 간신히 올림픽공원 앞 주유소까지 온 적이 있습니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주유기 바로 앞에서 시동이 푸드득거리며 꺼질 뻔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입구가 약간 경사져 있었는데 간당거리던 기름이 뒤로 쏠리며 그나마 기름공급이 안되었던 것이죠.

정말 식은 땀 났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는 어두운 길을 밝혀야 될 자신의 책임에 부주의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흘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그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준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이 드러나죠.

김동0목사님에게 미국에 사는 손주들이 있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일 년에 몇 번 손주들을 보러 가신다고 합니다.

손주들이 얼마나 보고 싶고 사랑스러운지 사모님이 미국가서 손주들 만나기 위한 준비는 대단하다고 하죠.

좀 과장되게 말하면 사모님의 일년은 미국에 있는 손주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날과 미국가서 손주만나는 날 단 두 종류 뿐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얼마나 상대를 위해 준비하게 하는 지 다 공감하실 것입니다.

결혼에 낭비가 왜 나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고의 것으로 준비하고 싶어서죠.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혼인잔치와 신랑에 대한 진실과 간절함이 있었을까요?

어느 정도의 시간, 보통의 환경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지혜로운 처녀들과 똑같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달라지자 부실했던 본심이 드러나고 맙니다.

마치 주님은 그 본심이 드러날 때 까지 지체하다 오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평범한 날 속에서 하나님아버지를 다 믿고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시련이 오고 의뢰할 것이 다 끊어지면 그동안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드러납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바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마음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신랑이 오는 길을 밝혀서 혼인잔치에 함께 입장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으로 아낌없이 기름을 샀습니다.

본문을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 살 돈을 수중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자기 것을 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혹시 모르는 불확실한 신앙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성도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내 혼인잔치처럼 알고 준비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혼인잔치에 들러리서면 안됩니다.

나머지 미련한 다섯처녀는 그야말로 자신들이 들러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자신의 구원의 날을 준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들러리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만일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래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구원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구원에 대해 좀 생각해봐야 하시겠습니까?

말세에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이것을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진짜 구원에 대한 믿음이 있는지 가려져 있습니다.

공산정권이나 일제 식민정치 때, 지금 이슬람국가 안에서 우리가 그런 결정의 기로에 있을 때 과연 어느 편을 선택하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 우리가 어떻게 할지 아무도 자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렇게 모든 것을 내 놓고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을 평소 마음에 거듭 확인하고 단도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괜찮을 때도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 어떻게 할 것이냐를 평소에 생각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천국비유에서 천국은 값진 진주를 만난 사람과 같아서 진주를 발견한 순간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확고한 자기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세상을 다 팔아서라도 꼭 살만한 가치가 아닙니까?

미련한 다섯처녀는 덩달아 신랑을 기다리는 자리에 나가있지만 자신이 잔치의 주인 되는 주인의식 없이 그야말로 들러리 선 성도들입니다.

왜 신랑은 그토록 가혹하게 미련한 처녀들을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본심이 뒤늦게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은 위급할 때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지 않은 다섯처녀는 할 수없이 기름을 사왔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드릴 수 있을 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결론에서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의 강조점은 재림을 대비하고 준비하라는 것인 데 결론은 왜 깨어있으라입니까?

준비하는 신앙과 깨어있는 것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고 하루 하루 헌신하는 성도들의 행동이 바로 깨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밖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씀이죠.

내 믿음이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다섯 처녀인지를 알 수있는 것은 지금 내게 있는 것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깨어있고 준비하는 삶이 신앙적으로 불가능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비유 속 처녀들이 그랬듯이 자기가 가진 것으로 기름을 사면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사용한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깨어 있어 준비하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죠.

마태복음21장34절에서 또 말씀하셨잖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눈치껏 믿음의 정도를 내가 조절하며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때 예수님이 오실지도, 내 생의 종말을 맞이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믿음이 주님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믿음인지를 하루 하루 점검하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영적인 어둠이 짙게 깔린 이 마지막 때 혼곤한 졸음에 빠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경계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24장40절에서 주님은 그날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지금 우리는 지혜롭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두손과 발이 못에 박히시며 하나님을 반역한 내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예수님과 주님의 나라가 올 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과 헌신을 행복하게 드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계십니다.

마침내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빛나고 영광스런 형상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신부 된 존귀를 입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대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있을 영광을 날마다 사모하고 이 땅에서 잠시 받는 고난을 이기시고 헛된 부귀와 장수와 명예와 성공으로 인해 마음을 뺏기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에게 있을 이 기쁨의 혼인잔치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털끝만한 위선도 감추지 못하고 다 드러날 가혹한 날이 될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통탄하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준비 된 성도들을 데려가십니다.

그러나 지구역사에는 종말의 고통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2013년6월16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