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산상수훈 (마태복음7장12절-14절)

남수연 2013. 2. 18. 23:03

마태복음5장부터 7장까지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할 확고한 덕목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의 설교 주제로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 편이죠.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는 내용들이 아니어서 그럴 것입니다.

오늘 주제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을 따라 살라거나 네 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리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 이런 말씀을 누가 듣기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한 신학자는 이 산상수훈을 일컬어 ‘하나님나라의 왕이 주시는 왕의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이 산상수훈의 교훈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도들의 행동강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일 뿐 아니라 이것을 지킬 때 올바른 영적성장이 있고 우리를 넘어 뜨리려는 마귀의 세력에서 안전합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얼마나 따르는 무리들을 측은히 여기셨고 또 사랑하셨습니까?

길지 않은 공생애 사역 중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 가장 긴요하고 핵심 된 말씀을 들려주셨겠지요.

이 말씀이 곧 내게도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고 축복의 말씀임을 믿고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 번 째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입니다.

5장부터 시작 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주님께서 본문에 이르러 ‘그러므로’라며 결론을 이끌어 내시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주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가 이미 많이 들었던 말씀이고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남에게 대접을 잘 받기위해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뒤에 보니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이 단지 우리가 세상에서 잘 대접받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라 할 리가 없죠.

세상 사람들도 이 정도의 처세술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세상적인 처세술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지키면 분명히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미 남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의 내면의 동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대개는 자기가 칭찬받고 대접받으려는 생각이 깔려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착한 행동의 내면엔 남들의 평판과 인정과 칭찬이 은연중에 계산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이런 계산을 갖고 사람을 대하면 분명 낭패를 당합니다.

속으로 그렇지 않으며 겉으로 베푸는 친절과 미소에 점점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인격이 되기가 쉽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될 만한 상대인지 아닌지에 차별을 두고 대하게 되고 결국 그 본심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기회주의자라고 욕하지 않습니까?

또 심지가 약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적인 대접을 받으려하다 보니 잘못하면 사람의 종이 되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말투와 행동 하나 하나까지 너무 신경쓰게 되고 점점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경우 본인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나중엔 사람들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남에게 대접받을 것을 계산해서 처세한 결과가 고작해야 이런 데 예수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삶의 황금률을 가르치셨는데 그걸 지키려면 그 의미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지켜야 할지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함께 보아야 의미가 확실해 집니다.

마태복음22장37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도 주님이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요약한 계명을 말씀하시죠?

그런데 그 내용이 여기선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의 핵심이 두 곳에서 내용이 다르죠.

하나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남을 대접하는 것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하고는 같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내면의 동기가 되는 것이고 밖으로는 남을 대접하게 된다는 뜻이죠.

네가 잘 대접받으려면 남을 잘 대접해야 하는 데 그 바탕에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대접받으려는 동기로 남에게 잘해주는 것과 확연히 다릅니다.

또 대접해야 할 대상에는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도 포함이 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하나님께도 대접을 잘 받으려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라.사람들에게 대접을 잘 받으려면 겉치레가 아닌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런 진정성을 갖고 사람들을 대해라.

한마디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진심어린 사랑의 관계 회복이 모든 율법과 계명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황금률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인생과 얼마나 다릅니까?

주님이 제시하는 참된 행복과 성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과 세상의 권력과 명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물질보다 관계에 더 많이 좌우됩니다.

기본적인 물질의 욕구가 채워지면 정신적인 욕구, 특히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을 맛볼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가계가 파산해도 가족이 사랑의 관계로 똘똘 뭉쳐있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깨진 가족은 돈으로 절대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서 잠언 17장1절은 말씀하죠.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과 사람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산다면 여기도 천국입니다.

마치 내 자신을 대접하듯 서로를 대접하면 아무리 고달픈 여건 속에 산다 해도 분명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말씀으로 산상수훈을 마무리하시는 것은 인간을 비참하게 한 죄의 기원이 관계의 깨어짐에서 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죄의 결과로 깨진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분리 된 인간은 고충 속에 각박하게 살며 서로 할퀴고 상처를 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귀 될 율법을 주셨지만 정작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없는 껍데기뿐인 신앙으로 무슨 하늘의 축복과 위로를 그들이 맛보겠습니까?

우리가 안정되고 복스럽게 이 세상을 살다 가기 위해서 주님의 황금률이 절실한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황금률을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접받길 원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런 대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먼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멀리 대하신다면 정말 우리에겐 재앙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7절에서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데 왜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시고 내게는 관심도 없으시냐고 불만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렴 하나님이 우리 형편과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인색해서 은혜와 복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의 바로 앞 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좋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구하는 자에게 왜 굳이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겠냐고 하시죠?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하는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씀이 나온 것이죠.

하나님께 어떤 대접을 받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대로 사랑하시지만 줏대 없이 손주에게 끌려 다니는 할아버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존귀의 면류관만 있는 게 아니라 고생의 떡과 인생막대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배울 때까지 우리를 상과 벌로 근실하게 지도하실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대접으로 섬기지 않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냉랭한 모습을 볼 때 마음이 답답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면 하나님이 어떤 대접을 받으셔야 할 영광스런 분인지 알 수 있을텐 데, 조금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신 그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을텐 데.

그걸 안다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더 좋은 것으로 대접 받을 수 있을텐 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황금률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합당히 대접해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함께 행복하게 되는 길임을 깨닫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소유하고 통치하는 광대한 지배자이시지만 지극히 미약한 우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찌 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세요.

그리고 공경하며 감사로 예배하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도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를 대우하실 줄 믿습니다.

또 가족과 이웃에 대해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대접하길 원하는 마음처럼 우리도 그들을 대접해야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사랑으로 공경하며 대접해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부모님들의 고단한 손과 발에 새 힘이 나고 더 열심히 벌어서 학비도 대주고 용돈도 더 많이 주시는 겁니다.

부모님들도 자녀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자녀들을 진지하게 양육하고 잘 대해줘야 합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대접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부부들도 마찬가지겠죠.

연애시절엔 자동차가 지나가면 드라마에 나오는 연인이나 된 듯이 재빨리 안쪽으로 자리를 바꿔주던 남자들이 결혼하고 보면 이 사람이 그 때 그 사람이 맞나 싶지 않습니까?

아내들도 마찬가지라고 남편들은 말하겠죠.

세월이 가다보면 내 고통이 앞서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사랑을 잊어버리고 대접만 기다리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오늘 하나님과 나, 가족과 나, 직장동료들과 나와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 복되게 할 주님의 황금률을 주셨습니다.

말씀대로 지킬 때 처음엔 손해를 보는 것도 같고 나 혼자 이래서 되겠나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사회생활 손해만 본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착하게 양보하는 사람을 세상이 우습게보고 이용해먹는다고 생각하시죠?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가정과 이웃에서 말씀대로 했는 데 무시당했던 경험이 있으시죠?

그러나 우리의 본심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다면 결국 상대도 변화됩니다.

하나님 편에 굳게 선 사람은 세상과 다른 강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겸손하게 잘해줘도 사람들이 점점 다르게 보고 절대 무시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의지를 막 강하게 단련한다고 강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가 강해집니다.

간혹 아무리 잘해줘도 진심이 통하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도 있죠.

그렇다면 그에게 받지 못한 대접은 하나님께서 해주십니다.

우리는 사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계산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19장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경로와 다른 사람과 환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은 꼭 해주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인내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 행동에 반드시 복된 열매가 있습니다.

가정은 살아나고 직장에선 누구나가 그 사람을 찾는 인정받고 사랑받는 행복한 생활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축복을 누리고 화평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길도 열리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황금률을 따를 때 우리도 복되고 가족과 이웃도 우리로 인해 행복해집니다.

순종하려 해도 마음이 따르지 않고 사랑이 부족한 걸 매일 느끼죠.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시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려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이 계명을 힘써 지켜서 화목하고 웃음이 넘치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다음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명령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입니다.

산상수훈의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마지막 포문을 여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이 무슨 말을 듣든 지 결국 생명의 길이 아닌 편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이죠.

그냥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세상속의 일원이 되어 세상의 풍습과 가치관을 좆으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편합니까?

우리 죄의 본성과 세상은 꼭 맞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사회구조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잘 맞죠.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이 권세 있는 주님의 말씀에 놀라지만 그 머리 속으로 들은 말씀을 판단하며 지켜서 얻을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실 5장부터 시작 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그 날 처럼 설교하신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아야 복이 있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불렀다간 천국 법정에 끌려갈 것이고 재물을 좋아하지 말라는 말씀들을 누가 편하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는 들었지만 벌써 편한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생명을 얻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강권하십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그들을 억지로라도 밀어 넣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본문을 읽으면 두 부류의 무리들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한 쪽은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협착한 길을 따라 깨끗한 몸가짐과 좁은 길에서 벗어날새라 앞을 살피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다른 한쪽은 넓은 길에 우굴 우굴 몰려서 방종한 자세로 걸어가는 많은 군중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동일한 점은 그들은 모두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떤 종착역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그 끝은 이 땅에서는 죽음이라 하고 영적으로는 그들이 장차 영원히 살아 갈 삶을 판결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대 앞입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슬픔당한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이 땅에서 떠난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정말 좋은 곳으로 갔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선택한 문과 선택한 길에 따라 남은 영원한 삶이 결정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을 선택할 것이냐 넓은 문을 선택할 것이냐.

좁은 문은 너무 비좁아 들어가기도 불편하고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던 모든 짐을 끌고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어진 길은 협착해서 긴장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바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는 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입니다.

사도행전4장 12절 말씀대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 이외는 모두 넓은 문 넓은 길입니다.

사람들은 왜 꼭 예수님만 믿는 좁은 문을 통해서만 생명과 구원을 얻느냐고 반박합니다.

생명과 영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일한 합법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 앞에 갖다 놔도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이 내려와 두려움과 장관을 이룰 때 그들의 죄성이 변했습니까?

하나님 무서워서 싫으니까 모세보고 대신 대면하고 와서 이야기해달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사람 그대로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순하게 섬기며 천국백성처럼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끔찍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만 없어집니다.

물론 죄의 습관은 아직 남아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를 따르는 불멸의 죄성은 주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겨진 것입니다.

남아있는 죄의 습관조차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애가 타게 설득하고 기도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바로 이런 끈질긴 인간의 죄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사람은 아무도 하늘의 일을 알지 못하고 우리의 죽음 너머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고 죽음 너머의 삶을 우리에게 증언하신 분도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아버지 앞에 나갈 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 죄를 씻고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머리 속으로 인간들이 사색해 낸 사후세계를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일단 죽어보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 우리의 영혼을 부르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도서12장7절은 말씀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문은 예수님을 대면한 사람만 한 사람씩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종교와 무신론과 심지어 인간 자신이 구원받을 문이라고 하는 이 세상의 다양하고도 넓은 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거이 들어갑니다.

그 길에선 버릴 것도 없고 고쳐야 될 것도 없고 즐기던 쾌락 안에서 그대로 살고 타고난 본성에 너무나 잘 맞는 편한 길입니다.

아무도 나를 향해 간섭하고 고치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 이래 어느 시대이건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는 좁은 이 문을 통해 들어가려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요즘은 이 구원의 문이 오직 예수님이라고 발설했다가는 크게 낭패를 당합니다.

서구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전도했다가는 언제 고소당할지 모릅니다.

작년 영국에서 여승무원들이 십자가 목거리를 걸고 다니지 말라는 회사의 명령에 불복했다 해고당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목걸이를 건 것 자체가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WCC선교대회가 우리나라에서 10월에 열립니다.

이 단체에서도 선교 문제는 눈에 가시입니다.

다른 문화와 종교를 존중해야지 왜 기독교를 고등종교로 생각해서 그들을 전도하려고 하냐는 것입니다.

유엔도 이 선교문제에 있어서 같은 입장입니다.

다른 민족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으니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하다가 불화를 일으키고 피 흘리지도 말라는 것이죠.

구원의 방법이 또 있다면 예수님이 뭐하러 십자가에서 그 고통과 저주와 수치를 담당하고 죽으셨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를 게을리 하면 어느 순간 믿음이 다 허상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생명을 얻는 유일한 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열어 놓은 좁은 문임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 23절에서 좁은 문을 다시한번 언급하십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구원 얻을 자가 많다는 소리입니까, 적다는 소리입니까?

누가복음 12장 32에서도 말씀하시죠.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구원받은 적은 무리에 우리가 들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지요.

아마 우리가 죽음 뒤에 하나님 앞에 서고 나를 아시고 따뜻하게 맞으시는 우리 주님을 볼 때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주저앉아 우는 사람 많을 것입니다.

여기 오지 못했으면 어쩔 뻔 했냐는 생각에 아찔할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한 모든 성도님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좁은 문을 통과했으니 이젠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은 한 번 결정하는 문제이지만 이어지는 좁고 협착한 길은 하나님에 나라에 이르기 까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으로 인해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고 이전과 똑같다면 갓길로 빠졌거나 아직 좁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주일에 집에서 뒹굴며 편히 보내지 않고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준비하고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도 좁은 길입니다.

내 감정대로 해대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남을 사랑하고 대접하려고 해보세요.

정말 가시밭 길 같은 좁은 길입니다.

내가 좁은 길에 있는 게 확실하다면 우리가 과거에 좋아하던 세속적인 쾌락과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일에 뭔가 자꾸 제동이 걸려야 합니다.

몸은 똑같이 세상에 속해 세상의 옷을 입고 살아가지만 이 어지럽고 혼탁한 넓은 길 중앙에 우리가 걸어 갈 좁은 길이 보여야 합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생의 목적을 두고 남들과 똑같이 넓은 길에서 열심히 걷고 있다면 그 길은 재앙입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위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을지 목적을 둘 때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이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계획하신 모든 일이 있으시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 목적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길은 육신적으로 편안하고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길 끝에 기다리는 건 허무이고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심판의 자리입니다.

남들 다 넓은 길로 가는 데 좁은 길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꼭 이래야 되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만 고난과 고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길에도 수많은 고난이 있고 함정이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깊은 함정에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사탄의 올무에 걸려 인생이 파탄이 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인생을 경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죄와 마귀에 의해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끝은 멸망이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좁은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불편도 있지만 결국 그 안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또 주님이 동행하시는 길이고 하나님이 보살펴주시는 길입니다.

최근 대형교회목사님의 논문표절 문제가 교회안의 문제를 떠나 사회적으로 까지 확산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도야 어쨌든 그 목사님의 논문이 흔히 논문작성 과정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일부 표절의 의혹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자로 대접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학위 논문연구 과정에서 거리낌 없이 부정직한 방법을 쓰는 것이 바로 넓은 길인 셈이죠.

세상과 마귀가 구축한 방법을 따르는 것이 당장 지름길이고 편한 길인 것 같지만 길 끝에 상상도 못했던 불의의 쓴 열매가 집채만하게 맺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초절정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고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하나님의 법 안에서 행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존귀한 자녀의 대접을 받으려면 좋으신 하나님을 합당하게 경외하며 섬기십시오.

가족과 이웃에게 진심으로 대접하길 힘쓰고 사랑이 부족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끝까지 선을 행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해 구원을 향해 담대하게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좁은 길을 걷기 위해 반드시 말씀에 나를 비추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그 끝에서 영광스런 생명과 존귀의 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이 땅에서 한번도 맛본적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고 영원한 안식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