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임마누엘(마태복음1장18절-25절)

남수연 2012. 12. 26. 12:26

 

오늘 우리 교회를 방문하셔서 함께 성탄절의 기쁨을 나누시는 모든 분들과 우리 성도님들 사랑하고 또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가 인류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고 하나님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만일 내 자식을 내어 준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준 것보다 더 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는 우리가 그만큼 귀한 존재이고 아들을 주고서라도 구원해야 할 진실한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 깨닫는 은혜와 축복을 모두에게 내려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가 예수님 출생의 신비한 기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먼저 나눌 것은 18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자식이 생겼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죠.

주님의 탄생은 인간의 상식과 자연세계의 법칙으로 해석할 수 없는 더 큰 영적인 세계가 개입한 사건입니다.

영적세계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냐 인간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속죄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동정녀탄생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냥 위대한 성인이지만 인간과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십자가에서 죽어도 인류의 죄를 속죄할 자격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은 우리 믿음의 기초석과 같습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만일 기독교가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 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교리를 만들었다면 그건 정말 머리를 잘못 쓴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황당한 이야기를 지어낸다면 사람이 그걸 믿고 전도가 되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한 일이죠.

마태사도가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할 때 아무도 믿지 않을 동정녀 탄생을 맨 먼저 기록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지구 인구의 30%가 믿고 오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예배가 전 세계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 영목이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영목아, 예수님이 누구지?하고 물었더니 우리 영목이가 믿음이 참 좋습니다.

금방 하나님의 아들이요라고 정답을 말했어요.

그럼 예수님 어머니는 누구야?하고 물으니 똑똑한 영목이가 금방 마리야요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러더니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럼 마리아하고 하나님하고 부부예요?

아뿔싸, 어른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동정녀 탄생을 초등학교1학년 영목이에게 설명하느라 곤혹을 치렀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인간의 구원의 관계는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하려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은 아버지의 핏줄을 통해 유전되어 내려오죠.

아버지도 본성적으로 죄인이고 그 씨를 통해 태어나는 모든 자식들도 다 본성적으로 죄인입니다.

본성이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죠.

자식을 낳고 키워보신 부모님들은 내 자식이 죄의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자의 핏줄을 통해 태어나셨다면 죄의 유전을 갖고 죄인이기 때문에 남의 죄를 속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결혼관계 속에서 태어나면 안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심오한 기독교의 진리인 데 이해가 좀 되실 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사건의 진실성을 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인지 사기인지는 우리 나이가 되면 어지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처녀 마리아에게는 요셉이라는 정혼한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먼저 정혼을 하고 약 일 년 정도 뒤에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때만해도 결혼 전에 약혼하는 풍습이 있었는 데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이 달콤한 기다림의 기간 중에 예비신랑 요셉에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약혼자 요셉 역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마리아를 잘 알고 믿었던 요셉이기에 이 사실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아내가 어떤 사람이란 것은 누구보다 남편이 제일 잘 압니다.

마리아는 부정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친족관계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고 그 남편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가문이 경건한 믿음의 가문이었다는 것이죠.

19절에 보면 임신 사실을 안 요셉이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마리아를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20절에 보면 그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죠.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요셉이 파혼한 이유가 마리아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에 괴로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였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결국 마리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로부터 무언가 경이로운 일이 아내 마리아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무섭고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또 이렇게 말하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죄에 빠진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일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을 상기시킵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요셉은 이미 이사야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시편과 이사야서 정도는 암송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예언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입니다.

이 예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예언이고 또 하나는 이 아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백년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예언되신 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이나 마리아에게만 즉흥적으로 나타나셔서 인류의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한 게 아닙니다.

지금도 어느 날 갑자기 계시를 받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이단 종파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오래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갖고 준비해 오셨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한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시고 수 천년에 걸쳐 성경역사를 통해 수없이 예언하셨습니다.

창세기3장에서 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유혹해 범죄하게 한 사탄을 향해 하나님이 심판을 선고한 내용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인류를 미혹하고 고통을 주는 사탄을 멸하고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 탄생 5백년전에 살았던 미가선지자를 통해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잖습니까?

베들레헴(에브라다)아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언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유다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인류를 다스릴 목자가 탄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의 근본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며 이런 말씀을 대하면 전율이 느껴지고 소름이 돋을 때가 있습니다.

또 이사야서에는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가 우리 중에 나셨는 데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거예요.

그를 일컬어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평강의 왕이라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기로 오실 것을 이렇게 자세히 예언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모든 예언을 미리 구약성경을 통해 기록해 놓으신 것은 일이 이루어질 때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과 자신이 믿고 있던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해 요셉은 마리아의 몸에 잉태한 아기가 바로 오래 전부터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데려와 그의 성실한 남편으로 아기 예수님과 아내 마리아를 돌보다 조용히 성경 속에서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되찾기 위해 저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절이 삭막하고 얼어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 한 켠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것은 막연하지만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 주는 하나님이 있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달픈 인생에 기꺼이 들어오셔서 죄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풍성한 생명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32년 째 성탄절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연극이 있죠.

빈 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1980년 성탄절 무렵 신문 한 구석에 실린 월리의 성탄절이란 짤막한 실화를 토대로 만든 연극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탄생이 그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해산이 가까울 때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가 호구조사를 위해 유대인들은 다 본적지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와 요셉도 어쩔 수 없이 나사렛이란 마을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기 위해 떠납니다.

이미 작은 동네의 여관은 만원이라 빈 방이 없어 결국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된 것을 주제로 한 연극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어찌 보면 좀 성인극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어느 해인가 연출자가 매표소 앞에 서 있는 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두 남자분이 다가와 넌즈시 이 연극 정말 야합니까?’라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연출자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관 장면도 나옵니까?’ 라고 또 묻더랍니다.

, 나옵니다그랬더니 2만원이나 주고 표를 사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연극을 보며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났겠습니까?

그런데 연극이 끝나고 나오는 두 사람의 얼굴엔 눈물자국이 있었고 연출자에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고 합니다.

연극의 실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어느 교회 고등부에서 성탄극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배역을 정하던 중 연출을 맡은 교사가 지적장애가 있는 덕구에게 여관주인역을 맡깁니다.

빈방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요셉의 말에 우리 집에 빈방 없습니다 라고만 대답하면 됩니다.

모든 준비가 잘 되고 성탄전날이 돌아와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삭의 마리아로 인해 여행이 지체 된 요셉은 뒤늦게 베들레헴에 도착해 방을 구하다 마지막으로 덕구의 여관집 문을 두드립니다.

빈 방 있습니까?’

그런데 빈 방 없습니다. 한마디만 하면 될 덕구가 머뭇거립니다.

만삭의 마리아를 바라보던 덕구는 차마 빈방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당황한 마리아와 요셉은 대본대로 마굿간으로 향해 돌아섭니다.

그러자 덕구는 달려 나가 요셉과 마리아를 붙잡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마굿간으로 가지 마세요, 우리 집에 빈방이 있어요

연극은 엉망이 되고 황급히 무대의 조명이 꺼집니다.

그리고 홀로 남은 덕구의 독백이 이어집니다.

하나님 잘못했어요, 제가 연극을 망쳐 놓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거짓말을 할 수 가 없었어요. 저희 집에는 빈 방이 있어요. 예수님을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잖아요.’

2천년전 예수님은 반기는 이 없이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지만 오늘 밤은 우리 마음에 따뜻하게 모시길 원합니다.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만이 들어오실 수 있는 영혼의 방이 있습니다.

그 방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 인생은 두려움과 불안과 고통과 번민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방을 빈 방으로 남겨두지 마시길 축원드립니다.

요한계시록320절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평강의 왕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실 때 우리 삶을 주님께서 책임지고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고 영원히 함께 해 주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주님의 실존이 마리아의 몸 안에서 자라났듯이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주님은 실제적인 성령으로 우리 안에 동거하십니다.

이런 축복과 하나님의 인도를 날마다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오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다시한번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말구유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성탄의 모든 축복과 평강이 오늘 함께 하신 우리 모두와 영원히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2.12.24 성탄전야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