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복음20장20절-28절)

남수연 2012. 8. 15. 18:20

오늘 본문에 등장한 제자들의 모습이 좀 볼썽사나운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제자들 간의 서열 다툼이 종종 등장하죠.

그런데 사실 지금은 그런 싸움을 할 때가 아닙니다.

본문 바로 앞 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시죠.

그런데 누구 하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슬픔은 커녕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새 왕국에 잔뜩 들떠있는 모습들입니다.

어머니까지 대동해 권력을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은 주님을 좇았던 그들의 목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죠.

예수님의 사역이 이제 막바지에 도달한 것을 보고 슬슬 제자들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끝에 가서 결국 사람들의 속셈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3년을 함께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진심으로 사랑을 주셨던 주님의 마음이 참 많이 쓸쓸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와 무엇을 구하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매일 주님께 필요한 것들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한 눈에 봐도 제자들은 잘못 된 것을 구한 걸 알 수있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며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갈 것인지 본문을 통해 나누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깨닫는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잘못 구한 간청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권력자의 주변엔 갖가지 이기적인 목적으로 추종자들이 모여듭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각자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에 매료되어 제자의 길을 걷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장년의 남자들에게 세상적인 야망과 성공에 대한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우리도 사실 영생의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을 기대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언제까지 가난하고 언제까지 병든 대로 살고 믿어도 끝까지 달라지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믿음을 지키겠습니까?

적은 것이라도 희생하고 땀 흘렸으면 댓가를 구하는 게 인간입니다.

제자들이야 생업을 다 접고 3년 반을 예수님 뒤를 따랐으니 당연히 보상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본문 앞 19장에서 이미 베드로사도가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질 댓가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우리가 늘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 도대체 언제 제가 구하는 걸 손에 넣게 되는 건가요?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제자들은 결국 기대했던 대답을 받아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오면 너희를 열두 장관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이죠.

우리는 주님의 대답과 제자들의 이해 속에 슬프게도 큰 차이가 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로마의 압제를 벗어난 이스라엘 새 정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그들은 당연히 새 나라의 장관이 될 테고 그중에 누가 총리가 될 것인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죠.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리라고 진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오해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위해 오늘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 치맛바람까지 동원 해 적극적으로 청탁에 나섭니다.

자식 잘 되게 하려는 데 부모가 무엇인 들 마다하겠습니까?

전에 유명0장관이 자기 딸을 외교부에 특채로 넣어준 문제로 결국 2년 만에 장관직을 사퇴하고 말았죠.

코 앞에 권력을 앞 둔 사람들이 청문회에서 대부분 곤욕을 치르는 게 위장전입문제인데 다들 자식 교육 때문이었다고들 합니다.

사실 세 모자의 청탁이 너무 뻔뻔하고 당당해 보여서 의아스럽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이들이 나름 이 정도는 구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세베대가문은 당시 어업으로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입니다.신학자들은 요한이 예루살렘 대제사장 공관에 고기를 납품했기에 대제사장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실제 십자군 시대까지 예루살렘에는 세배대 물고기 상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꽤 유력한 집안으로 아들을 둘 씩이나 예수님의 제자로 드린 것이죠.

그 어머니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관계에 있었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재정적인 후원을 많이 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특별난 기적의 현장이나 사적인 장소에 베드로와 함께 야고보, 요한을 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의 영예를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한 것이죠.

문제는 그들이 구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땅의 권세를 원하고 예수님은 천국의 권세를 주시려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좀 묘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런대로 대화가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 이 땅의 권세를 달라고 하는 데 예수님은 그것이 틀렸다고 하지 않으시고 이야기를 슬슬 하늘의 권세를 주실 약속으로 몰아가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구하는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해 가시는 과정과 똑같은 패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찬물을 끼얹지 않으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리석은 기도지만 그래도 주님이 그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그걸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죠.

부모들은 아무리 무익한 물건이라도 자식이 그걸 너무 좋아하면 마구잡이로 뺏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딸이 어릴 때 공갈 젖꼭지 떼낼 때 그래서 아주 힘들었습니다.

버렸다고 해놓고도 밤에 칭얼대고 찾을까봐 한동안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욕심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설득하시며 결국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며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평생 받아온 사람들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소중한 것은 구하는 것을 아버지께 받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놀라운 영적인 깨달음과 은혜까지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늘 응답을 거절당한 게 아니라 더 완전한 것으로 응답 받은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요구했던 이 땅의 권력만을 주셨다면 그 영화는 짧은 한 평생에 끝났겠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복음을 위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셔서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의 권세가 얼마나 갑니까?

전임 국회의원으로 구성 된 헌정회 보고를 보면 한달 120만원인 연로지원금을 받고 있는 국회의원이 750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집이 없어 찜질방에서 사는 분이 18명이라고 합니다.

콘테이너 박스에서 사는 사람이 2명 사글세를 사는 사람이 180명이라고 하더군요.

노년의 인생이야 누구나 힘들지만 한때 화려했던 만큼 세상의 권력의 허무함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물거품 같은 축복보다 영원한 복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영적인 축복보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축복이 항상 더 우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세와 천국의 삶은 아직 멀었고 자식의 앞날과 좋은 직장과 건강과 행복이 항상 더 다급하기 때문이죠.

저도 하늘이 열리는 은혜를 원하냐 교회가 성도로 가득차기를 원하냐 물으시면 좀 갈등이 생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상을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천국에서의 영광만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이 땅에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을 들으니 훨씬 안심이 되시죠?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헌신한 댓가로 반드시 이 땅에서도 우리를 잘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만 그 축복이 이 땅에서 소모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삶까지 이어지길 원하시는 것이죠.

황수0박사님이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 했는 데 귀로만 듣던 말씀이 그날 그분의 영혼까지 와 닿았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예수님이란 말만 해도 눈물이 그렇게 나고 십자가만 바라봐도 그렇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재능과 권세로 이 땅의 복만 구하던 그는 영원한 나라를 위해 그의 삶을 드리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더 놀랍게 그의 삶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과 육의 복을 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 땅에서 필요한 것들에 치중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세상만 실제적으로 느껴져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록 더 실제적인 것은 자연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라는 것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천국에 다녀오더니 이 세상을 보고 이렇게 말하죠.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

이 땅이야말로 실제인 줄 알았는 데 천국의 명료함을 보니 그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꿈 속에서 얼마나 꿈이 현실적인 것 같습니까?

깨어 일어나면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는 것 같이 우리 인생이 깨어나 보면 비로서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진짜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제자들 처럼 이 땅의 필요만을 구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영원하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은혜를 함께 간구할 때 우리의 영육이 함께 복 받게 될 줄 믿으시고 그런 믿음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일로 인해 제자들이 두 형제를 왕따 시킬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24절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굉장히 흥분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도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떤 약점을 특히 잘 보고 그걸 유독 못참아 하는 것은 대개 우리 속에 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그런 마음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죠.

주님은 제자들을 모아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권세와 힘을 갖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땅에서는 권력가들이 마음대로 사람을 주관하고 부리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왜 권력과 명예를 탐냅니까?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휘둘러 보고 행세 좀 하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이 파탄에 빠지는 줄 모르고 끝없이 권력을 붙잡고 있으려다 망하는 것을 세상에서 많이 봅니다.

사담 후세인이 그랬고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그랬습니다.

얼마 전에 예술의 전당 앞 인도 위에 세워 놓은 이재0 의원과 진수0의원 차가 인터넷에 올라 눈총을 받았죠.

지하주차장에 차를 댈 생각을 안고 인도로 들이대니 경비원이 경례를 부치며 막았던 차단기를 열고 주차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기사 제목이 ‘역시 권력이 좋아’ 였습니다.

요런 작은 일에도 특권을 누리다 보니 사람들이 권력을 좇는 것 아니겠습니까?

권력을 갈망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확신에 차 예수님을 따랐지만 한편 주님을 배척하는 유대사회에서 조롱거리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기잡이 배도 내팽게치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들을 향해 혀를 찼을 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권력을 잡고 자신의 수고와 신조가 옳았던 것을 좀 보여주고 싶었겠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 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니 남들 보다 좀 잘되고 부러움을 받아야 어깨도 좀 펴지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권세를 얻으려면 이 땅에서 오히려 종이 되어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속으로 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이제 좀 권력을 누려볼까 들떠있는 데 종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라니요?

사람들 모이면 은근히 누가 더 대접받고 서열이 높은 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이 땅에선 힘 있는 사람이 남의 시중을 받지만 하나님의 법은 본래 그게 아닙니다.

좀 모자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지 장성한 사람이면 당연히 연약한 자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3장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부모가 갓난 아기의 발 아래 앉아 기저귀를 갈아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 아닙니까?

형제들이 자라면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돌보며 섬기는 모습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고 천국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사도행전20장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 주님의 명백한 가르침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고 남을 섬기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만 들고 이렇게 복이 내게 멀리만 느껴지는 것은 원하는 것을 덜 가져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대로 나를 희생하고 나를 내주지 않아서 복이 없는 것입니다.

최근엔 믿지 않는 분들도 섬김의 리더쉽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이제 사람들을 지도하고 통치할 때도 옛날처럼 권위로 누르고 호령해서는 실패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줄 믿습니다.

미국 대통령 중 재임시절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 카터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장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 중 한 명입니다.

이 분이 대통령재임 시절 중 매주 고향동네로 돌아가 주일학교 교사노릇을 했던 얘기를 다 들으셨을 겁니다.

또 사랑의 집짓기 헤비타트 사역으로 유명하죠.

언젠가 바이러스감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도 퇴원하자마자 연장을 챙겨 집짓기 현장으로 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허름한 청바지에 후드점퍼모자를 뒤집어 쓰고 비가 오는 중에도 연장을 들고 서있는 사진 한 장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점점 우리 몸으로 수고하고 힘든 일하는 게 얼마나 귀찮고 싫어집니까?

그 분이라고 늘 땡볕에 지붕에 올라가 힘들고 험한 일 하는 게 좋기만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퇴임하면 항상 큰 문제가 되고 도마에 오르는 게 노후를 보낼 자기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퇴임한 카터대통령은 자기 집을 짓는 게 아니라 남의 집을 지었고 그 집짓기는 30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비타트는 내 삶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해비타트를 통해 사랑실천에 힘써 왔는 데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절대 틀리지 않으십니다.

남을 위해 섬겼더니 그게 곧 자신의 영육을 강하게 하는 복이 되는 것이죠.

해비타트 봉사사역이 생기게 된 이유도 의미심장합니다.

이 집짓기운동은 미국의 변호사인 밀러드 풀러란 사람이 시작했습니다.

이미 20대에 큰 성공을 거둔 그에게 어느날 아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갑자기 집을 떠났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는 낡은 집 한 채를 제외하고 가진 재산을 다 자선단체에 기증하고 봉사활동에 전념한 것이 바로 해비타트운동의 시작입니다.

우리도 그만큼 많이 가져봤으면 좀 보란 듯이 자선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면 지금 먼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복을 받고 싶으면 지금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어라.

오래 전 일본의 한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에 유학 온 학생들은 나라별로 화장실을 사용했는 데 중국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이 좀 더러워 위생검사에서 늘 지적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해가 되자 놀랍게도 중국인 화장실이 제일 깨끗해졌습니다.

늦은 밤 총장이 학교를 돌아다니다 방에서 대야와 걸레와 비누를 들고 중국인 화장실로 가는 학생을 보았습니다.

자네가 밤마다 청소를 했는가?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는 데 어찌 밤마다 청소를 할 기특한 생각을 했나?

우리나라 화장실이 제일 더러워서 제가 졸업할 때 까지 청소하기로 했습니다.

총장은 수첩을 꺼내 학생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장개석입니다.

그 일로 장개석은 특별장학금을 받고 4년을 공부했고 중국에 돌아가 총통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렇게 복을 얻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남을 섬기려면 육신의 피곤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 내가 가진 물질을 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백한 가르침은 반드시 주는 삶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종이 되고 섬기는 삶에 천국의 풍성한 영광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 위에 서야하고 남보다 더 좋은 차와 큰 집에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은 세상의 권세 잡은 악한 영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성공을 이루지 못해서 인생이 불행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섬기는 삶을 살면 행복한 성공자가 될 것을 알기에 이런 삶을 훼방합니다.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섬기면 행복한 걸 알기에 상대에게만 자꾸 섬기라고 명령하도록 만듭니다.

동료를 위해 나를 낮추고 겸손하게 섬기면 그들에게 무시당할 거라는 생각을 줍니다.

물론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섬기는 우리를 잠시 무시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섬기는 사람을 고마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아니라해도 우리 안에서 잘했다고 위로하고 칭찬하시는 성령의 위로와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참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게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종의 신분이 되어 바로 나를 사랑으로 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사랑을 밀어내던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며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 죄를 다 씻어주셨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본체시고 말씀이시며 모든 천지와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작은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고 섬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할 때 우리의 조금 낮아진다는 것은 정말 별거 아닐 것 같은 데 사실은 그렇지 않죠?

자신을 조금이라도 낮추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남이 나를 하찮게 대할까 두려워 허세를 부리고 죽어도 자존심은 못 버리는 게 우리 모습이죠.

우리가 낮아져서 남을 섬기지 못하는 것은 자존감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있는 척 하지 않죠.

뭔가 자신에게 부족하고 약점이라 생각하기에 기를 쓰고 높아 보이려는 것입니다.

남서0교회를 담임하셨던 홍정0 목사님이 참 겸손하게 섬기는 삶의 본을 보이신 분입니다.

남서0교회가 얼마나 큰 교회입니까?

그런데 그 분이 20년 목회를 하는 중에 사례비를 사찰집사님과 똑같이 받았다고 하십니다.

목사님의 일이나 사찰집사님의 일이나 똑같다고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평생 22.5평 아파트에서 살고 계시는 데 손주들이 늘어나니 다 모이면 집이 비좁을 수 밖에 없죠.

하루는 사모님이 한번도 그런 말씀을 해 본적이 없으신데 우리도 좀 집을 넓혀 이사가면 어떻겠냐는 겁니다.

목사님이 당신 그러고 싶으면 어디 기도해봐 그랬습니다.

일주일 지난 뒤 목사님이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셔 그랬더니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하나님이 너 큰 집에서 살고 싶으냐? 그럼 얼른 올라와라 그러시더래요.

우리의 큰 집도 다 천국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좀 나중에 가야겠죠.

우리의 자존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목숨을 던져 사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그렇게 책임지고 지켜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절대 비천하게 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당당하게 우리 가족과 성도들과 직장동료와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십자가에서 비천하고 참혹하게 죽으시며 우리를 섬기셨기에 우리를 구하고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되셨습니다.

천국에서도 여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천국에서나 이 땅에서나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긴다는 원리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섬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안고 탄식하며 기도하시며 섬겨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며 연약한 우리들을 섬기고 계십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주시며 섬기신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한 나라에서 여전히 우리를 섬겨주십니다.

요한계시록21장 43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부모가 자녀를 돌보시듯 우리의 모든 눈물을 손수 닦아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고 모두 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존귀한 사람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