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세가지 시험 (마태복음4장1절-11절)

남수연 2012. 7. 4. 12:53


오늘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가지 시험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문의 시험은 우리가 살면서 받는 시험과는 다른 의미의 시험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인간의 대속자로서의 자격으로 받는 시험이므로 내용에 있어서도 깊은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많은 신학적인 접근과 구원의 진리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지만 오늘은 대체적인 시험의 의미와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가볍게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십년 동안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완벽한 삶을 사셨습니다.

비록 인간의 몸은 입으셨지만 예수님의 인격은 성자하나님의 고결하고 선하심 그대로였고 죄에 대해서는 흠이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인간 한 사람이 아닌 메시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서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맏형으로서 돌보던 동생들과 가난하고 소박했지만 사랑이 가득했던 정들었던 보금자리를 떠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는지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면서도 사도요한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하셨던 걸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생애 사역 중 예수님은 철저히 혈연의 정을 배제하시고 오직 메시야로서의 길을 홀로 걸으셨습니다.

힘든 일, 서글픈 일을 당할 때 위로해 줄 가족이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우리에게 힘이 됩니까?

주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며 홀로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에 쓸쓸함을 내비치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동생들조차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첫 걸음은 오늘 금식과 마귀의 시험이라는 고통으로 시작해 고단한 사역과 비난과 배신을 겪으며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시는 시험의 의미는 과연 인류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는 지를 입증하시는 데도 있습니다.

대속자의 자격은 무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으면 아무리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다 해도 무효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무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예수님 외엔 대속할 자격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고 역사상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죄가 없이 살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이죠.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인간을 넘어지게 한 사탄 앞에서 예수님이 시험받기 위해 지금 서 계십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지키고 앉아있는 거대한 생물은 얼굴은 사람인데 몸은 사자인 신화 속 생물인 스핑크스입니다.

어깨에 날개가 달린 테베의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정답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죠.

그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무엇이냐입니다.

어느 날 오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도전 해 정답을 맞추죠.

정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사람입니다.

자신의 수수께끼가 풀려버리자 스핑크스는 모멸감을 느껴 자결했다고 하죠.

사탄은 마치 스핑크스처럼 인간의 약점을 노린 교묘한 시험으로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해서 영혼을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아담이 이 계략에 걸려 하나님을 배신했고 그 후손인 모든 인류는 그냥 태어나면서 그 죄성을 그대로 물려받고 태어납니다.

저도 딸을 낳고 봤더니 죄인을 낳았더라구요.

오늘 시험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아무 실책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대속자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면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험에 걸려 죄를 짓거나 주님이 지니신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셔도 완전한 인간이어야 되는 대속자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며 인류의 구원이 걸린 중차대한 시험의 내용치곤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이기엔 단순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마귀와 예수님과의 전력을 다한 영적인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도경기에서 불과 몇 초 만에 한판승을 거두기도 하지만 그 내용 안에는 기술과 체력과 지략과 축적 된 모든 실력이 받쳐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마귀는 어떤 존재이기에 공생애를 시작하시려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통과해야 하냐는 의문도 생기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마귀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본분을 이탈해 영광을 취하려다 하늘에서 쫒겨 난 타락한 천사장이고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다.

마귀의 별명은 참소자, 고발하는 자라고도 하죠.

마귀는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항의하고 성도들의 죄목을 끊임없이 하나님게 고발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마치 자신이 원고인양 착각하고 검사처럼 행동하는 뻔뻔한 존재입니다.

이 마귀에게 예수님의 대속자의 자격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는 없으십니다.

다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아무 오점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입증하시려는 것이죠.

하나님께는 털 끝 만큼의 불의와 불공정과 편파가 없으시기에 인류의 대속자가 되실 예수님의 자격을 당당하게 확인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참소하는 자 불평하는 악한 사탄의 입을 틀어막으시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예수님께서 실패하시면 인류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고 예수님을 무흠한 대속자로 내 세우신 하나님의 명예에 오점이 남게 됩니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새 내각을 구성할 때 청문회를 통해 각종 비리가 발각되면 추천한 새 정부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마귀의 존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시는 지 질문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중에는 사탄이 범죄한 인간을 볼모잡고 있는 데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범죄한 마귀나 범죄한 인간이나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죠.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귀신의 세력만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때 까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마귀의 심판도 유보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40일간의 금식으로 시험을 이기기 불리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마귀에게 당당하게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마귀가 얼마나 엄선해서 세 가지의 시험으로 예수님을 공격했겠습니까?

이미 아담을 유혹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범죄로 이끈 마귀는 인간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의 약점을 공격해 넘어뜨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목표입니다.

오늘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 한 내용을 분석하면 악한 영들이 어떻게 우리를 시험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가지의 시험을 기록하신 것은 우리도 영적 싸움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날마다 승리를 주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첫 번째 시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험악하고 메마른 광야에서 40일간을 금식하신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한 낮의 태양과 밤중의 추위를 견디며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드시지 못한 극도의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 시험을 받고 계십니다.

요즘 같이 먹을 게 지천인 시대에 배고픈 고통을 제대로 실감하실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소말리아, 케냐 일부 지역에는 7년 째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지역의 식량부족과 굶주림은 처절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겨우 얻은 음식을 자식들에게 먹이고 자신들은 허기를 느끼지 않으려고 로프로 배를 동이고 살고 있습니다.

소말리아의 어느 곳을 가든 로프로 배를 묶은 여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쩌다 먹을 것이 생겨 로프를 풀었다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죽은 여인도 있다고 합니다.

식량 배급이 있는 난민촌에 들어가지 못해 한 데 잠을 청하는 여인들은 맨 손으로 나뭇가지만을 들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노리는 하이에나와 사투를 벌인다고 기자들은 전합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북한 주민들 또한 극심한 굶주림에 한 줌 쌀을 두고 살인까지 일어난다고 합니다.

굶주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응급상황 그 이상입니다.

40일을 굶는다는 것은 생명까지 위험한 일입니다.

분0우0교회 이0수목사님의 부친 목사님은 40일을 작정하고 금식하다 17일 만에 소천하셨을 만큼 위험 천만한 것입니다.

작년에도 한 목사님이 40일 금식 후 실명하신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간 의지의 한계에 맞서 있는 40일 금식 뒤에 시험하는 자가 주님께 다가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제안으로 갈등할만한 심각한 굶주림 가운데 있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주님이 광야를 지나 인가로 가기까지 목숨을 보존하려면 기적으로라도 빵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이기에 생존 본능을 극복하기란 우리처럼 어려우셨습니다.

삼일 금식하기 위해 금식기도원에 들어간 자매가 금식 이틀 째 되던 날 가방에서 굴러 떨어진 땅콩 한 알을 먹을까 말까 치열하게 갈등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배고픔은 인간의 체면도 교양도 다 내려놓게 하는 것이라고 이어0 전 장관이 이야기하더군요.

6.25때 몇 끼를 굶고 친구 집에 갔는데 밥 상 곁 숭늉그릇에 밥알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숭늉 좀 한 사발 달라고 해 물을 다 마시고 밥알을 훑어 먹었다고 합니다.

육신의 고통과 싸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 체휼하신 주님은 고통당하는 우리를 능히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나 영혼이 약해져 있을 때 공격해 옵니다.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가 생기고 골치 아픈 환경 속에서 심한 갈등을 일으킬 때 어김없이 마귀는 덫을 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을 선택을 할 만한 핑계거리를 넌지시 제공하죠.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드는 주님의 초인적인 능력을 사용해야만 할 그럴듯한 이유까지 제공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라

배고픔을 위해 기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을 사용하는 것이니 괜찮다는 것이죠.

배고픔이 절박할 때 빵을 만들어도 좋을 그럴듯한 핑계도 제공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피곤할 때 마귀는 건강을 핑계거리로 바쁠 때는 시간을 핑계거리로 제공 해 신앙적인 성장을 방해합니다.

사업이 힘들 때 남들도 다하는 정도의 편법이란 합리화를 제공합니다.

저희 교회도 수익사업을 해보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음식 값 중 10% 부가가치세를 떼어 반납하려니 유지가 더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현금으로 들어온 것은 매출로 잡지 않으려고 좀 머리를 굴려 보았습니다.

결국 교회가 불의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어 치웠습니다.

당장 눈 앞의 현실에서 손해를 덜 보려고 어느새 상황을 합리화시켜 불법을 저지르는 게 순식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독 실업인이라 해도 남들처럼 탈세방법을 사용할 유혹 앞에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과 밖이 다른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거짓 된 행위는 그 순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고 불법과 함께 일하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정직한 마음에 은혜도 기적도 주실 수 없으십니다.

명백한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지속적으로 죄를 합리화시키면 성령은 소멸되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도 평안도 위로도 풍요도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고의적인 악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상황이 어쩔 수 없어 합리적인 근거를 댈 만한 죄들을 짓는 것이죠.

그렇게 사람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고 영적으로 고갈되어 가는 것을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귀의 궤변을 내세운 유혹에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수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은 절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대적하신 말씀은 4절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몇 단계 비약이 있고 뜻이 함축되어 있어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생존했던 이유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자신인 것이죠.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인류를 구원 할 그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상기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주기 위해오신 주님만이 인류를 살릴 유일한 길이기에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생존 본능의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도 완전하게 순종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도 지켜 내신 것이죠.

우리에게 삶 자체가 유혹과 시험의 장소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나만을 위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택할 것이냐

우리는 매번 주님처럼 성공적인 선택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자녀다운 성숙한 삶을 선택하길 지켜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자식들이 거짓말하고 잘못 된 행동을 할 때 얼마나 하늘이 캄캄하고 속상했었는지를 부모들은 다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요한삼서3장 11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이길 힘과 지혜를 주기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굶주림을 참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 기도하며 시험에 능히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 째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성전의 꼭대기에 세웁니다.

원어의 뜻을 보면 강제적으로 붙들고 갔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피조물인 천사들은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롭죠.

사탄은 과거에 천사장으로 상당한 이적을 일으킬 만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견주려는 생각을 했다면 그런 자만심을 가질 만한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전은 기드론 골짜기로부터 750미터 높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기드론 절벽을 향해 뛰어내리라고 예수님을 몰아갔을 것입니다.

거기서 뛰어내리라는 이번 시험문제가 이해가 되시나요?

아니,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절벽을 향해 뛰어내립니까?

사탄은 분명히 예수님이 뛰어내리실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 문제를 낸 것입니다.

어쩌면 굶주림과 십자가의 대속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허약해지지 않았냐는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죠.

마귀는 사람의 생각하는 것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마귀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밀착 관찰하며 우리의 생각을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부정적인 말이나 걱정 근심하는 말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상처 난 곳을 공격하는 맹수처럼 마귀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말에서 약점을 파악하고 반드시 공격해 올 것입니다.

마귀 루시퍼는 하늘에서 영광스럽던 성자하나님을 섬기던 천사였습니다.

사십일을 금식하고 초췌해진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흔들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죠.

몸을 던져 하나님이 인류구원과 예수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테스트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귀의 요구대로 몸을 던진다면 하나님은 결정하셔야 합니다.

인류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을 위해 룰을 깨고 천사를 보낼 것이냐

악한 영들은 언제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수고와 헌신에 비해 항상 하나님은 내게 인색한 은혜를 주신다고 씁씁할 마음이 들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쓴 뿌리가 생기면 점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 되고 틈만 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애굽을 탈출해 광야로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칠고 삭막한 땅에 당장 풍성한 물과 음식물이 없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반석을 쪼개 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부분을 주님이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고난과 사지로 자신을 보내셨다해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지금도 악한 영들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 속에 굴러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우리 앞에 광야 같이 거칠고 험악한 시련이 올 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냐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 주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정말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나와 동행하시는 게 사실일까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은 광야에서 강을 내시고 반석에서 샘을 터치고 우리의 모든 삶의 갈증들을 해결해 주시는 능력과 사랑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육간에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시길 원하시는 걸 믿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다만 때로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처럼 우리의 고난이 나와 가족과 이웃에 더 큰 유익을 줄 것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조금 더 인내하도록 격려하심을 믿고 모든 시련들을 이기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세 번 째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순식간에 눈 앞에 천하만국의 영광을 펼쳐서 보여줍니다.

이런 환상과 기적을 마귀는 지금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되찾아 가시려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을 다시 찾아가려면 자기에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불법으로 이 세상을 점유하고 마치 제 것인 양 행세하고 있죠.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서 인류의 죄 값을 치르고 구원의 길을 열어야하는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갈등할 만한 조건입니까?

실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할 수 만 있으시면 십자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지 아버지께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을 당할 일이 얼마나 끔찍한 두려움과 고통이겠습니까?

만일 죽어야 할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형벌을 당하라하면 부모라도 쉽게 용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마귀는 그 마음을 건드리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끄집어 내 주님의 타협과 굴복을 요구합니다.

내 목적을 이룰 수 만 있다면 힘든 방법 대신 쉬운 길을 찾고 싶은 게 우리에게도 언제나 생기는 갈등 아닙니까?

환경이 답답할 때 점이라도 보고 싶은 게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귀신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 답답함을 좀 풀고 싶다는 것이죠.

잠깐 우상에게 숙이고 내 자식 대학 잘 가고 사업 잘될 수 있다면 눈 한번 질끈 감을 수 있다는 게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마귀는 더 강한 자가 빼내주지 않는 한 한번 잡은 영혼을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조차도 이런 유혹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 중 사실을 과장되게 말함으로 성도들의 관심을 좀 더 끌어보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성령께 지적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지만 때로 성령의 역사인지 확실치 않은 은사들을 사용해서라도 부흥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목사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이 인기를 위해 사탄에게라도 영혼을 팔고 싶어합니까?

사람들을 열광시킬 영감을 얻기 위해 악신이라도 이용하고 싶어 하는 게 예술가들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든 마귀든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잘 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이용하려는 마음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귀 뿐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의 목적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자식이 원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도 절대 우리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이나 봉사나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목적으로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우리에게 최고의 목적 그 자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탄에게 경배하란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견주고 언감생심 주님의 경배를 받으려는 추악한 본심을 드러내고 주님을 유혹했지만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물리치고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놀라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누리게 하십니다.

길을 가다 차 창밖을 보면 요즘 어딜 가나 참 우리나라 거리 조경이 멋있습니다.

멋진 펜스를 두르고 요리조리 아름다운 초목들을 심고 가꾼 모습을 보며 저는 이런 생각이 언제나 듭니다.

사람들이 참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잘도 사용해서 보란 듯이 살고 있구나.

이 모든 자원을 우리를 위해 풍부하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대단하신지요.

제가 지난 주에 여수에 잠시 다녀왔는 데 여수 엑스포에 아쿠아리움을 둘러보며 눈가가 잠시 젖었습니다.

유리 수족관에서 물고기들이 형형색색으로 헤엄을 치는 데 그 얼굴 하나 하나를 들여다 보니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필치로 창조하셨는 지 그것을 하나 하나 만드신 하나님의 지식과 손길이 느껴져 울컥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 창조의 주인이시고 하늘의 영광의 본체이신 성자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40일의 굶주림을 견디셨습니다.

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고초인데 대속자의 자격을 얻으려고 악하고 추한 마귀의 시험까지 받으시는 수모를 담당하고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시험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완전 굴복시키고 계략을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영적 시험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든 시험과 역경에서 이길 힘을 주시고 천국과 이 땅의 좋은 것들로 풍성히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편한 길 넓은 길 부요하고 좋은 것만을 위해 세상과 악한 자와 타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하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