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큰 위험에 빠진 풍랑 속의 제자들과 제자들을 찾아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감칠 맛 내는 양념처럼 수석제자 베드로가 주님의 도움으로 물 위를 잠시 걸어 본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 우리가 기본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사실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시 하고 믿는 이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단 얘기죠.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배에 타고 있었을 게 확실합니다.
16세기 카라바조란 화가의 그림 중에 마태의 순교란 그림이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기독교도인 처녀를 탐내는 에디오피아 왕에게 대항했다 도끼에 맞아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는 늙은 사도가 팔을 벌리고 십자가 모양의 구도로 쓰러져 있고 몽치를 휘두르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이 극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순교자 마태사도가 생전에 기록했던 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사실로 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이 허구를 기록하여 예수님을 신격화 시키고 그것을 전파하며 목숨을 내놓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타당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기록은 본문인 마태복음 뿐 아니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동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한 사람이 망상에 빠져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단지 갈릴리 해변가를 걷고 계신 것을 밤새 풍랑 속에 피곤한 제자들이 물 위를 겉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논리는 오히려 억지스럽습니다.
마태는 오늘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사실임을 못 박을 확실한 증인으로 베드로를 세웁니다.
현장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베드로 만큼 확실한 증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인지를 비로서 지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탁월한 선지자가 아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경배했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이심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웬만큼 양심이 있는 사람 같으면 완전 부인하진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성자라고 인정하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아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께로 나갈 생명과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기적의 현장에서 비록 실족해 물은 좀 마실 뻔은 했지만 주님을 따라 물 위를 걸어 보았던 베드로사도는 담대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4장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경배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믿음을 살펴보고 교훈을 얻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깨닫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먼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재밌는 유머들이 인터넷에 있더군요.
갈릴리바다를 건너가는 뱃 삯이 무려 20달러나 되자 관광객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을 합니다.
안내원이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유명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광객이 말하길 ‘그러면 그렇지 배삯이 비싸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갈 수 밖에 없었겠구만 ’하더랍니다.
이런 얘기도 있더군요.
어느 교회 유초등부 설교시간에 아이들이 수근대고 있습니다.
너,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걸 믿니?
그러자 한 아이가 그럼, 당연하지.
한 밤 중에 배도 없었잖아. 혹시 있어도 심야요금이 비싸니 걸으셨을 수 밖에 없지.
우리도 왜 차비 없으면 걸어가잖아.
예수님은 오늘 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걸까요?
그 이유를 마가복음6장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 거세진 물결로 인해 밤새 제자리를 맴돌며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날 바다의 밤은 칠흑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까이 나타나셨을 때 얼굴이 분별되지 않을 만큼 어두웠기에 유령이라고 소리 지른 것이죠.
게다가 지금 제자들은 뭍으로부터 4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바다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은 먼 곳의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험한 파도 속에 이리저리 쳐 박히며 자기들만 바다로 내보내신 주님을 원망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고생을 알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그러나 칠흙 같은 밤에 물결로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도와주시려고 주님은 파도가 넘실대는 4킬로미터의 물 길을 걸어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면 주님은 절대 아침까지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험난한 바다에서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악한 세력이 극심하고 우리에게 견딜 힘이 부족할 때 주님은 반드시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탈북 선교사인 0순영씨는 북한 최고의 여배우였습니다.
혁명가극에서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역할을 하는 것을 김일성이 보고 마치 김정숙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0선교사는 공훈배우가 되고 국모대접을 받으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에 국모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무역지도원이 되어 달러 벌이를 알아보려 연변으로 출장을 오게 됩니다.
그 때 성경을 한권 선물 받고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되죠.
그리고 탈북자가 되어 갖은 우여곡절과 난관을 극복하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잘 정착한 주선교사는 무리하게 욕심을 낸 식당사업에 3억원이란 사채 빚을 지고 하루 하루가 지옥과 같은 날을 보내게 됩니다.
빚을 갚을 수만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 있던 그는 돈을 많이 준다는 상업사진 작가의 유혹에 넘어가 사진 모델이 되었습니다.
새해 정동진에서 해돚이를 배경으로 한 촬영이 있을 때 였습니다.
속이 비치는 얇은 드레스를 입고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데 돈3억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슬프고 비참해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다 쪽에 있는 바위 섬으로 올라가는 게 좋겠다는 사진사의 말을 듣고 점점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습니다.
좀 더 멀리 멀리 도망가고 싶어 바위를 디디며 정신없이 가다보니 해변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고 사람들이 손짓하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채 만한 파도가 삼킬 듯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젠 죽어서 모든 고통이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자 바이올린을 들고 찬송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 속에 험난한 파도를 넘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구해주러 물 위를 걸어오신다는 확신이 들며 마음에 두려움이 한순간 사라지고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 삼킬 듯이 달려들던 태산 같은 파도가 그 순간 멈칫하더니 뒤로 스르르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는 정동진에서 새벽 해돋이 관광객 7명이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바다 가운데 있었던 0선교사는 멀쩡히 살았던 것이죠.
죽음의 사선을 수없이 드나든 그는 우리 삶이 어차피 풍랑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심한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찾으면 반드시 주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간증하며 찬양하는 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의 삶도 풍랑 없이 평탄하지만은 않은 줄 압니다.
우리가 탄 배가 흔들리고 때로 거센 환란에 곤두박질하기도 하지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꿋꿋이 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험한 바닷길을 걸어 제자들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깊은 탄식과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오고 계시는 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제자들에게 닥친 풍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바로 몇 시간 전 그들은 꿈 같은 기적을 보고 눈을 의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본문 바로 앞 절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오늘 동행하는 주님 없이 풍랑 속에 거꾸러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잘 쓰는 말 중에 인생은 십센트에도 바뀔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돈 백원에도 인생이 뒤집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앞 날이 보장되어 있지 못한 예측불가한 것이 인생이란 것이죠.
지금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지금 건강에 자신이 있고 지금 모든 것이 만족한 환경 속에 있다고 그걸 믿고 의지하는 게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간이라고 말합니까?
아무리 최선의 방책을 생각해 두고 위험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앞 날을 대비한다 해도 모든 풍랑을 다 피해갈 순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친 풍랑의 의미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으로 배를 탔고 건너편을 향해 노를 저었습니다.
분명 주님의 뜻대로 했는 데 그날 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험난한 풍랑 속에서 구토를 하며 이리저리 뒹굴어야 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거친 바다로 보내셨을까요?
그 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세우려는 왕국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류의 죄를 속하고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땅의 떡을 주는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왕이면 물질의 풍요를 누리면 좋죠.
돈이 있고 지위가 있고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면 천국도 별로 필요치 않은 게 인간입니다.
제자들을 원치 않았던 바다 한 가운데로 내보내실 때 육적인 축복만을 요구하는 군중 속에서 격리시키려는 주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허영과 거품으로 한껏 부풀린 육체의 소욕을 제거 할 고난의 풀무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한 밤 중 거세게 몰아닥치는 바람과 맞서 사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은근히 이 땅에 세울 주님의 나라를 기대했던 육체의 본능들이 씻겨나가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삼일이란 다큐 중에 무박3일의 훈련을 하는 특수부대원들이 나왔습니다.
잠을 단 10분도 안 재우고 3일간 강훈련을 시키는 데 추위에 비바람에 정말 저 젊은 청년들이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마음이 조리더군요.
마지막 밤 왕복 40킬로 미터 완전군장 행군을 마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참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카메라에 엄마이야기를 하며 주먹으로 눈물을 씻던 청년들이 꿋꿋이 3일을 이겨내더군요.
훈련을 통해 무엇을 얻었냐는 질문에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사병은 무엇이든 앞으로 어려운 일도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고난과 연단 중에 모든 허식은 사라지고 실제의 나보다 더 부풀었던 거품도 빠져나가고 포기할 수 없는 본질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고난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닌 줄 믿습니다.
영적인 박해를 이겨내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과 자손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 이 땅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풍요와 축복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삼십 삼년을 사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땅에서 누릴 작은 물질에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슬퍼하는 지 아주 가까이서 다 보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고 광야에 널린 돌덩어리들이 한 덩이 빵으로 보일 만큼 식욕이 인간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 지도 겪으셨습니다.
가난한 예수님도 세금을 내셔야 했고 죽으시고 묻히실 무덤이 필요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직장도 잃고 재산도 다 축낸 제자들을 이 땅에 두고 가야 하는 게 그렇게 걱정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눈물을 삼키며 고난의 행군을 할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홀로 좋은 것을 누리시고 계시다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천국에서 너희와 함께 마실 때 까지 마시지 않겠노라
우리와 함께 기쁨을 누리시기 전까지 주님도 기쁨을 보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와 탄식을 다 세고 계시고 채워주길 원하십니다.
때로 당장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내 형편을 다 알고 계시고 함께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눈에 뜨거운 눈물과 함께 위로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요?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좀 모질게 보일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시킬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 욕심을 채울 물질과 이 땅의 무가치한 것들을 구하는 대로 주시며 선심을 쓰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걷고 있는 길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십니까?
악전고투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세속적인 죄성을 털어내고 우리를 단련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환란 중에 오직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겸손히 주님을 경배하는 축복의 예배자로 변화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문제들이 결국 우리를 이 믿음의 자리까지 이끌지 않았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의 고난이 롤러코스터 같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분이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롤러코스터를 타 보셨는 데 360도를 돌면서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데 회개가 절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롤러코스트죠.
결국 안전하게 도착합니다.
그 다음은 바이킹을 탔는 데 왜 직원이 오래 태워줄 때가 있죠.
빨리 내리고 싶은 데 손님들이 재미있어 하는 줄 알고 남들보다 두 배 길게 태워주는 것입니다.
미끄러져 내려올 때 간이 철렁하며 공포에 비명을 지르지만 그것 역시 결국 안전하게 끝이 나는 바이킹일 뿐이죠.
하나님은 위기와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마침내 약속하신 좋은 것을 축복으로 주실 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물 위를 걸은 베드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런 상황에서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는 뚱딴지같은 요청을 한 것일까요?
베드로는 좀 즉흥적이고 투박한 뱃사람의 성품이죠.
생각한 대로 말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너울이 사납게 일렁이는 갈릴리 바다를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는 불쑥 믿음이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뜨거운 기적이 일어나는 집회 현장에 앉아 있으면 내 믿음도 꽤나 대단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베드로는 이미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귀신도 쫒아냈고 병도 고쳐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나른 사람입니다.
짧은 순간 그의 머리 속에 저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스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도전에 즉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되지 않을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도전하면 하나님은 오케이, 해 보아라 하십니다.
실패가 있다하더라도 믿음으로 도전한 일엔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바다로 내려와 발을 디딘 순간 인간이 물을 밟고 걷는 사상초유의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30절에 순간 바람을 보고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물에 빠졌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고 말씀하시죠.
그만한 믿음이면 대단한 데 베드로는 왜 실패했고 그는 무엇을 의심한 것일까요?
30절에 보면 이상하게 그가 물을 두려워해 빠진 게 아니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지기 시작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연히 물을 보고 두려워해야 하는 데 그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베드로가 도대체 어떤 믿음이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를 꾸짖자 그림 같이 바다가 잔잔해 진 마태복음 8장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물 위를 걸을 자신을 위해 바람을 잠재우실 것을 예상했다는 것이죠.
베드로는 헤엄을 아주 잘 치는 어부입니다.
바다가 잔잔해 지면 설령 걷지 못하고 물에 빠진다 해도 헤엄쳐 배로 돌아올 수는 있는 것이죠.
아니면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가거나.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을 돌아볼까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갖춰 두었기 때문에 마치 주님을 향한 믿음이 견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안전장치가 풀어졌을 때 그 때 비로서 진짜 내가 믿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베드로가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멎게 해 주실 것이고 그렇다면 최소한 헤엄을 쳐서라도 빠져나올 수는 있다는 걸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베테랑 어부라도 거대한 파도가 날뛰는 바다에서 헤엄칠 수는 없습니다.
거센 바람이 멈추지 않고 파도를 일으킬 때 그가 믿고 있던 안전장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나 버립니다.
급 당황한 베드로는 어 이게 아닌 데 하며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죠.
하나님이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순간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전장치를 감추어둔 이상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숨겨둔 안전장치 때문은 아닐까요?
주님은 모든 풍랑이 잔잔하게 우리 발 밑에서 순종하리란 약속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풍랑 속을 뚫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풍랑이 쎈지 우리가 의지하고 나가는 주님이 쎈지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지금 어떤 위협적인 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어닥치고 있는 지 모릅니다.
우리가 시선을 돈이나 건강이나 자식의 문제만을 주시한다면 어느 새 우리 발은 바다의 심연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우리 걸음이 실족해 거의 바다에 빠지게 되었을 때라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위로를 발견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다시 주목하고 도움을 구했을 때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구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으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 우리에게 결코 침몰이 없는 줄 믿습니다.
이사야 43장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 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다
베드로가 기대했던 바람이 멈춘 시점은 그가 바다에 발을 디딜 때가 아니었습니다.
32절에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잔잔해 졌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안전장치가 무엇이었는지 그 실체가 드러난 다음입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것이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주님만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그 때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잔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인생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주님만을 온전히 의지할 때 흉흉하던 풍랑은 거울과 같이 잔잔해 지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빠져 있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한 요한복음6장21절을 보면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라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밤 새 바다 가운데를 표류하듯 떠돌던 배가 예수님이 오르시자 순식간에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신비한 일입니다.
인생의 바다 한 가운데서 마치 제자리를 맴돌 듯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벌이는 우리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내 인생이 당면한 문제들은 달라지는 것 없이 남보다 더디고 멀리 돌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별 의미 없는 시간들을 소모하고만 있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이 밤새 풍랑과 싸운 시간들은 허비가 아닌 줄로 믿습니다.
차가운 바다에 발을 담그고 거친 파도를 걸어서 고난의 시간을 겪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능력의 주님을 기다리는 소중한 인내의 시간인줄 믿습니다.
제자들은 고난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축복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모하고 애쓴 모든 것을 때가 되면 보상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한 순간 해결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풍랑과 싸우느라 곤고한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파도가 한번 치솟으면 작은 거룻배엔 물이 한가득 들이 찼겠죠.
정신없이 물을 퍼내다 보면 거센 바람에 배가 뛰놀며 몸은 곤두박칠칩니다. 상황을 좀 수습하려 온 몸이 녹초가 되고 피곤에 절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힘들고 지친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를 향해 거친 파도를 밟고 걸어오시는 줄 믿습니다.
기다림은 지치고 밤은 길게만 느껴지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우릴 찾아오시고 새 날이 밝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낙심한 문제들을 통해 세상을 향한 허영심과 교만이 사라지고 오직 영원한 하늘의 소망만을 바라게 하시니 오히려 주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든 것은 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사람과 돈이 문제의 핵심인 듯 우리를 속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목하면 우리 믿음은 주저앉고 점점 좌절과 절망 속에 가라앉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더욱 바라보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의 지혜와 통찰력을 받을 때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주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반드시 헤쳐 갈 길을 밝히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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