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반의 메시야로서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당시 유월절 명절을 맞아 십만명이 군집한 예루살렘에는 이미 예수님의 메시야왕국 도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크게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눈으로 보면 갈릴리지방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메시야사역이 점점 강력하게 확장되고,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메시야의 노래를 부르며 열렬히 환대했던 것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를 보면 평소처럼 걸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좀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당당히 말을 타고 들어오시는 게 아니라 발이 땅에 닿을 듯 끌려가며 천천히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구약의 스가랴선지자의 예언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스가랴9장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이 주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밤에 가룟유다가 이끌고 온 군인들에게 체포되십니다.
밤새 헤롯과 빌라도에게 끌려다니며 졸속 재판을 받으신 예수님은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형틀에 못박히시고 여섯시간 뒤인 오후3시에 운명하십니다.
바로 유월절 명절 어린양을 잡던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의 속죄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요?
네팔의 어느 불교신자의 경우 불교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도착하고 보니 30년이 지났더라고 합니다.
세상의 종교인들이 자기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종교의 창시자를 위해 30년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정작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목숨을 주신 예수님에 대한 성도들의 관심은 이땅에서 안일과 성공적인 인생에 밀려 뒷전인 것 같습니다.
왜 신자들의 믿음이 세상 종교인들의 열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이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생애를 성경 안에 제한하고 신화처럼 이해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에서 사형 당하신 것은 분명히 과거 지구상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든 것처럼 실제 일어났던 과거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실제가 아닌 신화에 가깝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의 남편이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어느 날 사회시간에 지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실제 있다는 것을 배우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게 성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구상에 실제 있는 나라라는 것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막연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석가는 예수님보다 오백년이나 더 오래 전 사람인데도 누구나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아는 반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누군가 마치 연막을 터뜨려 놓은 것처럼 애매한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누가 그랬겠습니까?
사탄의 세력은 예수님을 신화화시키고 기독교를 종교화시키려는 집요한 공작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건은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지금 현재 내게 가장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는 중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내세와 심판과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에는 인간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면 영생에 대해 눈이 확 열립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면 이 땅의 삶의 의미도 보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많은 프로그램을 공부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아직 진정한 구원의 세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에 대해 생각하고 그 의미를 잘 정립하고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 고통은 바로 내 죄의 값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저 고통이 내 죄를 씻기 위해서인데 어떻게 눈길을 돌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통에 대해 우리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마태는 세리 직업을 가졌던 사람답게 십자가의 사건을 저녁뉴스 처럼 사실적으로 전합니다.
나를 위해 당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주님의 고통은 단지 육체가 당하는 잔인한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 같으면 인격이 완전히 붕괴되고 정신이 돌아버렸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무너지는 그들의 믿음은 이미 주님께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26절에 보면 바라바라는 도둑을 특사 방면하고 예수님은 억울한 사형판결을 받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오해를 받고 없는 소리를 들어도 밤잠을 자지 못하죠.
죄없으신 주님은 불법 재판을 받고 즉석에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형이 즉시 실행되었습니다.
이 무서운 십자가형 집행은 채찍질부터 시작됩니다.
형에 앞서 당하는 채찍질은 살점이 뜯기는 끔찍한 고통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채찍질을 당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노예같이 천대받고 짐승같이 맞을 때 분노와 수치심에 살갗과 마음이 다 갈갈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또 27절 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모욕당하신 모습이 나옵니다.
붉은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무릎 꿇어 절하며 왕의 행세를 한 가짜라고 희롱합니다.
진실이 거짓으로 날조되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조롱당하는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에 더러운 침뱉음을 당하는 그 수욕을 당하셨습니다.
31절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끌고 갈 때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할 정도로 채찍질의 고통이 극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 도착했을 때 쓸개 탄 포도주를 주님께 드리지만 마시지 않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극단의 고통이기에 무자비한 로마군인들이 이런 일말의 자비를 사형수들에게 베풀어 주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신 것입니다.
마태사도는 못 박힌 예수님 곁에서 태연하게 그 옷을 제비뽑아 가지는 군인들의 모습을 기록함으로 주님의 고통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이 장면은 이미 천년전 성령에 감동 된 다윗에 의해 예언되어진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22편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시는 분명히 다윗의 경험을 기록한 게 아닙니다.
이미 고난당할 그리스도를 마치 눈으로 보고 있듯이 기록한 메시야의 고난의 시입니다.
이 시편을 읽어보면 고난당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시가 좋은 것 같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극렬한 아픔과 고통을 단 한마디도 표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시편과 욥기와 이사야의 글들을 통해 수난의 그 큰 고통을 우리가 좀 알도록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을 아는 만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주님이 왜 이 십자가형을 받아야했는 지 죄목이 적힌 명패가 붙어있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기가막힌 진술입니다.
이 명패의 죄목은 빌라도가 쓴 것입니다.
이 문구를 놓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첨가하라고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거절합니다.
‘나는 내 쓸 것을 썼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이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만이 주님의 십자가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대면하며 우리에게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여야만 하는가?
사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참 우리를 거북하게 합니다.
왜 꼭 십자가에 못박히는 끔찍한 형벌로 우리 죄를 속죄하셨을까, 석가처럼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편안하게 죽으시며 우리 죄를 속죄하실 수 없으셨나.
왜 굳이 십자가여야 했을까?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항상 불편합니다.
당시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하고 가혹한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거기서 여섯시간을 주님께서 매달려 온 몸의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속죄하는 데 이런 참혹한 십자가여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지금 예수님께서 장차 우리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은 인간이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이 어떤 것인지를 당시 가장 혹독한 십자가 형벌을 통해 똑똑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비록 이 죽음이 대신 죽는 죽음이라 할지라도, 또 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기준대로 집행하십니다.
주님께 얹혀진 우리의 죄의 무게에 대해 정확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결코 가볍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있었다면 주님은 아마 그 방법으로 죽으셨을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느니 이런 딴 소리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절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무섭고 끔찍한 형벌을 받으신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지금 왜 저런 고통을 당하고 계시겠습니까?
죄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없는 사실이고,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형벌로 그 심판의 고통을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주님이 내 대신 이 지옥의 심판을 당하셔야 했기에 꼭 십자가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지옥의 심판을 받을 만큼 그렇게 악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인간의 죄가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영원토록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때로 좀 이해하기 힘이 들지 않습니까?
거리를 활보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선량해 보이는 데 그 죄가 지옥을 경험해야 할 만큼 큰 것인가?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둘러선 인간들의 죄의 정체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선 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십자가 앞에선 회개하던, 무시하던 둘 중 하나로 갈라집니다.
아무 죄가 없는 고결하고 흠이 없고 선하신 주님 한 분만이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의 형벌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 주변엔 괜히 예수님을 모욕하고 학대하는 잔인한 로마군인들,
자기의 중한 죄로 형벌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욕하는 두 강도들,
아무 상관도 없이 지나가면 될 사람들조차 왜 예수님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모욕을 합니까?
예수님의 무죄를 너무나 잘 아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눈꼽만한 죄책감도 없이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임으로 심판자체를 묻어버리고 은폐해 버리는 인간의 모질고 사악한 본성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란 듯이 무시하고 비웃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 다를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과거에 그 자리에 있을 때 역시 마찬가지 아니였나요?
인간의 악독함은 위선이라는 포장지로 여러 겹 쌓여있지만 영원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해 이를 갈고 악담을 퍼부을 존재들이라는 것이 지금 십자가 주변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잖습니까?
교양과 체면으로 교묘하게 위장했던 본심이 한번 발각되고 나면 그 다음은 막 가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모든 거짓과 위선이 말갛게 드러날 때 인간이 막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가 명백히 드러나도 잘못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더 막 나간다는 것입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자기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하나님께 들이대는 모습이 성경에 나타나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절대 동정을 받을 만큼 미미하지 않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직장 동료나 이웃을 꼴도 보기 싫은 놈이라고 가볍게 욕할 때, 그 속에 살의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미 살인하였느니라.
천재지변이나 난리가 나는 곳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게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순식간에 폭도로 변하고 상점을 부수고 약탈한다는 것입니다.
감추고 있던 파괴적인 본성이 법망이 무너지는 순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앞 길이 막히고 고통이 닥치면 도끼눈을 하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들키는지요.
이걸 자주 들킬수록 은혜인 것입니다.
내 본성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고 공경하며 섬길 수가 없는 자였구나.
그걸 확인할 때 마다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죠.
우리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유는 모르지만 어느 날 주님을 모욕하고 무시하던 내 맘이 바뀌어 하나님을 공경하고 싶은 마음이 된 것은 우리 일생에 가장 큰 기적이고 가장 큰 시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뻔뻔한 자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은 인간의 이 인격성입니다.
죄의 본성에서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격성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께로 부터 격리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그 악독한 죄성을 버리지 못하기에 육신의 고통을 받으며 그걸 다스림 받아야 하는 것이 지옥의 심판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45절에 보면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동안 우리 시간으로 12시 부터 3시까지 한 낮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워렌 위어스비는 이 사실을 들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동정했다’고 감상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흑암은 오히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심판이라고 봐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1장8절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의 얼굴과 그 영광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뻔뻔한 죄인들의 얼굴에 하나님이 염증을 느껴서 외면하기에 그곳에 빛도 즐거움도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지옥에서 빛이라고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불 뿐입니다.
그러나 계시록22장5절은 천국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셨기에 흑암이 온 땅을 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흑암이 세상을 덮은 뒤 오후 3시경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는 말씀이 4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단 한번도 하나님과 분리되신 적이 없는 예수님께서 최초로 하나님과의 분리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그 어떤 고통보다 더 끔찍해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선과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부터 격리되기에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으로 부터 그 모든 것을 누리는 곳이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심판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 이상 하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외아들을 대신 심판하셨고 모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시비할 만큼 편협하고 허술하지 않습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인간이 저지른 단 한건의 죄악도 착오 없이 분명하고도 정의롭게 그 형벌의 정도를 부여하실 것입니다.
형벌 받을 죄인이 불쌍하다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다만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심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를 깨닫고 십자가의 구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그 다음 내 인생의 해답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내게 있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답은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절대적인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다음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똑바로 살아야 겠다고 스스로가 결심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3장 24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내 옛 정서와 욕심이 하나님을 대적하던 죄의 근성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 옛사람과 욕심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의 원흉이라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젠 과거의 내 모습과 내 낭만과 세속에 대한 욕심들에 대해 변호하고 연민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게 나타날 때 마다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대뜸 밀려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해결할 문제에 대한 염려와 일에 대한 두려움과 짜증, 무거운 몸으로 인한 우울감, 눈 뜨면 생기는 가족간의 갈등.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옛 정서와 욕심 때문에 오는 것들입니다.
아침부터 즉시 이런 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새 마음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가족을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하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내 자신이 좀 손해보고, 이런 마음으로 매사를 대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신 모든 일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구원의 역사가 열리질 않습니다.
또 우리 믿음에도 힘이 없고 믿음이 현실에서 아무 유익이 안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따를 때 우리 믿음이 강해집니다.
현재의 슬픔과 고통이 영원한 나라를 향한 여정 중에 지극히 짧은 한 통과지점임을 알게 되고 이길 힘이 생깁니다.
목표가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에 고정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인하고 내면이 충만한, 이미 천국의 소망과 기쁨과 능력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다 이뤄지는 순간 50절에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휘장을 통해 분리되어 있던 지성소가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 우리가 구원의 길로 나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극한의 고통, 지옥의 고통을 다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가장 좋은 곳으로 데려가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잠시 고난과 슬픔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영원한 기쁨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사력을 다해 체력과 경기력을 높이는 모습을 봅니다.
연습이 전부라면 누가 그 고통을 이겨내겠습니까?
금메달이 보이고 상주는 사람이 보이기에 고된 연습을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이 이 땅에서 전부라면 매일이 슬픔이고 절망이겠지만 죽음의 문을 열면 영원히 안기게 될 주 예수님의 완전한 나라가 있기에 오늘을 또 이기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참아내시고 나를 건져내신 그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짐과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그러기에 고통당하는 자녀들을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명설교자 스펄전은 임종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나의 신학의 전부’라고 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 같은 게 뭐길래 사랑하셔서 죄값을 대신 치러주고 싶으셨을까요?
이 하나님의 죽음을 묵상할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용납하게 되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도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착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길 다시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4.4.13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인잔치 비유 (마태복음22장1절-14절) (0) | 2014.06.26 |
---|---|
예수님의 새가족 (마태복음12장46절-50절) (0) | 2014.06.05 |
마태의 큰 잔치 (마태복음9장9절-13절) (0) | 2013.12.09 |
부스러기 은혜도 족하다 (마태복음15장21절-28절) (0) | 2013.11.11 |
열 처녀 비유 (마태복음25장1절-13절) (0) | 2013.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