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겠죠.
또 이 질문이 아주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지 못했고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에 관한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하고 구원과 직결 된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내용을 잘 깨닫고 예수님의 질문에 잘 대답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기본부터 알아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단어의 뜻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에 ‘메시야’이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선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엔 기름부음 받은 사람, 그리스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통해 종말에 다윗의 후손이 마지막 왕으로서 영원히 통치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이 종말적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는 나라가 로마에 넘어가 다윗의 왕조가 끊긴 상태였습니다.
우리 조선왕조 5백년이 일제강점기 때 끊어진 것과 같죠.
다윗의 후손이 와서 영원히 다스리는 나라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겐 당연히 독립왕국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열렬히 종말적인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말에 오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에게 특별난 점은 기름부음 받던 세 가지 직책을 혼자서 다 갖고 통치한다고 성경은 계시합니다.
왕으로 통치하되 백성들의 제사장 역할과, 가르치는 선지자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죠.
그게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감당하실 사역을 계시하기 위해서 이만큼이나 치밀하게 준비해 오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며 속죄를 위한 대제사장이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스승이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주 단순한 생각만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부족한 지식은 성도들의 풍성한 신앙생활의 걸림돌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오늘 바리새인들처럼 구원받을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고대했습니다.
예배도 드렸고, 율법도 지키고, 십일조도 했고,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그리스도를 기다렸기에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각자의 심령에 물으실 것입니다.
나를 누구로 알고 믿고 있느냐.
오늘 설교를 마쳤을 때 모두들 정확한 대답을 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본문성경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완수하실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환영하는 시민들과 달리 종교인들은 예수님이 가짜 그리스도임을 밝히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율법학자,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준비한 질문으로 예수님께 총공세를 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비한 지혜와 답변에 번번이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고 논쟁조차 못하고 물러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반대로 이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이 질문은 단지 바리새인들의 입을 막아 꼼짝 못하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시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뻔한 이 예수님의 질문에 아주 쉽게 대답합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족보에서 올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 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느냐.
그러시며 다윗의 시편110편 1절을 언급하십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제압하고 영원한 왕이 되실 것에 대한 예언시로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시편입니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내 주께 말씀했다고 합니다.
두 분의 주가 나오죠?
이것을 바꿔 읽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나의 주께 이르시되’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은 성령에 감동되어 자기 후손인 그리스도를 보고 ‘내 주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찌 까마득한 선조 할아버지가 천년 뒤에 태어날 자기 손자를 향해 내 주여라고 불렀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한편 다윗의 주님이라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설명해 보라는 것이죠.
45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이 말씀에 그들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아무도 대답 못할 뿐 아니라 그 날부터 감히 예수님을 검증해 보겠다고 물으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신약시대의 우리는 감사하게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족보를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이미 선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게 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며 정치적인 그리스도였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신화적 인물이나 역사적인 인물 정도로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인류의 4대 성인 중 한명이다 정도로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다윗처럼 성령의 감동으로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같이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구약성경 구석구석에 이미 답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성경만 철저히 연구했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미가선지자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오리니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 있느니라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 그러나 태초부터 계시는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잖아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밝혀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셨는데..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라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인간 그리스도만을 알았지 이런 신비한 존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음이 하나님께 없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잖아요?
이들은 인간 그리스도의 나라를 원했지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되어 다스리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았기에 꿈엔들 그런 생각을 않했던 것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되었지만 민족역사 내내 하나님을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정통치가 싫다고 인간 왕을 달라 고집해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사울왕을 택해 준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 인간 왕들이 결국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 몰아 넣어 다 망하게 합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하나님이 다시 주신 왕이 결국 누구냐 하면, 다시 하나님이신 것이죠.
죄인이 가장 싫어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신 것 아십니까?
우리 믿음도 과신하지 마십시오.
어느 순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일어나는 게 우리 본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항상 새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께 호의적일 수가 없는게 우리의 죄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끼리는 본성이 같으니 피차 죄에서 뒹굴고 속고 속이고 그러면서 잘도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싫었던 이유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삶을 꿰뚫어 보시고, 죄를 회개하라 지적하고, 똑바로 살라고 간섭하시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인간끼리는 다 한 통속이지만 하나님만 다르시거든요.
만일 오늘날 예수님께서 이만명 교회에 청빙 받아서 담임목사로 가셨다면 한 달 이내에 열 명만 남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냥 저 멀리 계신 신이면 좋은 것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그냥 복을 빌고 마음에 위안을 받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시시콜콜 마음과 행동을 간섭하는 그런 신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사람만큼 아무데나 절하고 복을 비는 존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신을 잘 섬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인간이 섬기는 최고의 신은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이해했지만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이런 말씀들은 아예 받아들일 생각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몰랐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고난받고 죽으실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민족 구원에 실패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죠.
고난당하고 죽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왕조를 다시 영원히 세우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죽어야 구원한다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영원하다고 들었다며 반박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단지 내 민족에게, 현세의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줄 구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와 다윗의 시편에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앞으로 성경을 읽으실 때 잘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몰랐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짐승제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제사가 예표하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몰랐습니다.
속죄를 모른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면 자기 본성에 깊이 뿌리박힌 죄악을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이 의롭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도왕국의 주인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도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잖아요.
이만큼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왜곡 된 지식과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 지식을 반드시 이해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선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오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속죄하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오늘 예수님의 질문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을 거부하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 질문을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너네, 왜 이렇게 나하고 다투는 줄 아냐, 왜 이렇게 내게 저항하는 줄 아냐, 다윗은 나를 주로 인정했지만 너희는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 안의 신앙적인 갈등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윗처럼 나의 주, 하나님으로 알고 믿으십니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면 인생의 주도권이 주인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죠.
이게 너무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남에게 넘기지 않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식으로 살아보겠다고 하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인간 왕으로 와서 현세에 복을 주는 인물이길 바랬지 복종하고 섬길 하나님으로는 절대 원치 않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이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재앙을 막아주고 성공을 밀어주고 병을 낫게 해주고 만사를 형통하게 해주시는 그런 예수님, 그런 현세에 복을 주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잘못 된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의 가치를 현세보다 내세에 둡니다.
온 우주와 시공간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나라 중에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지극히 작고 임시적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 영원한 처소로 우리는 옮겨 갑니다.
이렇게 살다 끝내고 마는 게 아니잖아요?우리는 현재와 내세의 창조자시고 주인이신 하나님께 철저히 복속되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복종으로 예수님께 얽매여야 하는 것이죠.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자유를 원하면 종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의 출발은 이렇게 전능하고 거룩하고 위대하신 우리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예수님을 종으로 따르겠다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따라오고 천국의 기업을 누릴 상속자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주종관계를 모르고 출발하면 어떻게 됩니까?
잠언이 말해주십니다.
잠언29장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 하리라
본래 종인 신분을 망각하고 자식의 권리만 내세우고, 현세의 축복만을 따지는 바리새인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 모든 일에 다 하나님께 얽매이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종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속에서 불편하면 아직 내 생의 결정권자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렵고 두렵고 경외해야 할 대상일수록 성도들에겐 영광입니다.
인간이 제 맘대로 이용할 하찮은 신이라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자랑이고 영광이 되겠습니까?
천하 만물을 공의로 심판하실 위대하고 두려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이 우리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성자하나님으로 깨닫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 만큼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섬겨야 할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에 항상 마음이 향해야 하고 주님의 명령을 우리가 기다리고 즉각 순종할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치스러운 종이 아니라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위해 수치를 당하셨고 고난을 당해 주신 이상한 관계의 종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종이 된 우리의 발을 닦아 주시는 그런 주인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길 주저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계시록에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무리들이 누굽니까?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졸졸 따랐던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복종함이 없다면 모든 것은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 자기가 인생의 주인일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고양이가 쥐 잡아 놓고 희롱하듯이 마귀에게 농락당하며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안정되지 않고 늘 기복이 심한 마음, 끊임없이 계속되는 우환, 왠지 위태로운 삶이 불안해 보입니다.
사람은 선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만나기 전에는 죄와 사탄의 종으로 산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잖아요?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질문에 각자가 답을 하셔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다윗처럼 깨닫고 대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은 전능하고 위대하고 위엄과 영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순복하고 복종하기를 축복드립니다.
주인은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인생이 답답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도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예수님께 맡기면 예수님이 얼마나 분명하고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기에 내가 생각대로 되어야만 잘되는 줄 알고 조바심이 나는 것입니다.
다 맡기고 주님의 인도를 신뢰하며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잠잠히 따르면, 편해집니다.
뒤돌아 하나님이 인도해 오신 우리의 인생을 보시면 알 수 있잖아요?
또 아직 예수님의 질문에 정답을 깨닫지 못한 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모든 것을 걸고라도 이 해답을 발견해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과 얽히지 않은 모든 일들은 다 시시한 일들입니다.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고 모든 일과 시간들이 보람과 즐거움으로 꽉찬 인생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7년6월2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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