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교회 예배에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시간을 위해 기도하며 한마음이 되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교회는 창립한지 8년 된 작은 교회입니다.
크고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하고 진심어린 신앙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바른 교회입니다.
오늘 예배도 평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모신 이유는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을 기독교신앙으로 초대하려는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해드릴 예수님의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입니다.
요즘 취업문도 좁고 경쟁도 치열한 세상이죠.
올해 300인 이상 기업의 대졸신입사원 취업률을 보면 지원자 백 명 중 세 명만이 합격했다고 하니 좁은 문이 아니라 바늘구멍 수준이더군요.
이런 세상에서 살다 오셨는데 교회에서조차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들으시게 되셨습니다.
기독교신앙 안에는 좋은 위로와 축복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시간에 무엇보다 구원에 대해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께도 믿음의 기본을 다지는 귀한 말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갈리는 선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이 말씀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될까요?
그것은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있습니다.
이 말을 누가 했냐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 경험이 없는 분들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역사 속에 예수님이 미치신 영향을 알면 예수님은 몰라도 상관없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해서 지구역사는 BC와 AD로 나누어진 것입니다.지구역사뿐만 아니라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과거와 현재가 바뀝니다.
인생 좀 살아보신 분들은 사람이 바뀐다는 건 기적이라는 걸 아실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은 세상역사 속에 사셨던 유일한 신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이며 인간 세상에 아기로 태어나신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신화처럼 들리겠지만 이에 대한 사실적 증거는 충분합니다.
우리도 다 알만큼 알아보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시간에 다 알려 드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이해하시면 우선 오늘 말씀을 들으실 때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인격과 삶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 진실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우리 인간들 같은 거짓과 위선과 기만이 없으십니다.
인간역사에서도 예수님을 진실한 4대 성인 중 한 분으로 인정하시잖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진실 되고, 변치 않는 진리이고, 내게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정보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길 축복드립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체 이 ‘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니 얼마나 애매한 명령이십니까?
이런 의문을 갖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에서 ‘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문’은 실제로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문’이 가진 의미를 가지고 진리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은 어떤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를 말합니다.
실제 건물에서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문이 아닌 곳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배우려고 시작 할 때 ‘입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걸 알 수 있죠.
세상엔 사람들이 입문하는 수많은 세계가 있습니다.
입문해 보면 그동안 알지도 못하던 세계가 내가 알건 모르건과 상관없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입문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런 사람을 문외한이라고 하는 것이죠.
입문하기 전까지는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서 떠드는 전문장비며 기술 같은 걸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자전거가 다 비슷해 보이지만 자전거 동호회에 입문하면 그 속에선 상황이 다릅니다.
무게, 강도, 변속기어 같은 것의 등급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자전거 한 대 값이 경차 한 대 값과 맞먹는 것도 있습니다.
문외한들은 여러 개 중에서 이런 것 골라서 그냥 가지라고 해도 못 고릅니다.
사람들은 종종 나도 알만큼 안다고 말하죠.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알고 경험한 것은 티끌만큼 작은 것입니다.
이렇게 드넓고 다양한 세계에서 겨우 몇 가지를 골라 우리는 입문합니다.
요즘 핫한 분야는 카카오뱅크, 요가, 비트코인 이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에 오신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에 대한 입문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은 이 세상 안에서의 입문이 아니라 현재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바로 현세에서 내세를 향해 가는 문을 의미합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갔느냐에 따라 그 결말은 ‘생명’과 ‘멸망’으로 갈라집니다.
이 말씀 안에는 단순하지만 확고부동한 진리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애가 현재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세상은 현재의 선택과 삶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멸망이라는 극과 극의 결말입니다.
아마 이런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영원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짧은 이생으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끝나버리지는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쁘게 살아갈 땐 잊은 것 같지만 가을바람에 마른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질 때 허무감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영원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사물을 볼 때 혼란을 느끼는 것이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이할 때 영원에 대한 균열이 생기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만물의 죽음을 대할 때 오히려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나는 것이죠.
우리는 사실 죽음으로 소멸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오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통해 그 다음 생애가 있다는 것과 그 생애를 위해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착하게 살라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한 게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지금도 실제하고,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실 세상을 다스리는 영구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굴러가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창조주가 있고 관리자가 있습니다.
조금만 방향을 달리해서 생각해보면 이게 더 타당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또 그 영광과 행복으로부터 영원히 분리 된 곳 고통의 장소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문은 각각 이 두 곳을 향해 가는 출입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향하는 좁은 문을 발견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개의 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문은 단 두 개이고 다른 문은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다 넓은 문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먼저 넓은 문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문이 넓다는 것은 제약이 없어 누구나 쉽게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기업에 들어가려면 자격을 갖추는 것만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게 갖춰도 2백대1인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반면 다단계 판매회사 같은 데는 자격이란 게 없죠.
누구나 들어오면 환영인 것처럼 큰 문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또 문이 넓다는 것은 무엇을 버릴 필요가 없이 다 끌고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넓은 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모든 종교와 유행과 죄와 권력과 인간의 야욕들이 스스럼없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그대로 갖고 가기에 사람들은 이 큰 문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이 문을 통과한 넓은 길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사람들은 그 문으로 들어 온 많은 사람들을 보며 서로 안전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터넷쇼핑을 할 때도 후기가 수백 건 되면 믿고 사게 되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이 큰 문 안에 들어가 넓은 길을 따라 갑니다.
그 안에서는 누구나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넓은 문은 하나지만 그 안에 세상의 모든 분야와 삶의 방식이 다 들어 있어 자유자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넓은 문은 바로 이 세상입니다.
엄연한 주인이 계신데 주인행세를 하며 사람들이 이렇게 본성대로 일궈놓은 세속문명 세상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예수님이 세상임금이라고 하셨던 사탄의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점점 더 악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일하게 이 넓은 문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단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좁은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미 그 문이 자기 자신임을 내포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설교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진리만이 세상의 넓은 문에 유일하게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협소하고 좁은 문입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각광 받는 패러다임은 모든 종교는 한 신을 향해 가는 여러 가지 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넓은 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타는 법0 스님이라고 있습니다.
그분이 강의를 하고 질문을 받는 데, 한 여성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가 오래 교회를 다니다 이렇게 불교에 입문하려고 하니 왠지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법0 스님 하는 말이 그런 일로 왜 구애를 받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그렇게 째째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교회 다니다 절에 좀 다닌다고 예수님이 뭐라 하시겠냐, 절에 좀 다녀보고 싫으면 다시 교회로 가라, 왔다 갔다 해도 상관없다.
이렇게 답변을 하더군요.
이런 것이 넓은 문입니다.
예수님과 기독교는 세상의 생각과 근본이 다른 오직 하나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바라고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충격이죠.
넓은 문의 가치관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세상가치에선 돈이 제일 높은 권좌에 있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좁은 문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중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중시하지만 예수님은 속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권력을 잡으려하지만 예수님은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을 떠나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만 세상과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 계십니다.
그러니 이 문은 세상에서 보기에 유별나고 괴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포용력이 없는 독불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수 없습니다.
3. 그렇다면 두 문의 상반 된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큰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따라 간 사람들의 종착역은 멸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본성이 원하는 그대로, 이 넓은 세상이 가르치는 대로 살았더니 종국은 파멸이었습니다.
13절을 보면 크고 넓은 문이 그 길로 들어선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멸망으로 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모든 사람에게 들어오라 손짓하는 넓은 문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질질 끌고 간다는 것이죠.
얼마 전 스포츠사기도박사이트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친척과 지인 육십명을 끌어들여 치밀하게 불법 사이트를 운영해 왔더군요.
전 입문하지 않아서 도박의 내막은 잘 모릅니다.
여기 가입한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뜯긴 돈이 1조원이라고 합니다.
이 돈들이 범죄자들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사라졌습니다.
34억이나 되는 거금을 도박과 외제 차와 명품 사는 데 썼다고 합니다.
도박으로 번 돈을 도박에 탕진했다는 게 좀 우습죠?
체포 된 이들은 그래도 돈은 원 없이 써봤다고 했다고 합니다.
조직원들은 큰돈을 벌게 해준다는 주범의 유혹에 끌려 들어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잘 먹고 잘 살 길이라고 평범한 사람들을 끌어 들인 넓은 문이 그들을 어떤 파국으로 끌고 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넓은 문이라고 해서 멸망으로 가는 문이라고 붙어있지는 않습니다.
넓은 문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잘 살 수 있는 문이라고 붙어있습니다.
지혜서인 잠언14장12절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심지어 바르게 보이는 길임에도 끝장에 이르러 보니 사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생의 끝에서 누구나가 만날 것은 하나님의 법정입니다.
한 평생 살아온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서 정산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간의 법정도 준엄한 데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 숨겨진 모든 죄까지 감출 수 없이 공개되는 하나님의 법정이 얼마나 엄정하겠습니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의 생애가 죄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를 평가해서 깨끗하고 오점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본성이 죄를 짓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자기의 본성대로, 인간이 악한 본성이 만들어낸 세속문명에 따라, 평생 죄를 짓고 삽니다.
어찌보면 인간의 평생이 죄 짓는 일입니다.
그 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문을 받고 죄에 따라 형량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의 끝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그 문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끌고 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간 사람들도 악한 인간본성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도 안 믿는 분들처럼 여러 가지 나쁜 생활을 다 끊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왜 그 결말이 다릅니까?
그것은 좁은 문이신 예수님이 그 문으로 들어 온 사람들의 죄를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의 차이는 죄 값을 누가 치르느냐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계산해야 할 죄 값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면 양심에 가책이 있잖아요?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죄의 본성대로 살며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인간의 죄는 결코 용인 될 수가 없습니다.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이를 중재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도록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 내려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해 죄값을 치러주시고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이 좁은 문을 통과해서 내세에 들어간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죄 값이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중 처벌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좁은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왜냐하면 드넓은 세상의 원리와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운신의 폭이 좁고 세상에서 뒤떨어지고 괴로운 고행의 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은 가장 안전한 길이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만큼 평화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가 타고난 본성대로, 그리고 세상에서 눈치껏 배운 대로 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불행한 것 아닙니까?
사랑받으려고만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이용하려고 하면 그냥 이용당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남과 비교해 좀 더 잘되고 남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이잖아요?
예수님은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나보다 나은 점이 있잖아요?
그걸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러니 좁은 길은 즐거운 길이요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좁은 문 밖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였다 할지라도 그 문에 들어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천국을 상속받을 존귀한 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명과 축복의 길로 우리 모두를 이끌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르고 계신 가운데도 여기까지 삶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들은 말씀이 다 이해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며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대개 이런 초청예배에는 위로와 축복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번 오시고 다음에 잘 안 나오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우선 할 말부터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복되고 귀한 진리를 전해드리고자 하는 진심을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두고 이 길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교회는 새가족분들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섬기며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오늘 중요한 결정의 순간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하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10월22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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