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txGSHjjNgCI&feature=youtu.be
<2019년6월9일 설교영상>
여름철이 되니 귀신영화들을 많이 개봉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영화는 보고나면 잔상이 오래 남고 담력이 약해지는 것 같아 나이가 들면서는 잘 안보게 됩니다.
성경에도 귀신들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그 많던 악의 영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디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쫓아내신 귀신은 지금도 어디선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영적 싸움을 모르면 마귀에게 뻿기고 당하며 살게 됩니다.
물론 오늘 얘기가 단지 귀신얘기만은 아닙니다.
잘 아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나오는 본문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을 믿음에 대한 지식도 점검하고 악한 영으로부터 삶의 행복도 지켜가는 비결을 잘 배우게 되시길 바랍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 말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하나님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하신지 삼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때 나사렛에 가보았는데 여전히 가난한 산동네였습니다.
본문을 가운데 두고 앞과 뒤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오늘 사건이 구원과 연관 되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쫒는데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앞 뒤 말씀과 연관해서 보아야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십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얼굴에 광채가 나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셨죠.
그리고 구약성경시대를 대표하는 조상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얘기합니다.
말로만 들었던 영생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영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잖아요?
베드로는 이 신비로움과 황홀감에 빠져 유명한 말을 남기죠.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다 초막 셋을 지어 다같이 살면 좋겠나이다’
천국의 맛을 보니 산 아래 세상은 안중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 권력에 대한 야망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잖아요?
천국의 맛이 그런 것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즐기던 것들이 천국에는 없을 텐데 지루하지 않을지 괜한 걱정을 합니다.
잠깐 예수님의 영화로운 모습을 보고, 천국의 맛을 약간 본 것으로도 제자들이 반했던 걸 보면 장차 우리가 갈 천국이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산 위는 이렇게 황홀한데, 오늘 산 아래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한 아버지가 간질병에 걸리고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거처하는 곳에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라고 합니다.
또 귀신 때문에 아들은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귀신이 한번 들어오면 불에다가 집어 던지고 물속에다 집어던지고 만신창이가 되게 한 뒤 내동댕이치고 나간다고 합니다.
이 이상 참혹하고 불쌍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 이렇게 불쌍할 때 부모의 심정은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전에 희소병인 근이영양증을 앓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산을 오르는 아버지의 사연이 TV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혼자는 바깥활동을 못하는 아들이 산 정상에 올라가 사방 경치 보는 걸 좋아한다고 아들을 업고 산을 오른다는 것입니다.
스무살 먹은 몸무게 50킬로의 아들을 업고 육십은 되 보이는 아버지가 등반을 하는 것입니다.
지적장애까지 있는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업고 산을 올라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잘 모르는지 산에 가자고 졸라댑니다.
이 부자가 그날 879미터 높이의 대둔산 정상에 도전하는 게 나왔습니다.
깍아 지른 비탈길을 아들을 업고 올라가는 데 땀이 범벅이 되고 숨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소개하는 MC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부모는 사선을 넘어갔다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어디선가 예수님을 찾아 온 이 불쌍한 부자의 처지를 듣고 남아있던 아홉명의 제자들이 달려들어 귀신을 쫒았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본문에선 잘 나타나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제자들이 귀신을 못 쫒고 진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모습이 상상이 되죠.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해 지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도 기도해주었는데 병이 낫지 않았을 때, 기도했는데 성도들의 바램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성도들 보기가 참 난처하기 짝이 없거든요.
게다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뒷조사를 하러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제자들과 논쟁이 붙었다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제자들의 실패를 비웃고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이 사기였다고 몰아 세웠을 것입니다.
오늘 일어난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귀신들리고 간질병에 걸려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외아들과 그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사방팔방 찾아다니는 아버지, 그를 고쳐주고 싶지만 역부족인 제자들, 예수님을 비웃고 더 불신하는 서기관들, 주변에서 관전만 하는 구경꾼들.
이것이 산 아래 동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변화산 위에선 천국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내려왔지만 산 아래 동네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산 위의 나라에 속해 있지만 아직 육신은 산 아래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산 아래 동네에서 살았기에 지난 한주도 이런 북새통을 겪었던 것이죠.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 말씀이 사실 오늘 사건의 중심에 있는 메시지입니다.
얼핏 들으면 예수님이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고 좀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처럼 보이죠.
이 말씀은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이런 탄식과 책망은 처음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다니시면서도 백성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질병과 귀신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자주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안타깝고 답답한 탄식과 책망은 창세기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기부터 죄만 짓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을 시작하시잖아요?
‘내가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노라’
태초부터 하나님이여 오신 예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을 참으시며 탄식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14장27절에도 이렇게 탄식하고 계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오늘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것과 똑같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면서 아직까지 참아오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와서 못 참으시겠다는 뜻이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반대입니다.
이제 이 반역과 죄의 문제가 해결될 시점이 드디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절망과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곧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탄식하며 인생의 참담함을 알고 주님 앞으로 나온 사람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자식의 절망을 통해 예수님 앞에 나온 아버지와 아들은 믿음을 얻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심판을 모르고 자만했던 서기관은 끝내 주님 앞에 나오지 않고 돌아가 주님의 십자가를 모의합니다.
방관하던 구경꾼들은 끝까지 구경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오늘 산 아래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광경은 구원의 현장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이 모습이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한 현실의 고통과 내세의 심판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온 줄 믿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 자식을 고쳐주시옵소서.
이렇게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는 모두에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의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2. 그러나 여전히 산 아래 동네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악의 세력을 이기며 평안 중에 살 수 있는지는 예수님의 대답 안에 그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큰 망신을 당한 제자들은 의기소침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19절,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쫒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실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20절,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문제를 돌파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종종 그렇듯이 이 말씀도 따져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만일 너희에게 큰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아니면 아예 ‘너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만일 겨자씨 만큼 작은 믿음만 있었어도 능히 해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는 너희 믿음이 작다고 하고 뒤에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기에 그런 일을 못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대충 넘어가면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내가 주체가 되어서 믿는 내 의지적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처음 예수님이 함께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자고 부르셨을 때, 주님의 진실성을 믿고 자기 선택으로 따른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자기 의지적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믿음이 작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믿음이 크다고 생각했기에 귀신을 상대하려고 했겠죠.
그러나 사람의 의지만으로 믿는 것은 큰 믿음이 될 수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과신했지만 실제로 위험을 느끼는 순간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잖아요?
있다고 생각 했는데 사실은 없었던 것이죠.
그 믿음은 언제든지 변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이 아니기에 마귀도 알아보고 절대 쫒겨 가지 않습니다.
이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 다 자기 생각과 의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이렇게 나온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시고 결정적인 신뢰감을 심어 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당사자가 그런 신뢰감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 내 쪽에서 혼자 생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다는 건 상대가 그런 신뢰감을 줄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잖아요?
한번 신뢰감이 깨지면 다시 믿는 사이가 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신뢰감을 주지 않는 데 인간 쪽에서 강한 믿음을 갖는 것은 맹신이거나 자기신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신뢰하고 믿어지는 믿음은 아무리 미세하다 해도 성분이 다릅니다.
그 안에는 겨자씨가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마귀를 상대할만한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처음엔 우리 생각과 의지로 교회를 나오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이 겨자씨 믿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자 되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철저히 신뢰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믿을거야’ 라는 확고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결단이 따릅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에는 똑같이 믿음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어로는 예수님이 다른 단어를 쓰고 계십니다.
두 가지 믿음을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이죠.
제자들에겐 자기의지적인 믿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 생명의 믿음을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십자가와 부활 이전이잖아요?
그러니까 너희에게 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기에 귀신을 쫒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크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오히려 겨자씨 같은 믿음이 아닐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믿음을 다 가져야 합니다.
3. 그렇다면 생명력이 있는 겨자씨 믿음을 어떻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냐는 것이죠.
우리는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의지적인 믿음만 책임지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만한 믿음이 되려면 먼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열심히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BTS 팬들인 아미들은 열광적으로 BTS 노래를 배우고,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점점 더 열렬한 팬들이 되어 갑니다.
BTS가 이들을 모르지만 이들이 팬이 되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좋아하고 따를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직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았을 때에라도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더 배우고 더 믿기로 계속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공부와 봉사와 말씀대로 살려는 태도를 점점 강화시켜 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실 믿음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믿음을 강화해 나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두 믿음은 동전의 양면같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알아가는 믿음이 더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겨자씨 믿음을 얻는 것도 더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땅히 키워가야 할 의지적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지 겨자씨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망 받고 결국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 눈에 보이는 기적을 수도 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광야생활 중에도 불과 구름기둥으로 털끝하나 상하지 않게 살뜰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매일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이렇게 듣고 배우며 성경의 그 하나님을 마음과 의지를 다해 믿기로 결심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지금 주일성수가, 누군가는 봉사가, 누군가에겐 좀 더 깊이 있는 경건생활을 통해 계속해서 믿음을 키워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책임입니다.
훈련되지 않고 약골인 신앙체질엔 하나님이 큰 믿음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산 아래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귀신이 들어와 아이를 불속에 던지고 물속에 던지고 한바탕 몸을 가지고 휘젓다 집어 던지고 나갔다고 하잖아요?
마귀는 우리 마음을 얼마든지 지옥이 방불토록 들끓어 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가 있으시죠?
지옥 같은 두려움과 고독과 근심으로 짓누르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단지 내 의지로 믿는 작은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생명이 있는 겨자씨 믿음을 받고 우리의 의지적인 믿음도 계속 훈련해 가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강하게 키워가는 데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마가복음에선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쫒지 못했냐 물으실 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이 어떻게 산을 움직이는 큰 역사를 해낼 수 있겠어요?
그것은 아주 작고 연약하기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겨자씨 믿음은 점점 커 보이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드러나지 않게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점점 크게 나타나는 것이죠.
예수님이 보기에 연한 순 같다고 했고, 바울이 성도들의 무시를 당할 만큼 작아 보였잖아요?
겨자씨 같은 믿음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늘 구하기 때문에 악의 세력을 막아내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이 해주시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 내가 할 부분은 지혜와 힘을 주셔서 스스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십니까?
산 아래 동네의 일을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 짊어져야 할 부담, 똑같은 일상에 대한 지루함, 생활에 대한 염려와 걱정, 감정적인 어려움들이 순식간에 마음을 장악하겠죠.
이것들이 몰려오기 전에 산 위,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갈 믿음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죠.
기도하고 일어나면 일단 자신감이 생기고 세상이 만만해 보여집니다.
하루를 담대히 시작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사람을 통해 속이 끓어오르게 하는 마귀의 소행도 눈치 채고 말려들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하루가 평안하죠.
또 큰 문제들, 큰 약점, 큰 질병 같은 것은 큰 시험이 될 요소가 됩니다.
그것으로 마귀가 시험하지 않도록 절대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 하나님이 다뤄주시길 간구한다면 악의 세력과 태산 같은 문제를 능히 돌파하며 평안히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귀신들리고 병든 아들을 고쳐주신 것은 곧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망에 이르는 병과 사탄의 권세에서 풀어주시고 구원하신다는 중요한 메시지라는 걸 살펴보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을 깨닫고 마음을 다해 믿고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영생을 품은 겨자씨 믿음을 반드시 심어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구해 사탄의 세력과 산 아래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넉넉히 이겨나가시길 바랍니다.
요즘 너무 흉악한 범죄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력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복지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생 두 명 중 한명이 우울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타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불안 요인은 정신력을 약하게 하고 약해진 정신력에 마귀가 깃들기 쉽습니다.
최근 정신질환 범죄들이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 강화될 때 정신력도 강해집니다.
또 마귀는 몸이 아플 때 염려와 두려움을 주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병도 주고, 그 병으로 우릴 시험하기도 합니다.
기도하고 잘 치료해서 빨리 회복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매일 악에게서 우리와 자녀들, 가족들을 보호해 주시길 기도하면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말씀대로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비록 산 아래 동네에 살고 있지만 우리 마음과 가정과 삶을 복되게 지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19년6월9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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