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8장18절-27절 (산 아래 하나님의 나라2-제자의 길)

남수연 2020. 12. 4. 23:35

www.youtube.com/watch?v=j9hnT0BPEfA&feature=youtu.be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해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하나님나라를 배웠고, 산 아래에서 어떻게 하나님나라가 실현되는지 보여주는 마태사도의 렌즈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하나님나라는 주님을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백부장이 그랬지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뤄가는 제자에게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나라 성도가 되었다면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성도는 되고, 하나님자녀는 될 수 있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까지 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8장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마태복음에 제자라는 단어가 88번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제자 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제자들과 함께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오늘 제자로서의 나를 잘 점검해 보고 제자의 길을 잘 걷는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는 세상의 제자도와 다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18절 다음에 23절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몰려왔고, 저물 때가 되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되신 것이죠.

이 사이에 두 사람이 끼어들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10장까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제자도를 주로 말씀하십니다.

이 두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하나님나라의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즈음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들이 소문나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18절에서 한 서기관이 주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하죠.

사람들이 왜 누군가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스승의 것을 배워서 스승과 같은 실력과 명성을 얻겠다는 마음이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모든 걸 배워 그대로 숙달되게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생활의 달인을 보면 달인이 된 부모가 자기가 가진 일에 대한 철학과 음식 만드는 노하우를 그대로 자식에게 전수하죠.

자식이라고 봐 주는 것 하나 없이 엄하게 자식을 가르치더군요.

전수받는 자식도 군말 없이 배웁니다.

부모의 노하우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백종원씨의 골목식당만 봐도 양념하나 넣고 빼고 에서 맛이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스승에게 배우는 것입니다.이 서기관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요?

서기관은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필사하는 일을 하던 나름 존경받던 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 백성들이 매우 놀랐다고 마태가 기록하죠.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음이더라

예수님이 서기관들보다 더 잘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주님께 성경을 더 잘 배워 탁월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한마디로 그 사람의 제자도가 하나님나라 제자의 길과 다르다는 걸 말씀해 주십니다.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얼핏 보면 예수님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말하시는 것도 같고 제자가 되겠다는 서기관에게 엉뚱한 답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 일을 통해 무언가 땅의 것을 얻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 여우와 날짐승에게까지도 하나님이 공여하신 보금자리마저 주님께 필수적인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렇게 사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런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죠.

서기관이 뭘 기대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지를 주님이 벌써 아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남들에게 비범하게 인정받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겠다는 게 목적이라면 천국의 제자도는 아닙니다.

주님을 이용하려는 것이죠.

아마도 서기관은 이 말씀을 듣고 희한한 말을 한다며 주님 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이번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코로나로 인한 재정악화 때문에 가지고 있던 여의도알짜 땅을 매각하려 내놓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2012년에 600억에 산 땅이었는데 이번에 매각하면 2000억의 시세차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뭔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길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죠.

어쩌다 교회가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고 그 큰돈을 깔고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도님들이 생각하고 있는 제자의 길은 어떻습니까?

또 주님을 따르고 있던 한 제자가 나와서 부친의 장례 때문에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주님께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죠.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딱 욕먹을 구절이죠.

혈육의 도리마저 무시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은 이 땅의 역사가 끝나는 날 소멸되어 버릴 땅의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관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속한 일입니다.

그 제자의 사명이 너무 긴박하고 한시도 놓치지 말고 따라야 함을 예수님께서 충격적인 답변으로 정신이 버쩍 들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이 땅의 부요와 성공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수시로 확인해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살고, 당장 사는 데 필요한 성공에 마음이 기울기 때문이죠.

우리는 땅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위해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나 목사나 전도자가 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살든, 예수님을 따르며 영생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다 그 복된 길을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러나 그 이전에 제자도에서는 스승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관계를 다소 파격적으로 설정해 주십니다.

10장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스승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의 영역 안에서는 당연히 최고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앙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나와 관계 된 모든 것, 내 삶 전체를 통 털어서 일등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맹점을 아시기에 아버지와 비교하고 자식과 비교해서 그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선택을 해야 할 때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제자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정성을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과 그런 관계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사실 제자의 삶은 어렵습니다.

제자의 길이라는게 세상에 대하여는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10장에서 이웃에 대한 제자도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안되면 이웃에 대한 이 사랑의 제자도를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를 일등으로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의 만족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엔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잖아요?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했던 사람의 사랑에 실망하고, 세상은 다 결핍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이 최고의 만족이 되는 사람만이 인정과 댓가에 집착하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일번으로 사랑하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당하게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죠.

제자의 길은 당연히 예수님이 가신 길,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 길을 배우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일등으로 사랑하며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지, 네가 양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자의 길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직 예수님을 일등으로 알고 따르기로 결정한 제자들이 오늘 주님과 함께 한 배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생업도 버리고, 가족도 이별하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제자의 길에서 내가 과연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하며 따르고 있는지를 잘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르신 배에 함께 탑니다.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3. 마태사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배에 오른 이 모습에서 이 땅의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제자 된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시는 사실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우리와 한 배를 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신 교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위협적인 풍랑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이 땅의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 샷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항해에서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길 원하지만 세상바다에선 누구나 강풍을 만나고 태풍도 만납니다.

우리가 제자로 살아가기에, 오히려 세상사람 보다 더 고충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 속 끓이고 있는 많은 갈등과 고충도 절반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그러나 우리가 제자로 살아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실패는 없고 완전히 망하는 일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태풍은커녕 때로 순풍 중에도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아무런 실패도 없고 실수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주님을 따르려는 것만큼 무거운 짐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담대함은 미끄러졌을 때에라도 예수님께 손을 내밀면 반드시 거기서부터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자신하며 풍랑과 맞서다 죽음의 공포를 마주한 지경까지 가게 되었죠.

그러나 예수님께 구원의 손을 내밀 때 주님께서는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저도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고 잘못된 판단을 했다가 뒤늦게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고충을 겪게 되지만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내 배가 부서져 난파선이 된다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문제의 핸들을 넘겨드리는 순간부터 그 악조건까지도 주님은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는 다 한 때 고장 났고, 한 때 파선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상태에서부터 다시 최선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오늘 제자들은 갈 때까지 간 최악의 상황에서 무엇을 얻었습니까?예수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명령해서 잔잔하게 하시는 경이로운 능력을 보게 된 것이죠.

자연은 인간의 말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풍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태풍의 경로를 쫒기만도 버겁죠.

자연 만물, 피조세계는 오직 창조주의 말씀에만 복종합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까지 갔던 상황을 통해 창조주로서의 주님을 목격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울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론 아직까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부족합니다.

제자들은 급격히 잠잠해진 기이한 바다의 평온을 보며 놀라서 서로 묻습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2) 예수님은 바다만 꾸짖은 게 아니라 믿음이 없는 제자들도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여기서 제자의 길에서의 믿음의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을 통해서 완전해 집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구원을 얻는 통로이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 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은 단지 내 결정이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죠.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구원의 선물로서의 믿음 외에 사람 편에서의 믿음의 분량이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구원받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또 다른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은 구원받을 믿음에 대한 게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 발휘했어야 할 믿음이라는 사고와 의지와 행동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을 통해 배운 메시야에 대한 지식을 갖고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능력과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비범하고 온전하신 인품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홀린 듯이 주님을 좇게 된 게 아니잖아요?

따질 만큼 따지지 않고 모든 걸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겠습니까?

그런데 집채 만한 파도가 위협하는 현실과 감정에 믿음이 압도당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는 배가 침몰해서 다같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겁을 먹은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감정이 앞서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믿음을 앞세워야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믿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환경을 따지고, 감정을 따랐다면 오지 못했을거예요.

성령께선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믿음으로 행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선한 생각을 주셨다는 게 믿어졌다면 핑계거리를 찾지 말고 꿋꿋이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소원을 주시며 우릴 인도하시지만 곧 마음을 뒤집고 믿음을 발휘하지 않을 때가 많죠.

점심 먹고 성경묵상을 잠시 해야겠단 생각을 주셨으면 바꾸지 말고 하셔야 합니다.

저녁에 운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해야 합니다.

자꾸 마음을 바꾸면 결국은 감정과 현실에 끌려 다니는 믿음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환경과 감정에 압도되는 나약한 믿음이 아니라 환경을 격파하는 믿음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가난이든, 진로든, 진학이든, 사람관계든 믿음을 장착했으니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도 그런 측면입니다.

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안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내 죄로 인한 것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느냐로 책망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늘 제자들이 그동안 주님을 따르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만큼 믿음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는 제자가 되기 위해 계속 배워야 한다는 걸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믿음입니다.

배우면 확신이 든다는 뜻이고 확신이 들만큼 배우고 그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해를 위협하는 작은 바람에도 마음이 먼저 위 아래로 요동하고 큰 물결이 눈앞에 일어날 때마다 두려워 공포에 질릴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잘 알고 있고 그 영이 거듭나 하나님을 인지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모습이 골조만 올린 앙상한 집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의 뼈대 위에 근육을 올리고 살이 덮여 튼튼한 강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말씀배우기와 기도하기, 행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실천들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걸 가까이 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것들은 모조리 피해야 할 죄는 아니고 대개는 중립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많이 보고 듣고 소비하다 보면 믿음은 분명히 약화됩니다.

세상의 중독성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일지라도 한동안 일부러 제한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조절하고 절제해서 제자의 자질을 잘 고양해 가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세상 일로 분주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도 숨을 돌리는 대로 즉시 믿음을 작동해 하나님 나라로 복귀하는 영적 복원력을 강하게 훈련하는 것도 제자의 길에서 멀어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본 훼퍼는 현대교회를 십자가와 제자도가 없는 교회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릅니다.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잘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구원받을 영혼들을 위해서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뒤를 따라 주님께 배우고 숙련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에도 반드시 시련과 고통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환난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그 시기에 영적인 깊은 경험과 자산을 이루게 하십니다.

쉽게 가는 것 같은 세상사람들이 부러울지 모르지만 쉽게 가는 인생은 결국 밖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죄에 침몰합니다.

빈약한 영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경건의 도구들로 믿음의 근육을 키우며 환경과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제자로, 군사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