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F0sh6pzvDU
오늘은 종말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올해 우리 믿음의 길을 탄탄히 다지며 달려가고자 합니다.
종말 신앙은 현실도피도 아니고 광신주의 신앙도 아닙니다.
현재를 가장 보람되고 진지하게 살려면 성도들은 종말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에 대한 이야기와 경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열처녀 비유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동안 들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비유는 독특하게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일상을 술술 풀어놓으시는 것 같은 데 중간 중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궁금증을 갖고 메시지에 깊이 다가오게 하시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죠.
분명히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는데 다섯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서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다섯은 없어서 못 들어갑니다.
열 처녀들의 구원을 결정지은 기름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신랑은 뒤늦게 기름을 구해 온 다섯 처녀를 가혹하게 거절했을까요?
비유의 핵심은 이런 부분들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중점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처녀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과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명확히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종교의 관점은 대부분 윤회적 역사관입니다.
사람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잘 안 듭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의 생애가 죽었다 태어나기를 계속 반복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무심코 ‘이번 생애는 틀렸어’란 말을 합니다.
그런 말 속에 그런 막연한 윤회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애가 이 세상에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삶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후에는 영원한 생애가 있는 데 그것은 단 한번 심판의 날에 정해진 그대로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연히 이 세상 끝의 종말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앞에 24장부터 25장까지는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종말은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나 사회적 종말, 개인의 종말, 세상 끝의 종말입니다.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나라가 망해 없어지는 국가적 종말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 때 나라의 주권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고대 남북왕국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했었죠.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엔 헬라제국에 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 이후에는 로마제국에 멸망하는 국가적인 종말을 겪었죠.
종말장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24, 25장의 예수님 말씀은 주후 70년에 겪을 이 전무후무한 이스라엘의 종말을 예언하며 시작하십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라가 망하고 2천년을 세계에 흩어져 살았으니 그런 국가적 종말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예언하시며 세상 끝 인류의 종말을 섞어서 말씀하십니다.
그게 혼선을 일으키지 않도록 골라가며 읽는 게 묘미입니다.
예를 들면 24장 종말 예고 뒤에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종말이 오지 않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 부분은 로마제국에 의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종말을 말씀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국가적,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생을 마감하는 종말이 일어납니다.
전쟁, 테러, 천재지변, 팬데믹, 대형사고 같은 경우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사, 사고사, 병사와 같은 개인적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최후의 세계종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특이할만한 종말은 과거 노아의 홍수 때 있었던 세계적인 종말입니다.
이것은 지구상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종말이 있다는 강력한 예고편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 역사의 종말의 때를 노아 홍수의 때에 견주어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종말로든 결국 이생에서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많은 예언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후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히 살 곳이 결정됩니다.
영생과 영벌, 천국과 지옥, 정반대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기에 우리의 이 믿음은 두려우리만치 막중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지옥엔 예수님의 경고를, 마치 소돔의 멸망을 농담으로 여겼던 롯의 사위와 같이 여긴 사람들의 후회와 한숨이 가득할 것입니다.
2. 열 처녀의 비유는 당연히 우리에게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얻으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때는 유월절 이틀 전입니다.
곧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으시기 직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2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백성과 멸망의 백성을 구분하십니다.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 가려졌던 윤곽이 드러나고 이 둘은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열처녀 비유를 아주 진지하게 듣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읽었다시피 열처녀 중 다섯처녀만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잖아요?
열 처녀 비유는 당시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으로 예수님의 재림, 즉 세상의 종말과 구원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이 지금 우리와는 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해질녁에 하루가 시작된다고 보기에 이 시간에 결혼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싱가폴에서 보니까 거기는 더운 나라기 때문에 결혼식을 주로 저녁에 많이 하더군요.
어둑한 저녁에 식당 가득 하객들이 모여 있어서 좀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풍습 때문에 오늘 열처녀 비유가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 멀리서 신랑이 혼인잔치를 위해서 신부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신랑이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 것이기에 열 처녀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이죠.
그 당시 가로등도 없고 얼마나 오는 길이 깜깜했겠습니까?
그런데 열 처녀들 중에서 미련한 다섯은 여분의 기름이 없이 등불만 들고 나갔고 슬기로운 다섯은 여분의 기름까지 준비해서 나갔습니다.
절반의 처녀들이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은 당시 여러 사정으로 신랑이 오는 시간이 종종 지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결혼식에 신랑이 늦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죠.
과연 신랑은 아주 밤이 깊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던 열 처녀들은 등불을 켜 놓고 졸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신랑이 왔다고 사람들이 외칩니다.
자고 있던 처녀들은 급히 일어나 등불 심지를 다듬고 신랑을 맞으러 갑니다.
그런데 여분의 기름을 준비 못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급히 마을로 기름을 사러 달려갑니다.
그런 사이 신랑이 도착했고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집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힙니다.
기름을 사서 돌아온 처녀들이 닫힌 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립니다.
여기서 갑자기 비유의 베일이 벗겨지며 등장 인물이 바뀝니다.
다섯처녀는 애절하게 문을 두드립니다.
11절,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리고 주님이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12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이 마지막 날의 구원에 대한 비유임이 밝혀지는 것이죠.
3. 그렇다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와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처녀는 어떤 차이로 영생과 영벌에 들어간 것일까요?
이들은 똑같이 신랑을 맞으러 갔고, 등불을 들고 나갔고, 신랑을 기다렸고, 똑같이 졸며 자고 있었습니다.
차이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냐, 아니냐 뿐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여분의 기름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비유를 완벽하게 해석해 주시지 않았지만 잘 묵상해 우리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보통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의 문맥을 살펴보면 열처녀가 다 처음엔 기름이 있었습니다.
또 나중에 미련한 다섯처녀가 가게에서 기름을 사왔다는 것을 보면 성령을 받았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의 기름은 비유의 맥락으로 볼 때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말합니다.
신랑이 늦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면 당연히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죠.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전체를 말합니다.
그 중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신랑을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결과가 보여줍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그것을 이루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최선의 조처를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과 비즈니스가 다른 것입니다.
진심이 없으면 핑계거리가 많지만 마음이 정해지면 백 개의 장애물도 뚫고 가는 것이죠.
어떤 분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신데 어른이 된 딸을 어릴 때 딸로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적 어린이날에 딸이 선물로 레고를 사달라고 했는데, 이 엄마가 손목시계를 사줬다는 거예요.
어린 딸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딸이 어느 날 치매 어머니를 뵈러 가서 ‘엄마, 이번 어린이 날 나 선물 뭐 사 줄거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하는 말이 ‘시계 아니고 레고 사 줄거야’ 그러더랍니다.
그 말에 이 분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렸어도 그 오래전 어린 딸이 속상해 울던 기억은 잊혀지지가 않았던 것이죠.
부모에게 자식은 인생의 목적입니다.
어떤 치매 어머니를 두신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십자가만 보면 헌금하자 그러신다는 거예요.
그 어머니가 예수님을 찐사랑하셨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신랑이 왜 늦게 기름을 사서 황급히 문을 두드리는 다섯 처녀에게 냉정하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겠습니까?
재림하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해서 그때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여전히 내 계산에 의한 비즈니스일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반드시 신랑을 만나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모든 것을 건 성도들을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신앙이 인생의 여러 옵션 중에 하나입니다.
끝까지 갈 지도 모르고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여분의 기름, 그것이 끝까지 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그 여분의 기름 안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마음과 목적이 들어 있는 것이죠.
비즈니스면 내 계산 안에서 따르지만 목적은 그 목적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오늘 비유에서 이상한 점은 신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신부는 언제나 주님의 몸으로 대속하신 우주적인 단 하나의 유니크한 교회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 신부교회를 ‘교회들’이라고 하지 않고 언제나 ‘한 교회’, 단수를 씁니다.
알고 보니 혼인잔치에 들어간 다섯처녀는 정말 신랑을 기다렸던 신부이고 들어가지 못한 다섯처녀는 그야말로 들러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인생의 마지막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 목적이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좁은 믿음의 길로 인도하고 모든 장애를 불사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분명하십니까?
올해도 이 목적을 분명히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4. 이렇게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열처녀 비유의 결론을 내자면 이렇게 말씀하는 게 자연스럽죠.
그러므로 너희는 여분의 기름을 철저히 준비해라.
그런데 너희는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게 좀 어색한 결론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예수님 만날 것을 준비하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은 같다는 뜻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사람들 보기에 더디고 지체된다는 것입니다.
또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죠.
아무도 내 죽음이 임박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다들 살잖아요?
그렇기에 이 세상이 진짜도 아니고 전부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영적인 잠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것은 그러니까 매일 종말적인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 이것은 나와 타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주 짧고 시급하다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올해가 다 가지 않아서 예수님의 재림이 이뤄지면 적어도 지금처럼 살지는 않겠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사역은 신부 된 교회가 전파해야 합니다.
교회가 깨어 각자에게 맡기시는 일을 잘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앞 24장에서도 재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렇게 결론을 주십니다.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절,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과 사명이 있습니다.
먼저는 가족이고, 만나는 사람들이고, 교회이고, 일이겠죠.
내게 주신 이 작은 삶을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할 목적에 맞춰 충성되게 감당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이어서 달란트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건,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열 달란트를 받았건,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대로 무언가 하나님 앞에서 기억 될 것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우리는 천국시민이자 세속나라를 사는 시민이기에 두 가지 삶을 병행해야 하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신앙에만 전념할 수도 없는 것이잖아요?
일도 하고 가정도 돌보고 미래를 준비하고 공부도 하며 살아야 할텐데 어떻게 신앙적으로 깨어서 종말신앙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또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말신앙은 의무 이전에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기쁨과 행복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죠.
종말 신앙은 긴박하고 비장하지만 기쁨과 기대와 행복이 응집 된 신앙인 것입니다.
정신분석가 에릭슨은 사람의 행복감이 충만하려면 ‘일, 놀이, 사랑’이 만족스럽게 균형을 갖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종말 신앙을 지니고 이 세 가지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몇 년 전 구직사이트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직장인들의 88퍼센트가 현재 일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이직을 생각하는 사람도 75퍼센트나 되었습니다.
사람이 건강한 평생을 거의 일로 보내는데 일하는 동안 행복하지 않으니 삶이 팍팍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종말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라면 단지 일이 돈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일터는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우리 주님을 높일 수도 있는 사역지잖아요?
내가 복음을 자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곳이 직장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직장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며 일한다면 기쁘고 만족한 일터가 되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더 좋은 조건의 직장으로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놀이’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과도한 스트레스로 정신에너지의 소모가 많으면 탈진, 번아웃 증상이 일어납니다.
신자들의 멘탈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정서적으로 에너지를 그 이상 채우면 탈진상태로 빠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또 사는 게 큰 문제가 없는 데도 무료하면 정서적 에너지가 저절로 소모된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서도 탈진 같은 증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조금씩이나마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보충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근봄적으로 가장 큰 위로와 힘은 경건생활에 두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한 힘이 받쳐주잖아요?작년에 코로나 상황에 사는 것도 힘들어서 나를 즐겁게 하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운동이든 취미생활이든 작은 여가 활동이든 정서적인 즐거움을 조금씩 찾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가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멋진 자연도 즐기고, 낭만도 느끼며, 스포츠의 뜨거운 함성도 들으며, 아직 세상 속의 사는 나도 위로하고 가꾸는 한 해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되 행복하게 기다리는 걸 주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은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할 요인이 분명합니다.
사랑만 해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예수님은 앞장에서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인터넷기사에서 얼핏 읽은 내용인데 방송인 박미0 씨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대상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남편 이봉0 씨는 아니라는 거예요.
아마도 어떤 연예인 팬이 되어서 덕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겠죠.
결혼생활이 오래 된 사람들은 다 그 마음을 이해하긴 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좋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사람이 사랑해야 할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니 사랑조차도 완전한 행복이 되질 못하는 것이죠.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이지만 그 역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결국 가장 완전한 행복과 기쁨을 주는 사랑은 본성적 애증을 뛰어넘는 성령의 열매로 예수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말신앙의 사랑을, 이어지는 양과 염소의 비유로 전개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종말신앙의 시금석이라시는 것이죠.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런 종말신앙의 사랑이 가정에 충만하기를 축복드립니다.
또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가 더 진한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떠들썩하게 환대하지 않아도 단지 따뜻한 눈인사만으로도 서로를 보듬고 위로해 주는 그런 우리 교회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이 마지막 때 식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깨어있는 종말신앙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반드시 이생의 끝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믿음은 장차 영원히 살 곳인 천국을 열고 들어가는 키입니다.
예수님을 함께 믿고 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그러나 가는 데 까지만 가보자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내 인생의 끝까지 따라가 반드시 구주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을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올 한 해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때때로 나를 위로하는 삶을 즐기고, 사랑도 하는 행복한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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