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Hs-4YKj0efs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자연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험한 것들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죠.
그렇기에 조금만 낯선 장면이 나오면 눈으로 보면서도 못 믿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면에서 현실 세계로 믿는 게 어렵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마지막에 보면 심지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를 하면서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소합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완벽하게 죽음으로 끝납니다.
예수님만 십자가형으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면 이순신 장군은 사람이 아니라 신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나라는 이순신교를 믿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의 묘소는 충남 아산에 있죠.
제가 예루살렘에 가서 주님의 시신을 수습했던 네모난 암반은 보았지만 무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또 주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나의 부활에 대해서도 확신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있었냐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 남들이 보기엔 참 이상할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까지 믿으니 속으로 이상하다 생각하겠죠.
다른 건 다 정상인데 말이죠.
주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고, 반드시 부활하실 수밖에 없었고 부활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대속과 부활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은 깊이 나누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간단히만 생각해도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의 죽음도 대속의 죽음인지 증명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누차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서도 천사가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잖아요?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부활하시겠다는 약속이 불발로 끝났다면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말씀이 과연 맞는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화려한 약속들이 다 공수표가 되는 것이죠.
부활하셨기 때문에 거꾸로,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속죄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신 증거에 대해서는 그동안 부활절마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목격자들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
증인들은 너무 정직합니다.
무덤을 찾은 마리아는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러간 게 아니라 시신을 보러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먼저 천사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습니다.
그 기쁘고도 믿기 힘든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다 예수님을 만나죠.
9절에 보면 예수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안하냐는 인사말을 건네십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잡고 경배합니다.
경배는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죠.
부활하신 예수님은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꼭 집어서 발을 잡고 경배했다고 기록한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혼령을 본 것이 아니냐는 억측을 불식시키려는 것이죠.
시신을 보러 갔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목격자의 진술은 정직해서 더 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주님을 의심했다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죠.
진실이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들조차 결국은 다 부활을 증언하다 순교합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증명하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겠습니까?
2) 교회는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만 교회 밖에서는 당연히 부활을 믿지 않죠.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의 이성과 논리로는 과연 믿을 수 없는 사건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의 진위를 조사했던 한 무신론자 변호사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은 라이오넬경이라는 법조인입니다.
이 사람은 무려 245건의 살인사건을 맡아 승소함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천재 변호사입니다.
아주 작은 단서를 가지고도 집요하게 추적해 진실을 밝혀내는 사람입니다.
이 변호사에게 어떤 사람이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과연 옳은지 당신의 법학 실력을 적용해서 밝혀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입니다.
무신론자였던 라이오넬경은 왠지 관심이 생겨서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포함해 주님의 부활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수년간 샅샅이 조사한 뒤 이렇게 결론을 발표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조사해 본 결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너무 압도적이고,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기에 부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기네스북에 오른 변호사가 부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가 허무맹랑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님을, 사실과 논리로만 판단하는 천재 변호사도 보증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해도 성경의 증언을 통해 부활을 얼마든지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이 부활절마다 들었던 성경의 증거들을 잘 기억하고 부활에 대해 굳게 확신하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왜 믿어야 하는지, 나와 무슨 상관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다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우편 강도가 이렇게 부탁드리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이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사람도 부활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1) 사람이 죽은 다음엔 더 이상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내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갖는 두려움과 불안은 미래를 몰라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점도 보고 사주도 보고 그러는 것이죠.
그보다 더 파고 들어가면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은 죽음 뒤의 미래를 몰라서입니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사람에게는 다 죽음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죽음과 그 이후의 어떤 삶이 있는지 두려운 것이죠.
사람은 자기가 영원불멸의 존재로 지어진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윤회도 지어내고, 불확실한 내세를 위해서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을 쌓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내세와 영원을 인식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실제로 내세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는 것은 어떻게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사는 문제를 위해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죽는 문제를 위해서 믿음이 더 필요한 것이죠.
죽음과 그 이후 내세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면 이 땅의 삶은 저절로 방향성이 잡힙니다.
죽음과 부활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인데 인생은 덤으로 살만해지고 더 잘 살아내게 되는 것이죠.
부활을 믿은 사람들에게서 그게 사실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오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을 찾아온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남자 제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인생 자체가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땅의 자기 인생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었거든요.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때 그 절망과 공허를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죠.
마가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부활을 전하려 갔더니 이 남자들이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칠고 투박한 어부들이 울고 있을 때 그 절망감이 어땠을지가 느껴지죠.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은 뒤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다 목숨까지 내어 놓습니다.
성공에는 무너졌던 제자들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는 굳게 설 수 있습니까?
부활한 몸으로 영생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기에 인간이 전부라고 부여잡는 목숨조차도 내 놓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의 생애를 보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런 성도들의 삶은 영생이 내세에 가야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영생이 시작되었다는 걸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되면 벌써 내 안에 영생이 있음이 희한하게도 믿어집니다.
2)내세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사람의 현재 인생도 소망이 없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보며 더 이상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를 멈출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인간의 탐욕을 누가 멈추게 하겠습니까?
세상은 점점 암흑과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그럴 것을 예고하셨잖아요?
그런 가운데서 현재의 삶도 점점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데도 왜 그렇게 모이는 게 없습니까?
그런데 재난은 정말 한순간에 찾아와 모든 것을 앗아가잖아요?
이 세상이 전부라면 다 우울증에 걸려야 맞을 것입니다.
젊을 때는 헛된 소망일지라도 쫒아갈 힘이라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지금대로 지탱하는 것도 힘겹잖아요?
이젠 없어져 가는 것보다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해답은 지금도, 그리고 내세도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믿음이 내세만 결정하는 게 아니라 현재도 바꿉니다.
지난 주 간증프로에 한 장애인 목사님이 나왔습니다.
청년 때 기계에 팔이 빨려 들어가서 팔꿈치 아래에 장애를 입게 된 분입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비료가게를 차렸는데 석유난로에 기름을 붓다 온 몸 75%에 화상을 입게 됩니다.
화상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치료 도중 넘어져서 대퇴부가 골절되고 영구장애를 입어 목발을 짚고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평생 한 개도 당하지 않을 사고를, 나는 이렇게 다 당해야 하는지 자기 인생을 저주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던 중 화상치료로 입원했던 병원에 일년 동안 계속 심방을 온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에 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장애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게 달라집니다.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는지 장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분이 장애인 목사이다 보니 교도소에서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는, 장애인 입소자들의 교화를 좀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21년간 교도소 사역도 하게 됩니다.
교도소 안에 희망도 없고 할 일도 없다 보니 사람이 변화가 될 수가 없죠.
이 목사님이 화재 때 건강했던 오른 손마저 오그라 들어서 펴지질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되며 그 손으로 필사적으로 성경을 필사를 합니다.
한번 쓰고 나니 한 손가락이 펴지고, 두 번 쓰고 나니 두 손가락이 펴집니다.
그래서 다섯 손가락이 다 펴지는 기적을 체험한 터라, 입소자들에게 성경쓰기를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쓰는 가운데 정말 많은 입소자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고 삶과 죽음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중 어떤 청년이 혼자만 필사를 거부하는 거예요.
이유를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감옥만 들락달락하다 한글을 배우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몰라도 그냥 한자 한자 보고 그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그리다 한글을 다 터득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권유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자격까지 따고 출소했다고 합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감옥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으니 벌써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 현재의 삶도 이전과는 다릅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성도들을 보면 현재를 살아내는 힘이 언제 저렇게 강해졌나 참 감동이 됩니다.
내세의 부활을 점점 더 굳게 믿으십시오.
현재의 모든 어둠도 부활의 생명력으로 이기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영생과 영벌로 나누는 분기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십자가의 죽음이 속죄이고 유일한 구원이라는 게 입증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영생과 영벌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죠.
요한복음3장36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본문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여인들도 몰랐고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분명히 부활을 말씀했지만 제자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무장한 군사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본문 앞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무덤을 좀 지켜야겠다고 합니다.
왜냐고 하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가고 부활했다고 하면 더 큰 소동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제자들은 기억도 못한 말씀을 대제사장들은 떠올렸다는 게 신기하죠.
어쩌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그들이 조금은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 것 같지가 않은 것이죠.
시신의 도난을 대비해 무덤을 지킨다는 것은 그냥 명분일 뿐입니다.
속마음은 도난을 염려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형장에 얼굴도 내밀지 못한 제자들이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을 모르겠습니까?
죽은 시신을 훔쳐다 놓고 부활했다는 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무모한 일을 하겠습니까?
내심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염려했던, 그 부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경비병들도 부활의 증인입니다.
2절에 보면 큰 지진이 나며 천사들이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을 굴려 내고 그 돌문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하죠.
경비병들이 천사를 보았고 무서워 사색이 되었다고 합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죠?
경비병들이 귀가 있는 데 그 말을 못 들었겠습니까?
즉시 성에 들어가 자기가 본 모든 것을 다 대제사장들에게 알리잖아요?
산헤드린 공회가 급히 소집되고 이 기이한 사건에 대해 논의합니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 엄청난 두려움과 불안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의 결과 돈으로 군인들의 입을 막기로 결정합니다.
악인의 결정은 항상 악한 쪽을 선택하죠.
잠든 사이에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훔쳐 갔다고 소문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사실 성직자들이 더 떠벌이고 소문을 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오히려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죠.
대제사장들은 주님이 미리 부활을 예고했다는 걸 들었고, 병사들의 입으로 천사가 전한 부활의 목격담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은폐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천사가 육중한 돌문을 굴리고 빈 무덤을 보라는 장면을 눈앞에서 생생히 보고 들었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오히려 큰 돈을 챙기고 주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가짜 소문을 퍼뜨립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믿고 받아야 할 구원도 가로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사건을 목격하고도 자기 이익을 위해 덮어버린 것이죠.
진실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못 믿겠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서 안 믿는 게 아닐지 모릅니다.
그냥 그걸 믿고 인정함으로, 예수님과 엮이고 싶지가 않은 것이죠.
어떤 분이 신앙생활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편했을 텐데, 옛날이 편했는 데.
그런 말을 하더군요.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실과 거짓 사이에 갈등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잖아요?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영생과 영벌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나 군병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할 것 같습니까?
핑계는 댈지언정,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지옥에서는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진심으로 믿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중에 예수님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과연 나의 구주이심을 오늘 이시간 당장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4.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복음서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 대해서 각기 다른 케이스를 진술합니다.
마태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케이스를 기록한 것이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기다리시겠다고 합니다.
주님이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실 이유가 있으실까요?
갈릴리는 처음 주님의 사역을 시작하며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곳입니다.
갈릴리로 가면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들이 생생히 기억날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던 행복했던 열정과 기쁨도 기억날 것입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눈으로 모든 말씀과 사건을 다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미래와 내세의 복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삶도 복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니 과거의 모든 말씀들이 비로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고 세례를 받게 하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셨던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천 년간 이 복음전도의 바통을 이어 받으며 달려온 증인들의 전도를 통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만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라, 배운 것을 지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 주부터는 예수님이 뭘 가르치셨는지를 다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명령과 함께 주님은 아름다운 약속을 주십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것 같다가도 결국 우리를 떠나잖아요?
어떤 사람도 내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지만 예수님은 평생 우리 곁에 붙어있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부활의 약속을 지키셨듯이, 이 세상과 천국에서까지 반드시 우리 곁을 지켜주실 것을 믿고 항상 예수님을 의식하고 곁에 계신 주님께 기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으시겠습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내세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활의 믿음이 현재의 우리 삶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부단히 기도하며 복된 인생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증인들의 전도를 통해 이 복된 구원을 받았으니 미약하지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이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길 축복드립니다.
저는 요즘 아주 마음이 들뜨는 일이 있습니다.
오래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권했던 교회 이웃들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맛을 조금 보았는데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마음을 품고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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