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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현충일에 우리 국민들 속이 다들 부글부글했습니다.
부산의 한 아파트 창에 걸린 욱일기 사진 때문이었죠.
집주인이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이라는 데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요즘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다 보면 분노 조절이 잘 안될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직접 당한 일도 아님에도 그런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군가는 ‘주님, 그건 안되겠는데요’ 라는 마음이 먼저 들 수도 있죠.
사람의 본성상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억울한 일, 끔찍했던 사건들은 지금도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잖아요?
우리 인생에서 간혹 철천지원수 같은 사람도 만납니다.
재작년인가 가수 송대0씨가 기독교 방송 한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분 아내가 기획 부동산 같은 데 속아서 2백억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개발도 불가능한 땅인데 사기를 당한 것이죠.
대출 이자를 내며 버티다 결국 파산했다고 합니다.
방송에 나온 날 송대0씨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화려한 코발트색 새 정장을 입고 나왔더군요.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서는 데 꼭 새 옷을 입고 나오고 싶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날 동대문 시장에 가서 팔만 원을 주고 그 옷을 샀다고 합니다.
잘 나갈 때 수백 억 무대의상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죠.
내 잘못도 아닌 데 집은 월세로 나 안고, 시장 옷을 사 입기도 힘든 형편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그 사기꾼들이 원수 같고 아내가 원망스럽겠습니까?
이렇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는데도 용서가 될까요?
전세 사기 같은 걸 당하고 그런 사기꾼을 어떻게 용서하겠습니까?
그래도 세월이 많이 지나면 인생에서 남에게 당한 일들은 어쩔 수 없이 포기되고 잊혀지겠죠.
운이 없었다, 악마 같은 인간을 만났었다, 미움도 접을 수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매일 대하는 가족들과 직장 사람들, 친구들이 주는 상처는 더 용서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이, 낫지 않은 상처에 또 독한 말로 소금을 뿌리는 경우도 있잖아요?
미움이나 원한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본이 되시고 가르치신 데로 살아야 합니다.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을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마음으로 길들여 가는 게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명령하시는 용서에 대해 잘 배우고 우리 마음과 사람 관계에 평안이 있길 소망합니다.
1. 용서는 저절로 되지 않기에 주님은 용서하라고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6장에서 주기도문을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죠.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싫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용서하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생각하면 할 수 없이 당하고 참는 게 떠오르잖아요?
그것보다는 힘이 있어서 최소한 당한 만큼은 갚아 주는 게 더 좋죠.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는 원수에 대한 통쾌한 복수잖아요?
구약 당시의 율법에도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합법으로 인정했습니다.
당시로는, 그리고 인간의 본성상 그래도 당한 만큼만 정확히 보응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이 정당한 해결도 하지말고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도 교회 공동체에서 해를 끼친 사람을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죄 지은 사람에게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하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기에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21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게 가능할까요?
주님 말씀에 우리처럼 제자들도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을 것입니다.
말문이 막힌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님이 한가지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2. 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잘 알아들으라고 비유를 들어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이 비유의 시작과 끝을 보면 용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천국은.. 이라고 시작하십니다.
용서가 천국에 속한다는 것이죠.
또 이 비유의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내십니다.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잘 살펴보고 왜 용서해야 하는지,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를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반드시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대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의 크기를 이해시킬 한 종이 등장하죠.
23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여기서 임금이 결산한다는 설정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0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런데 이 종이 엄청난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24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뉴스에서 가끔 수백억 대의 회사돈을 빼돌린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만 달란트는 현대 화폐가치로 계산할 때 6조 정도에 해당합니다.
천문학적 숫자죠.
세기의 이혼이라고 하는 재벌가 이혼소송에서 이번에 뜻밖에 2심 판결이 나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최회장이 재산분할 해 줄 금액이 1조3천8백억입니다.
국내 재계 서열 2위라고 하는 최회장도 감당하기 힘든 돈이라고 합니다.
최회장 전재산을 4조 정도로 추산하는 데, 현금화하려면 주식을 팔아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하고, 최소 2조 이상이 날라 가는 것이죠.
또 가족들에게 상속한 주식도 분할 대상이 되면 더 많은 액수가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최회장이 망했다고들 표현하더군요.
재벌들 사이에서나 오갈 천문학적 돈을 예수님이 비유로 들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물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의 값을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걸리는 것은 내가 죄를 짓는 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감옥에 들어가든, 손가락질을 당하고 살든, 내가 감당할 일이지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냐 반문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속마음이고, 우리 본성 속에도 이런 마음이 남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연히 있게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고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주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기 마음대로 자존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토록 망해 가는 것이죠.
최근 인공지능AI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개발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100년 이내 AI가 인류를 멸망시킬 거라는 경고를 내놓았더군요.
사람들의 편의를 돕도록 만들어진 생성형 AI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만들어진 지능으로 사람을 공격하고 파멸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죠.
선진국들이 뒤질새라 뛰어들고 있는 이 생성형 AI가 지구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인간과 AI 관계만 생각해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창조된 최고의 피조물이 하나님을 삭제해 버리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 세상은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다시 창조의 시작처럼 무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각자 지은 죄를 결산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진술하고 가르칩니다.
2)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종이 6조원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걸림돌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천문학적인 죄를 지었냐는 것이죠.
우리가 매일 죄를 짓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정도로 많고 큰 죄는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내가 그리 큰 죄를 짓고 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값을 너무 크게 매기시는 것 같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옥 심판에 대해서 반발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의 짓는 죄의 양도 만만치 않지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천문학적인 죄는 양보다는 죄질의 문제입니다.
신뢰하고 사랑해야 할 관계에서 그 마음이 변절했다면 상대에게는 계산할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1조3천8백만원의 위자료로 아내가 받은 상처를 씻을 수 있습니까?
자식들이 부모를 무시하고 경멸한다면 부모 재산을 좀 탕진한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
내 자식이 나를 때리고 욕설을 뱉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받을 상처와 아픔이 돈으로 보상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매일, 매순간 그렇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시하며 살잖아요?
하나님과 어긋난 사람은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순복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죄의 값을 주님은 당시에 들어본 적도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 만 달란트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3) 이 빚을 변제 하려면 종은 자기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변제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종은 다 갚을테니 참아 달라고 임금에게 읍소를 합니다.
이 종이 자기의 빚에 대해 사실로 깨닫지 못한다는 게 나타나죠.
그 빚은 자기 능력으로 갚을 수가 없는 규모잖아요?
종을 보면 사기꾼들이 늘 위기상황을 벗어나려 임기응변으로 모면하려는 것 같죠.
그러나 임금은 그런 처지에 빠진 종을 불쌍히 여깁니다.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우리가 내 죄값을 정확히 모른다 해도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다 치르시고 그 댓가로 우리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주님을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것은 주님이 그 죄값을 지금 대신하고 감당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그냥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그만큼 스스로를 희생해야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채권자가 자기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게 용서입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죄값 만달란트, 영원히 하나님께 가지 않는 그 무한대의 죄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3. 비유는 이렇게 행복한 결말로 끝이 아니라 새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며 상황이 급반전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뿐 아니라, 서로에게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종이 자기에게 빚진 사람에게 어떻게 합니까?
돈을 갚으라고 목을 조르고 끌고 가서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가 임금에게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고 그에 감사하는지 검증할 심판대를 만난 것입니다.
6조를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천만원 빚진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느냐로 주님은 우리가 받은 용서를 제대로 알고 감사하는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문제가 중대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봉사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해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전에 아프리카 피그미족 선교를 하는 선교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더군요.
아프리카 원주민이었던 피그미 부족들은 오랜 세월 원시의 방식대로 수렵과 채취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터전이 콩고 국립공원이 되는 바람에 아무 것도 해 먹고 살 수 없는 더 척박한 땅으로 쫒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생산 할 수가 없다 보니 구제를 해도 해도 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젖염소를 사서 마을 사람들에게 주고 키워서 자급자족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갔더니 염소가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잡아 먹어 버린 것입니다.
염소 살 후원금을 구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기가 막혀서 마을 사람들에게 화를 냈더니 용서해 달라, 다시는 안 잡아 먹을테니 염소를 다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마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사는 이 부족민을 더 이상 도와주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던 중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염소를 잡아 먹었던 부족민들의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염소를 잡아 먹을 수밖에 없는 아사 직전까지 갔던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시 젖염소를 사다 주었다고 합니다.
간증하던 당시에 선교사님이 말하길, 지금도 가서 보면 또 염소를 다 잡아먹었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젠 밉지 않고 용서니 뭐니 할 것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려면 서로의 처지를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비유의 말씀처럼 빚지고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누가 남에게 빚지고 못 갚은 채 살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비유의 본 뜻처럼 죄 짓고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데 누가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싶겠습니까?
죄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 죄지을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잖아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너희도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용납하며 살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오늘 용서받은 종은 그에 대한 감사를, 자기에게 빚진 자에게 은혜를 베품으로써 보답해야 했습니다.
이 종이 자기 채무자를 옥에 쳐넣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은 이 악한 종에게 탕감해 준 모든 빚을 다 갚으라고 다시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것을 취소하고 번복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에 적용한다면 하나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가득 차 죄인들과 세리들을 멸시하고 용납하지 않았던 유대교인들에 대한 경고일 것입니다.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면서도 형제의 잘못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강팍한 신자들에 대한 경고이겠죠.
용서는 우리에게도 쉽지 않지만, 이 사실을 늘 인식하고 힘써야 합니다.
지난 주 기독교인문연구원이 갈등과 용서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신자들의 80%가 ‘상황에 따라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만큼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이죠.
그런데 응답자의 63%가 기도가 용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했다 해도 남을 용납하는 게 어렵기에 기도의 힘으로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용서받은 자,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역으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 천국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우리 젊을 때 대학가요제에 나와 ‘해야’라는 노래로 상을 탔던 그룹이 있습니다.
그때 보컬이 조하0씨였습니다.
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속에 분노가 많고 너무 성격이 예민해서 스스로 바리깡으로 머리를 다 밀어 버릴 정도로 점점 불안한 상태가 됩니다.
그 정도로 자기를 학대하며 극단적 선택까지 갈 것 같은 위기에 몰립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가 된 것이죠.
조목사님이 그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폭력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혼자 이북에서 월남한 아버지는 온갖 고생을 하며 가정을 이루고 교육사업까지 한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릴 때 그렇게 심하게 매를 들었다고 합니다.
자식들도 맞고 자라다 보니 형들은 또 동생들을 때리는 게 당연시되고 막내였던 조목사님은 늘 맞는 게 일상이었던 것이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성인이 되어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숨을 못 쉬는 증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기도를 하다가 머리 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십대의 젊은 남자가 검은 색으로 물들인 낡은 군복을 입고 있는 초라한 뒷모습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아버지의 이십대 모습이었습니다.
늘 무섭고 위엄이 가득 찼던 아버지가 아니라 젊은 날의 아버지는 그냥 여린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저 어린 나이에 홀로 세상에서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마음을 다잡으며 살아야했을까.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죠.
그러고 나니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스르르 내려 놓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집에서 런닝머신을 하다 문득 옆에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여보, 나 언제부터 과호흡이 멈췄지?’
‘언제부터인지 호흡이 가쁘지 않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상대를 괴롭게 하기 전에 나를 괴롭힙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인생에서 크게 원수 될만한 사람들이 없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죄인들끼리 살다보면 피치 못하게 서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큼 상처받으신 분이 있을까요?
자신의 형상으로 빚으신 자녀들의 배신.
보내신 아들에게 못질을 하고 피를 쏟으며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손가락질 하는 인간들.
주님이 그렇게 희생하신 뒤,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그 패역한 사람들 위에충만히 임하셨습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미워하던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그 사건, 그 사람, 그리고 어쩌면 바보 같았던 나 자신까지도 용서하지 못하고 주름진 기억 속에 접혀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천국의 자녀가 된 우리 마음에서 그런 것들은 하나씩 털어 버리길 바랍니다.
또 매일 나를 거슬리고 화나게 하는 사람들과 상황들도 조금씩 더 용납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내게 해를 끼치는 일이 있다 해도, 성도들은 그걸로 운명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불안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천국의 평안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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