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1장1절-6절 (실망)

남수연 2024. 7. 16. 22:44

https://www.youtube.com/live/DbHjB2eVIyA

 

오늘 세례자 요한에게서 짙은 실망감이 느껴집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 때 화도 나고 슬퍼지죠.

우리가 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늘 세례요한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 주변엔 하나님을 섬기다 실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우 0신혜씨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목 아래를 사용하지 못하는 전신마비 장애가 있습니다.

본인의 과실로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더군요.

하루 아침에 청년이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내게 된 것이죠.

침이 흘러도 자기 손으로 닦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 부모들의 마음은 또 어땠겠습니까?

사고 당시 어머니가 권사님이었습니다.

아들의 치유를 위해 정말 성도들과 함께 죽어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들의 전신마비 장애가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믿었던 하나님께 대한 실망감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나님께 실망하신 적 있으신가요?

숨겼을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믿어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살면서 삶이 우리를 속이고, 사람들에게 실망할 때가 많지만 그런 것은 잊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실망감이 쌓이면 신앙이 잘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실망과 의혹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삶에서 실망의 문제를 잘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먼저 세례자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서로 친척 사이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6개월 먼저 세례요한을 잉태합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놀라운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1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제사장입니다.

사가랴도 자기 아들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신앙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죠.

세례요한은 어려서부터 광야로 나가 선지자의 훈련을 받습니다.

마태복음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요한의 사역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전파하며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공생애를 막 시작하려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죠.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예수님께 임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합니다.

요한복음133절에서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리고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랬던 세례요한이, 지금 예수님께 메시야가 맞으시냐 답을 달라고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2. 왜 세례요한은 그렇게 확신했던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신앙의 실망과 낙담은 깊이 다루어야 할 문제지만 오늘은 말씀 안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2절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립니까?

환경이 너무 힘들고 시련이 계속되면 우리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는 일이 잘 되고 큰 어려움이 없을 때는 실망할 일도 없고, 갑자기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서서히 믿음에서 멀어질 수는 있죠.

퇴로가 보이지 않는 꽉 막힌 환경에 갇히게 되면 처음엔 어떻게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쉽게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 실망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게 사실인가 의심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없다는 불신앙으로 가기도 합니다.

황신혜씨 어머니 권사님이 여기까지 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삶에서 이런 문제는 작은 소용돌이처럼 계속 일어납니다.

지금 요한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역을 잘 하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아 왕비로 삼았습니다.

요한은 왕이 그런 악을 저지른 것에 대해 맹렬히 질책하다 옥에 갇힌 것입니다.

아무리 빈 들에서 단련된 요한이라 할지라도 감옥은 다릅니다.

사람이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얼마나 숨통을 조입니까?

요한같이 넓은 광야를 거침없이 다니며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감옥이라는 환경이 더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쓰지 않으시는 것 같은 섭섭함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 감옥에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요한의 확신마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요즘 괴물 보컬이다, 또 유현진 선수를 괴물 투수다, 김성근감독처럼 야구의 신 야신이다, 그런 말들을 하죠.

신앙에는 괴물도 신적인 성도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그걸 보여주는 것이죠.

큰 시련을 당한 사람에게 시련보다 큰 믿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환난 날에 우리 믿음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믿음보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입니다.

바울사도는 숱한 고난을 당하며 감옥에 여러 번 갇히며 비교가 불가한 희생적 선교 일생을 보냅니다.

바울에겐 우리와 뭔가 다른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죠.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약했던 자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 노라

서신서에 드러난 바울은 결코 괴물도 신앙의 신도 아닙니다.

몇 년 전 북한 선교사역을 하다 삼 년 감옥에 갇혔던 임현0목사님이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임현0목사님은 국적이 캐나다인이라 북한을 드나들 수가 있었습니다.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고 주민들을 위한 구제사업을 18년이나 해 왔던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이 북한에 들었다가 갑자기 체포된 것입니다.

김정은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무기노동교화형을 받게 됩니다.

평생 감옥에서 일하다 죽으라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임목사님의 억울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죠.

또 평생 예수님을 위해 살았는데, 북한 감옥에서 죽겠다는 생각에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나를 이 감옥에서 꺼내주실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무기력한 환경에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가운데 메시야로 믿고 기대했던 예수님에 대한 의혹까지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실망과 두려움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답을 찾아 보자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망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외에 다른 무슨 답이 있겠습니까?

임목사님도 칠흑 같은 감옥에 들어간 첫날, 생각한 건 하나였다고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실망과 의혹이 집어 삼키려 할 때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임목사님처럼 여전히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감옥생활이 얼마나 갈지 멀리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임목사님은 내일도 아니라 오직 하루를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그걸 권장하셨잖아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지난 주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섰던 사람을 구해낸 새내기 순경의 이야기입니다.

노량진지구대로 동생이 연락이 안된다는 급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내를 급성 백혈병으로 떠나보내고 장례를 마친 30대 남동생이 의미심장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자택과 인근 건물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중 홍유0순경은 공사 중인 28층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난간을 넘어가 위태하게 서 있는 실종자를 발견합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거부하는 남성에게 홍순경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시킵니다.

힘들었던 자기의 경찰준비생 시절 얘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하고 무엇이 하고 싶었냐, 아내가 좋아하던 음식이 무엇이냐.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홍순경이 말했습니다.

아내에 대해 그런 모든 것을 기억해 줄 사람은 남편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남성은 울면서 난간에서 내려 왔습니다.

홍순경은 남성에게 오늘 하루만 살아보자.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

이렇게 다독였습니다.

저는 홍순경이 크리스천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실망하면 실망하는 대로 계속 예수님을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오늘 하루를 이길 힘을 주시며 우리의 긴 인생 여정을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의 실망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 때문입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확신이 들었다면 제자들을 보내지 않았겠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그리스도인 줄 알았을 때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마태복음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2,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메시야가 오셨으니, 너희들 이제 다 죽었어.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즉시 악인들은 심판 하시고 의인들이 사는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이죠.

지금 요한도 그렇지만 구약의 선지자들은 거의 다 왕을 상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궁 근처도 안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헤롯왕을 최초로 본 때는 마지막에 체포되셨을 때입니다.

빌라도가 재판하기 곤란한 걸 알고, 헤롯에게 재판하라고 주님을 잠깐 보냈었죠.

그때 헤롯이 소문만 듣던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납니다.

예수님은 거의 변두리인 갈릴리를 중심으로 주변 마을에서 사역하셨죠.

그것도 아무 힘 없는 병자들, 가난한 자들, 세리, 죄인들을 몰고 다니셨습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이런 소식을 듣고 있자니 의혹의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이죠.

예수님의 행보가 자기 생각과 다르자 요한은 실망했던 것입니다.

 

3) 그렇기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질문의 예스나 노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합니다.

4,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셨지만 요한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내가 그리스도가 맞다는 답만 주시면 됐을까요?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이 다른 요한에게는 답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다른 식의 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5절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 예언해 놓은, 장차 세상에 오실 구세주를 알아 볼 암호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병자들이 구원받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신 이유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렸기에 이미 심판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의 은헤와 복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이 영벌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은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원 역사의 최후에 있을 심판을 성급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6절에서 이렇게 주의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안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는 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르는 사람 중에서 실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세례요한과 같은 실족입니다.

내가 머리 속에 생각하는 하나님, 내게 이렇게 해 줘야 한다는 기대감, 그런 것들을 정해 놓으면 실족하게 됩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했듯이 성경과 믿음생활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잘 알아가는 게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사는 성도들은 시각장애인처럼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아침에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도자나 인도견이 데려가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데 좌로 가라, 우로 가라 지시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모든 과정과 결과는 철저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잘 배우고 이렇게 신뢰함으로, 믿음에서 실족하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저는 이번에 왜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깊은 절망의 감옥에 보내셨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큰 실망의 시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세례요한 같은 의인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9절에서 세례요한이 위대한 선지자라는 걸 인정하시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성령에 충만했고, 거룩을 위해 광야를 선택했고,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자기를 지킨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감옥에서의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임현수목사님은 고등학교때 부터 헌신해서 평생을 선교와 목회를 했던 분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겠습니까?

그런데 북한 감옥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평생 교만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딱히 교만할 조건들도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감옥에 있다 보니 자기가 얼마나 교만한지, 탐욕이 많은지, 음란한지 그런 걸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북한에서의 수감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세례요한도 죄인 중의 괴수잖아요?

우리 성도들은 남과 비교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면 그냥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이 자기 죄를 지고 가신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사실 요한은 감옥에 갇히기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배로 따지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다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끝까지 자기 사역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유대교의 금식과 정결 의식 같은 것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은 뒤로도 그 교훈을 따르는 공동체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이게 잘한 일일까요?

세례요한도 어쩔 수 없이 구약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율법, 할례, 성전, 안식일, 이런 것들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 구약시대 믿음입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이 전해주는 주님 말씀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지 않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구원한다는 것이죠.

요한은 일년 정도 투옥된 뒤 결국 헤롯왕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믿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실망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기대와 생각들은 바른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외면당하는 실망 속에서 오히려 바른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큰 실망의 사건이라면 더 깊은 예수님과의 관계 속으로 인도하시는 더 큰 복이 될 것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느 날은 사는 게 찬란하고 감사하고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곧 믿음이 흔들리고 바닥까지 곤두박질 하는 순간도 옵니다.

하나님께 실망감도 들고 의심도 듭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삶이 내가 디자인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내 길을 막으실까,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신 적이 없네.

그러나 그래도 지나고 나면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괜찮네. 이것도 살만하네.

하나님이 우리를 실망 시키셨다면 다른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0신혜씨 동생은 전신마비가 된 뒤 선배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구족화가가 되어 그런 삶에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하고 떠난 어머니 권사님은 아직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의 감옥에서 자기의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인간관계의 감옥, 질병의 감옥, 금전의 감옥, 환경의 감옥에서 하나님께 실망감이 들 때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믿고 복을 받도록 우리 환경을 조성해 인도하십니다.

그 환경은 불편함입니다.

불편함 속에서 실망도 하고 나를 뒤돌아 보고 그러면서 주님을 더 알아가고 또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견고한 성도들도 감정은 종종 흔들립니다.

다만 그렇게 실망감이 찾아오는 순간,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우리 눈을 나와 환경과 사람에게서 돌이켜 예수님을 바라보며 힘을 얻고 천국 소망을 향해 달려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