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포도원 품꾼 비유 (마태복음20장1절-16절)

남수연 2024. 7. 31. 16:51

https://www.youtube.com/live/qcHLPz8ogHI

 

많은 시간 일하면 돈을 많이 받고, 적게 일하면 적게 받는 것이 노동시장의 원칙입니다.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가 병든 것이죠.

예수님 당시라고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비유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포도원 주인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십중팔구 사람들은 이 비유를 들을 때 불공평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새벽부터 일한 사람이 불쌍하다고 했겠죠.

이 비유는 천국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는 이만큼 다르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온 계기는 앞에 나온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께 일생을 걸고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공을 들였다면 당연히 댓가를 기대하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천국을 위해 일하고, 세상의 보상으로 돌려받길 바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댓가를 세상의 복으로 되돌려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죠.

오늘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일과 보상이 세상과 다른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 수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과 천국을 잘 이해하고 배워서 천국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기 위해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쓰는 주인의 비유를 설정하셨습니다.

비유 속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천국을 엿볼 수 있게 하신 것이죠.

천국의 자녀 된 우리에게도 이미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같은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천국에 여러 측면이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 천국이 일하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1) 천국은 그 나라를 위한 일군을 데려다 일하게 하는 곳이라는 것이죠.

모든 인생은 세상에서 일하며 살아가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일하지 않으면 사람이 무기력해집니다.

에덴동산이라고 무노동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을 돌보고 경작하라고 하셨죠.

하나님도 예외는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천국 시민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전엔 포도원 밖의 일을 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나라의 일은 교회와 관련된 봉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내 가정과 직업과 일이 곧 주님의 포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포도원이고, 세상 직장은 사장의 포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시는 것이죠.

성도들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겐가 고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고용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마귀에게 고용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이 이 사실을 예리하게 밝혀 놓으셨습니다.

로마서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에게 고용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고용되어 의에 이르든지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때로 우리가 보상 없이 봉사만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질문에 분명히 받을 보상을 보장하셨습니다.

비유에서 일꾼들이 주인에게 약속받은 돈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로마의 군인들이 하루 받는 급료가 한 데나리온입니다.

보통 네 명 가족이 먹을 하루 식료품을 살 수 있는 돈입니다.

요즘도 하루 일당이면 가족과 하루 먹고 살 정도인 걸 생각하면, 이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 살림살이가 영 나아지질 않았네요.

인력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소작농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당일 일을 못 하면 식구들을 굶겨야 합니다.

하루 일당을 못 받으면 굶는다는 게 지금 우리 생활 수준에서는 잘 실감이 안 날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쌀독에 쌀이 떨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월드비전 영상 중에 고아가 된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비참하게 살아가는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유튜브 보다 보면 종종 보게 되죠.

거기 보면 아이들이 돈 벌 방법이 없으니 채석장에 가서 돌을 가져다 잘게 깨뜨립니다.

시멘트 반죽에 섞으려고 이 돌을 사 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죽은 뒤 두 동생을 데리고 사는 여덟 살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돌가루가 눈에 튀어가며 종일 깬 한 바구니의 돌을 들고 트럭 앞으로 왔지만 어른들에게 떠밀려 그날도 돌을 팔지 못합니다.

이걸 팔지 못하면 오늘도 굶어야 한다며 여자아이가 서럽게 웁니다.

절망과 분노가 섞인 아이의 울음소리가 숨이 넘어갈 듯 합니다.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는 풀을 뜯어 끓인 풀죽으로 동생들과 굶주린 한 끼를 때우더군요.

21세기에 지구 어디에선 이것이 일상이라는 게 이해가 안되죠.

예수님 당시에 가난은 서민들의 일상이었습니다.

품꾼으로 뽑혀가야 일당을 받고 쌀 한 봉지를 사 갈 수 있는 것이죠.

주인이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모든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준 이유입니다.

세상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지만, 하나님의 포도원에선 우리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십니다.

한 데나리온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보장하시는 삶에 대한 약속,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또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만을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삶은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충족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면서 느끼지 않습니까?

욕심을 거둬내면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딱 알맞은 것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긴 인생 중에는 그것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극한 시절도 지납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우리에게 생존력을 주셔서 반드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심을 성도들은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일군을 고용하는 포도원 주인의 행동이 수상쩍습니다.

1) 포도원 주인은 종일 장터를 들락거립니다.

한번에 필요한 사람들을 다 데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미스테리죠.

제일 먼저 새벽,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 마지막으로 제십일시입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하면 새벽 6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이 끝나는 저녁까지 주인이 계속 인력시장에 나가서 품꾼들을 불러 들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을 정리해야 할 시간인 업무 1시간 전에도 품꾼을 데리고 옵니다.

주인이 참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죠.

주인은 왜 이렇게 여러 번 시장에 가서 품꾼들을 불러 들였을까요?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밝혀질 것입니다.

 

2) 이 비유의 갈등은 하루 일당을 정산할 때 터집니다.

이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하니

9,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지막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들에게 먼저 일당을 정산해 주었다는 것이죠.

대개는 먼저 온 사람들부터 주는 게 정상이잖아요?

예수님이 뭔가를 밝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런 설정을 하신 것입니다.

1시간 일한 사람이 제일 먼저 품삯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내년 최저 시급이 만삼십 원이라고 합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품꾼은 겨우 한 시간 일했으니 시급 만원을 받아야 정상입니다.

그걸로는 가족들의 끼니를 해결할 수 없잖아요?

한 데나리온을 받고 품꾼의 근심은 기쁨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뒤늦게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위한 봉사나 헌신이 부족하다 해서 적은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포도원 주인이 그랬듯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영혼의 필요나 육체의 필요나 하나님은 살아갈 수 있는 양을 주십니다.

그런데 비유의 상황은 점점 긴장감을 불러옵니다.

1시간 일한 사람이 하루치 품삯을 다 받는 것을 보고 먼저 온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더 많은 돈을 기대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받은 돈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2절에서 주인과 약속했던 일당은 원래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불만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 사람들이 이렇게 원망합니다.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이것이 하나님의 공정이라는 것입니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세상은 사람의 가진 조건이나 출발점을 보지 않고 결과만을 따지며 그것을 공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정과 정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력시장에 나온 사람들은 출발점이 불리한 사람들이잖아요?

특히 마지막 시간까지 뽑혀가지 못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힘이 약하거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정부에서 내놓은 상속세 개편안으로 서민들 마음이 불편합니다.

서민들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신분 사다리가 존재했다지만 지금은 그런 사다리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도 아니고, 이제는 타고난 가정환경이 곧 자기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러고도 세상은 부유한 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모르긴 해도 세수 부족은 당연히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던 혜택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살아가니 천국의 공정성을 배우고 지켜야 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인생의 출발선, 개인차를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또 일찍 온 품꾼들이 왜 우리에게 적게 주냐고 하지는 못합니다.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했으니까요.

왜 적게 일한 저 사람들을 나와 똑같이 대접하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나를 차별화시켜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해외 이주민 노동자들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시급을 적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외에 가서 일하는 데 똑같이 일하고 본국 사람보다 적게 받는다면 부당하다고 생각하겠죠.

예수님의 비유는 유대인들에겐 직격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천 년 동안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역한 민족입니다.

어쨌든지 그들은 긴 역사 동안 수고하고 더위를 견디며 이방인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구원이 자기들에게만 주어진 독점적인 혜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이방나라가 단지 복음을 믿고 쉽게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죠.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실망과 배신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우리의 본성도 부족해 보이는 남들이 나처럼 대우받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우리 마음을 다시 하나님나라의 공정과 사랑으로 길들이게 되길 축복합니다.

 

3. 마지막으로 이 비유 말씀에서 가장 궁금증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처음부터 수고한 사람들에 대해 왜 주인은 오히려 냉정하게 대하는 걸까요?

13,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종일 땡볕에서 포도원을 가꾼 일꾼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주인인 것 같죠.

품꾼들은 포도원 주인이 내 수고를 인정하지 않는데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하신 이유를 헤아려야 이 문제가 풀립니다.

처음부터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분명히 이 날 포도원에서 일한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건장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보다 더 받은 은혜 아닙니까?

일찍이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 그럴만한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각각 적당한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그런데 일찍 헌신하는 사람들은 대개 믿음의 은사를 먼저 받습니다.

이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믿어지니까 희생하고 헌신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참 많이 수고하며 평생을 삽니다.

그들이 받을 보상은 뒤에 온 사람들보다 돈을 더 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나라는 모두가 만족할 만큼의 복을 똑같이 받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일찍부터 땀 흘리고 고생하는 성도들이 받을 보상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받을 보상은 예수님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봉사할 수 있고, 해드릴 수 있다는 기쁨입니다.

그런 분들은 뭔가 더 수고하고, 더 섬기고, 더 드리고 나면, 더 기뻐집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성령충만해야 그 힘을 발휘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사람 본성대로 결국 본전을 계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밥그릇 내가 챙겨야지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처럼 헌신한 일군들의 그런 상태를 경계시키시는 것입니다.

방금 베드로가 그런 불안감에 질문을 한 것이잖아요?

포도원주인이 가장 먼저 와서 수고했던 사람들을 위로하지도 않고 네 것이나 가지고 그냥 가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용을 하자면 남과 다른 나의 수고와 희생이 스스로를 더 대접받을 자리에 올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처음 주인에게 선택될 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처럼 실업률이 높은 사회에서 오늘 하루는 됐구나, 감사하며 포도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원한 저녁에 들어와 적게 일한 사람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자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챙기려는 공치사, 공로주의가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나라를 섬긴다면 종일 수고만 하고 기쁨도 없이 결국 받은 것은 기본급여 뿐인 것이죠.

그랬다가는, 그 믿음이 탁월했지만 나중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다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길 우리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 은혜를 잘 감당하고 끝가지 잘 헌신하려면 기도생활과 성령충만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처음 은혜받을 때는 성령께서 강한 은사와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연수가 많아지면 스스로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구하여 믿음을 충전하게 하신다는 걸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왜 포도원 주인이 여러 차례 시장을 들락거리며 일꾼들을 불러 왔냐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도 아침부터 계속 나와 있던 사람일 거잖아요?

처음부터 다 데려가지 않고 왜 늦게 불러갔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대충 꿰어 맞추시는 법이 없습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 포도원에 들어 온 사람일수록 남들에 비해 일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길,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었다고 말하잖아요?

만일 이들을 일찍부터 포도원에 데려다 놓았다면 일도 제대로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총만 받지 않았겠습니까?

주인은 15절에서 내가 선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녀들을 세심히 돌보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인생이 더 혹독합니다.

생계가 어려워 일하느라 주일예배에 나오지 못할 정도인 분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그런 상황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좀 더 완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거기에 맞춰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성도들의 믿음도 귀하고 한 데나리온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성도들은 이제 일할 시간이 한 시간 밖에 없는 데, 그때까지 놀고 있는 나를 불러주시고 생명과 삶을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누가 봐도 공친 날인데, 다 저녁에 자기를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냈으니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겠습니까?

조혜0씨 어머니가 77세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53년 동안 다른 종교를 열렬하게 믿었던 분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피부에 스치는 것도 혐오했던 분입니다.

지금 83세인데, 믿은 지 6년만에 성경을 62번 읽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이 읽냐고 했더니 너무 늦게 하나님을 믿었는데, 주님 앞에 갈 날이 얼마나 남았냐는 것입니다.

다른 건 할 수 없어도 성경 읽고 기도하다 하나님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100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얼굴에는 노인의 우울감과 무기력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읽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마지막 1시간 전에 부름 받은 성도들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모두 구원의 역사의 해가 저무는 가장 선선한 시간에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또 생각해 보면 좋은 날을 다 보내고 인생의 궁지에 몰려 위태로울 때 주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노력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늘 감사하며 섬기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선하신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포도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먼저 부름받고 믿음의 은사를 받은 분들은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 같은 게 뭐라고 저도 처음 교회 가자마자 믿음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갈등 없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 덕에 인생의 큰 광야도 잘 건너오기도 했구요.

늦게 부름 받은 성도들은 평생 세상 살기에 급급했는데 나를 지켜 보시다 적시에 포도원에 불러주시니 또 얼마나 감사합니까?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각자 불려온 시간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면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비유 말씀은 사람들의 본성에 새겨진 공로주의, 비교의식, 우월감, 공치사, 피해의식 같은 게 질긴 잡초처럼 뒤엉켜 믿음의 걸음을 가로막는 걸 경계하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걱정하는 베드로에게 이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실 보상은 천국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예수님을 위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