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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가 잘 모르는 독설가 같은 면이 있으셨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죠.
복음서에서 사실 주님은 자주 꾸짖으십니다.
사람들은 꾸짖는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죠.
그래서 강단에서는 공의의 하나님보다는 주로 사랑의 하나님을 설교하게 되는 것이겠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상반되는 게 아니라 같은 성품이십니다.
죄에 관대한 것이 진짜 사랑은 아니죠.
오늘의 관건은 주님의 차가워 보이는 행동과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는 것이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나라의 미래세대가 문해력이 너무 없어져 큰 걱정이라는 기사가 났었죠.
‘사생대회’를 ‘죽기 살기 대회’라고 한다거나 ‘조짐이 있다’는 말을 ‘조진다’ 그렇게들 이해한다고 합니다.
휴대폰, SNS가 어떤 세대를 만들어 갈지 걱정입니다.
요즘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문해력이 얼마나 될까요?
읽어도 잘 모르겠다는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면 오해가 생기고 믿음에 쓴 뿌리가 되기가 쉽습니다.
오늘 말씀의 뜻을 잘 살펴보고, 바르게 알고, 말씀의 깊은 은혜를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에도 있는데 두 본문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늘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1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앞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유대교의 전통을 놓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벗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가셨다, 들어가셨다라는 것은 그냥 왔다 갔다 하셨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을 여셨다, 닫으셨다 하면 단순히 문을 열고 닫은 문제가 아니죠.
그것처럼 구원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분위기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이방인에 구원의 문을 여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밖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겠습니까?
여기서 귀신을 쫒아내신 것은 신들린 듯 홀려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암시하시는 것이죠.
주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부르짖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여인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개무시 하던 이방인인 것이죠.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 성도들이 오자 피한 것에 대해 바울사도가 베드로가 외식했다고 비판하죠.
밥도 같이 먹으면 안될 정도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여인이 예수님 일행이 계신 집을 찾아와 부르짖는 것입니다.
22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사람이 제일 상처 되는 게 자존심 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존심 자꾸 긁으면 원수되죠.
이 여인이 자기 민족을 무시하는 남자들 속에 들어가 도와달라 소리치는 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것도 딸이 귀신 들렸다는 걸 공개적으로 말하면서요.
그런 얘기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잖아요?
자식을 위해선 데 부모가 무엇인들 꺼리겠습니까?
기독교 영상과 음악을 제작하는 사역을 하는 한연0 목사님 딸에게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여름성경학교 사역을 마치고 교사들과 카페에서 평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딸을 맡길 곳이 없어서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딸이 카페 주인이 기르던 개에게 물린 거예요.
목줄이 묶여 있었지만 몸집이 큰 풍산개다 보니 가까이 간 아이를 그냥 덮쳐 버린 것이죠.
돌아와 보니 개가 아이 귀를 삼분의 이나 찢어 놓았고 이빨로 쇄골 아래를 물어 뜯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달려와 떼어내고 보니 속살이 휜히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데려가니 소독액을 아이 몸에 통째로 들이 붓는데 아이는 죽는다고 소리 지르며 웁니다.
엄마의 입에서는 덜덜 떨면서 이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늘 여인도 똑같은 심정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죠.
딸의 고통이 내 고통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딸의 고통이 내 잘못 같기에 자책하는 심정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 내 잘못 같죠.
마가복음을 보면 여인의 딸을 ‘어린 딸’이라고 합니다.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니 그 비참함을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실화이든 영화이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 무서운 것은 사람이 귀신 같아지기 때문이죠.
흉악한 악령이 조종하니 예뻤던 딸의 모습은 점점 해괴한 몰골이 되어갔을 것입니다.
아이 엄마가 무슨 짓은 안 해 보았을까요.
그즈음에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구원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죠.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부르는 호칭인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을 부르잖아요?
여호수아 때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간 두 정탐군을 숨겨 주었던 라합이 있죠.
여관 주인인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민족에게 가나안땅을 주실 거라는 소문을 손님들에게서 들었잖아요?
이 가나안 여인도 이스라엘과 인접한 두로 지방에 살면서 오가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신다는 메시야에 대해 알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자기 마을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우연일까요?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셔서 다른 무슨 일을 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여인만 만나고 그냥 돌아오십니다.
주님은 이미 여인의 간절한 믿음을 아셨고 그 믿음에 응답하기 위해서 찾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눈은 사람의 믿음에 이끌리십니다.
어떤 절망 중에도 믿음을 갖고 주님을 구한다면 주님은 우리 믿음에 이끌려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세 단계로 이어집니다.
2. 처음엔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다 경험해 보셔서 어떤 기분인지 아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의 부르짖음에 못 본 척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체면도 없이 간절히 주님을 부르던 여인이 얼마나 민망하고 초조해 속이 탔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지 않는 성도는 없죠.
성도의 믿음의 인생은 이 하나님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침묵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르죠.
하나님의 침묵은 당사자들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대답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믿음의 실상,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 극단적인 마음, 교만과 각종 죄, 내가 생명줄처럼 의지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이런 것들을 주님은 침묵 속에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하나님의 침묵은 없습니다.
침묵의 시간은 하나님과 그 성도와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죠.
도대체 왜 저 사람이 오랫동안 저런 고난을 당하는지, 왜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남들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무언의 소리를 우리 영에 들려주십니다.
아무 소리도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은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그 시간들을 견디고 마침내 응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그 신실하심을 믿고 끝까지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즉각적인 기적은 복음이 막 전파되던 복음서와 사도행전엔 흔하죠.
그러나 서신서에는 기적이 보이지 않고 성도들의 자연적인 일상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선 바울의 앞치마만 갖다 얹어도 병이 나았죠.
그러나 서신서에는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약으로 좀 써보라는 바울사도의 걱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변함없이 꾸준히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러면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로부터 생수가 흘러 우리 영과 육을 적시는 은혜 안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겐 단지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찮고 성가셨을 뿐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이 남들에겐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왜 여인의 우는 소리를 계속 듣고만 계시냐며 제자들은 주님을 나무랍니다.
계속 우는 소리하면 사람들이 실증 냅니다.
우리의 매일의 하소연과 우는 소리를 계속 듣고 계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3. 드디어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24절,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주님이 반응을 보이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더욱 절망적인 상황일까요?
이 말씀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원의 순서에 대한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대로 진행됩니다.
성경은 복음의 혜택은 먼저 유대인이고 그다음 모든 나라라고 알려주십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대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셨고 그 외의 모든 민족은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스라엘로 말하자면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첫 백성으로 삼으신 민족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의 역사를 이스라엘 역사로 보여주셨고 죄를 씻을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로 구원의 교과서를 기록하신 것이죠.
세상 모든 민족들이 제 소견대로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된 영광을 얻었지만 한편 죄인의 상태로는 지키기 버거운 율법을 받았습니다.
결국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의 치부를 다 드러내 보이게 된 것이죠.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죄를 방임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죄는 혹독히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죄와 구원과 심판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을 성경 기록에 이용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진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천년 역사 동안 그들과 지지고 볶고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이스라엘에 제일 먼저 주고 싶으신 게 당연한 것이죠.
2) 그러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을 다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을 거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모든 나라 사람들을 다 구원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모든 시대, 모든 나라 중에서 잃어버린 자기의 양을 찾아 구원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려두시냐고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인간 모두를 다 구원하시면 공평하실까요?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더니 김정은도 구원받고 푸틴도 구원받고 15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김춘재도 구원받고, 그래야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인가요?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에 따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공평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아들을 대신 심판하시고 그 지은 죄를 용서할 사람을 주권적으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택하신 자, 잃어버린 자였기에 주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신 것이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지복입니다.
이것을 늘 감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리고 이 말씀에 유대인을 향해 드러나신 마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평생 충성하는 성도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도 똑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믿은 성도들은 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당연한 듯 봉사의 자리에 있죠.
평생에 하나님을 섬기며 은혜와 복을 받았지만 한편 평생 믿음의 수고와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마트에서 물건을 집었다 놓았다 하면서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기꺼이 물질의 짐도 집니다.
또 항상 새신자들을 이해하고 섬겨야 하는 것이 성장한 성도들에게 때로 무거운 마음의 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 한 마리 찾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아주 오래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섬긴 성도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제일 먼저 부활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잠든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예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며 죽은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에 있어서 처음 순서라는 것이죠.
살아생전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이 더 영광스러운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다음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예고편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수고했던 유대민족을 인정하시고 그들이 먼저라고 앞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충성되게 주님을 섬겨온 성도님들께 칭찬과 위로의 말씀으로 들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에도 더 가까이 나가 절을 하며 간청합니다.
4. 주님의 두 번째 답변이 돌아옵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상황이 점점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누가 들어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방인들은 개라는 것이죠.
구원은 자녀에게 주실 떡이라고 들리잖아요?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을 보면 이렇게 좀 더 상세히 전합니다.
7장27절,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방인의 구원은 완전 불가하다는 게 아닙니다.
먼저 배불리 먹게 하신다는 것은 그 다음 순서를 기대하게 하시는 것이죠.
그럼에도 굳이 개를 비유로 드신 것이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런 비하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악인과 의인의 중간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상태는 중간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영혼의 죄의 상태는 가치로 볼 때 개와 다름이 없습니다.
복음이 모든 나라에 전해져 풍성한 구원을 이루게 하시겠지만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경외하지도 않고, 미신을 믿으며, 본성의 죄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당연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여기면 곤란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구석이 있거나, 당연히 구원해 주셔야 하는 이유는 1도 없습니다.
바울사도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역으로 무시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잖아요?
로마서11장20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믿기 위해서는 따라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형벌이 마땅한 자신의 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로 오염 된 나의 실체가 개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는 주인이나 알아보죠.
이사야서1장3절에서 하나님이 한탄하시죠.
소는 임자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를 뭐라 부르시든 우리는 오늘 여인처럼 답하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고까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고 더 주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나 개나 다 주인의 상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아갑니다.
주인은 집의 개들도 먹이고 책임지잖아요?
전에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암수술을 해야 해서 다들 병원에 모였는데, 어머니가 그걸 둘러 보다가 갑자기 ‘아이구, 우리 백구 밥은 누가 주나?’
그러시더라는 것입니다.
수술을 앞두고도 개밥 걱정을 하는 게 개주인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를 상상해 보면 참 묘하게 빠져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아셨습니다.
그 믿음이 냉대와 모욕을 한 단계씩 넘으며 더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넘을 수 있겠니?
여기까지 한번 더 넘어 볼래?
그렇게 이 여인의 믿음을 끌어 올리고 드러내시길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자녀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게 그 삶을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한 것이 없고 예수님만 믿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딸을 고쳐주실 것을 믿은 대로 주님은 그대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부름을 받고 헌신하는 자녀들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냥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생활에서 봉사까지 하다 보면 그만 발을 빼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에 탤런트 김원0씨가 그러더군요.
김원0씨가 아이티에서 심장병 아이들을 데려와 수술을 시켜주는 단체에서 사역을 합니다.
벌써 80여명의 아이들을 수술시키고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부모들까지 데려와 한 달 정도를 전도하고 보살피는 게 쉽지 않죠.
이제는 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0씨 마음에 딱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구경꾼 노릇 하지 마라
왠지 오늘 가나안여인에게 하신 말투하고 너무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뭔가 깨닫게 하실 때도 믿음의 분량 뿐 아니라 성격에도 맞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김원0씨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이잖아요?
만일 주님이 ‘딸아, 네 수고를 다 안다, 고맙다’
그러셨다면 자기는 그 일을 그냥 놓았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구경꾼 노릇하지 마라
이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더 기쁘게 사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진짜 주님의 아낌없는 칭찬은 주님 만나는 그 날에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게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
다른 어떤 것에서 내 문제의 답을 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 우리가 이전에 어떤 죄인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겸손함으로, 그리고 주님의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기도를 놓치 않는다면 상황이 뒤집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우리 인생이 충분히 복되게 채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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