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1장25절-30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남수연 2024. 7. 26.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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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도들이 안식하는 주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듣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되죠.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무거운 짐이 없어지고 편히 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난 주도 삶의 무거운 짐들을 지고 허덕이며 살다 왔는데요?

피곤한 한 주간을 보내고 나면 주일엔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편히 쉬는 게 우리가 원하는 안식일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더 좋은 안식을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죽은 뒤에 천국에서 가장 완전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쉼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쉼을 확신하고, 현재의 삶에서도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1. 주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25절부터 27절까지 말씀입니다.

이 산을 잘 넘어야 예수님의 초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사역에 대한 갈릴리 사람들의 불신에 대한 꾸지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앞에 보면 주님은 고향 갈릴리 지방의 도시인 가버나움, 벳세다, 고라신을 맹렬히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성읍들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베푸시고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읍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이 믿지 않았기에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 그 성읍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복음의 비밀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두에게 구원을 베풀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을 가로 막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확신하는 세상적인 지혜가 스스로 불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현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성경은 사람들 마음에 하나님을 찾을만한 본성을 심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 종교라는 개념은 없죠.

가장 머리 좋은 침팬지도 바나나를 제단에 놓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동물에서 진화되었다면 왜 유독 사람에게만 신에 대한 종교심이 있겠습니까?

칼빈의 말대로 사람 속에만 하나님이 종교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면 그런 본성이나 자연에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혜와 세상의 지식을 믿고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것이죠.

갈릴리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안 믿었을까요?

그들도 물론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 속에서 강대국의 침탈로 불행을 겪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이 원한 메시야는 다윗왕의 때처럼 주변국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강한 군주였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보이셨지만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고치시는 정도의 메시야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아프지도 않다, 불구자도 아니다, 그럼 내게 돌아오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죠.

사람은 자기 배를 채울 수 없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나랑 상관없는 복지제도에 별로 관심이 안 생기잖아요?

사람들이 득이 될 게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복음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지금 내가 잘 사는 복음을 원했습니다.

또 당시 가버나움과 벳새다와 고라신은 갈릴리지방에서 번영했던 성읍입니다.

벳세다는 어부의 집이란 뜻이고 고라신은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이 마을들이 먹고 사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사람의 풍요는 대개 자신을 더 과신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대사회에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크게 부자동네도 아니고, 성공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사람이 내 힘으로 먹고 살만한 정도만 되도 얼마나 교만해 집니까?

똑똑한 자기 생각을 믿고, 먹고 살 힘이 있으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 믿기를 선택한 사람들 전도해 보십시오.

그 마음을 절대로 안 바꿉니다.

하나님은 스스로가 불의한 쪽을 선택한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갈 뿐 아니라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것입니다.

 

2) 그와 반대로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대속에 감사하며 조용히 예배하고 충성하는 우리 같은 성도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도 과거를 생각하면 갈릴리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분명히 달라졌죠.

우리가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만했던 우리를 어린아이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한 가지를 들자면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를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부정할 수 없듯이 마치 그렇게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도 본성은 나를 믿고 내 자신을 지혜롭게 생각하고 교만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도 판단하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레이더망에 넣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생긴 것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정해 놓으셨다 해도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가 없이 일방적으로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냥 믿음을 쑥 넣어주신 것만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이죠.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셨을 때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선지자의 예언도, 가난한 자, 병든 자, 과부와 고아, 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가난하고 병들어 연약하고, 고아와 과부와 같이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모든 죄인들 중에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정하셨다면 그게 누구겠습니까?

부자나 성공한 사람이나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병든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가난하다고 겸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태어난 환경이나 삶의 환난을 통해 마음을 낮추시는 작업을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들이 따로 있는 건 아니죠.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상처로 남아있고, 내 힘으로 감당하기 그토록 힘들었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아이의 심령으로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3)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성부하나님의 완벽한 일치와 일체성입니다.

한 분을 잘 알면 다른 한 분도 잘 알게 되고, 한 분을 모른다면 다른 한 분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잘 알면 하나님아버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의 모든 예언에 딱 들어맞는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은 그들이 독점하며 안다고 자부했던 성부하나님도 사실은 몰랐던 것이죠.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은,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계속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는 중에 점점 주님도 알게 되고 하나님아버지도 알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4)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십니까?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제자로 부르신 것은 남달라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마음이 가난해지도록 작업하셨고, 주님이 계시해 주셨기에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를 택하지 않으셨으면 어쩌나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걱정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가버나움처럼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고 믿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해하기 힘든 예정의 문제에 대해 논쟁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논쟁할 사람은 논쟁하라,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놀라워 하리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매일 놀라워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예수님은 그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 예수님의 초대에는 우리의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어린아이 같은 성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고,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안 옵니다.

우리도 이런 조건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분고분 하나님을 섬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수고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런 짐도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무덤에나 가야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수고해야 하고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전부 다 구원받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보다 더 많은 비신자들과 살아가는 게 세상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땅에는 풍성한 소산을 방해하는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어떻게 수고와 짐과 상처와 아픔이 없겠습니까?

2) 그렇다면 예수님이 쉬게 해 주시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생이 끝나고 다음 생은 천국에서 영원히 이어진다는 소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초기화면을 보면 파란 바탕에 창문 그림이 있습니다.

인터넷 창문을 통해 세상 어디든 들여다 볼 수가 있잖아요?

성도들은 머리 속에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열린 창문이 있습니다.

형체는 모르지만 이 세상보다 더 선명하게 존재하는 천국이 그 창 너머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도 믿지만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하죠.

머잖은 미래에 이 수고로운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곳에서 복된 영생을 누린다는 소망은 우리 짐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또 실제로 우리가 져야 하는 세상의 많은 짐을 주님께서 가볍게 해 주십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 짊어졌던 무거운 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짐이 다 어디 갔습니까?

세상 짐들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짐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거기에 점점 치이며 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가난이 시작되면 점점 가난해집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의 짐들을 가볍게 해주시고 쉬게 해 주셨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이 어떻게 쉬게 하시는지를 이해할 간증을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은혜라는 찬양의 원곡자인 찬양사역자 지0 씨의 이야기입니다.

0 씨 아버지는 한 방송국의 유명한 악단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았고 결국 지0 씨 어머니는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는 지선씨와 동생을 큰 아버지집에 보냅니다.

큰아버지집도 꽤 잘 살았는데, 0 씨는 제대로 얻어 먹질 못했습니다.

더부살이 하는 조카가 둘이니 그 집에서도 탐탁치 않았겠지만 너무 과도하게 구박을 했던 것이죠.

0 씨는 학교에서 영양실조로 늘 쓰러지고 코피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음악선생님이 지0 씨를 도와줍니다.

목사사모인 자기 친구에게 보내서 성악을 공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게 음대를 졸업하고 대전시립 합창단에 들어가 비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유명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남편과 결혼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어느날 다섯 살 난 큰아들을 목욕시켜 놓고 둘째를 목욕시키는 데 방에서 어머니의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방으로 뛰어가 보니 방안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아들이 몸이 젖은 상태에서 젓가락으로 드럼 치는 놀이를 하다가 젓가락 두 개를 콘센트 구멍에 집어 넣은 것입니다.

전기가 순식간에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관통하게 된 것이죠.

어떻게 해야할 지 일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습니다.

잠시 후 아이의 몸 속에서 전기가 폭파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는 순식간에 살갗이 터지고 손가락 뼈가 다 드러나는 참혹한 모습이 됩니다.

신경이 다 끊어진 아이 얼굴은 저절로 웃었다 찡그렸다 울었다 계속 바뀌고 있었습니다.

혹시 살아난다 해도 뇌가 망가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그렇게 해서 아들과 함께 화상치료의 투병생활이 시작됩니다.

병원 기도실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실에 돌아가면 아이의 상태는 절망적인 데,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마음에 평안을 주시며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병원에는 화상으로 사지가 다 일그러진 남자아이와 기이할 정도로 얼굴에 빛이 나는 엄마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아이의 손가락을 덮기 위해 아이 몸에서 살을 떼어다 수차례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그라 붙은 손가락을 떼어 주는 수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날 밤 아이에게 갑자기 심한 아토피가 생겨 아이가 밤새 자면서 자기 몸을 여기저기 긁은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니 기적같이 손가락이 다 벌어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기저기 장애가 남아있지만, 아들은 마음에 상처 하나 없이 너무나 밝게 자랐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아이가 큰 장애를 가진 아이치고는 너무 밝다,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지 모르니 심리상담을 좀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4주에 걸쳐 상담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것 같다. 상담하는 동안 나를 전도하려고 애를 썼다. 아이의 정신은 아무 이상이 없다.

하늘이 무너지는 사고였고 아이를 잃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모든 과정을 이겨낼 힘을 주시고 기적에 가까운 치유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과연 아들이 저렇게 믿음으로 자랐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 무섭고 두려운 짐을 어떻게 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위기 때마다 주님께서 그 무거운짐들을 가볍게 해 주시고, 그런 중에도 쉼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감내해야 할 짐들이 얹혀진다 해도 주님께 기도하며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께 배우고 주님의 멍에를 멜 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멍에를 맨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사이를 말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의 교훈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안식을 얻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죠.

믿고 주님께 나가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지키는 것.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라갈 때 이전에 우리를 짓누르던 짐들은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라 하고, 용서하라 하고, 겸손하라 하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고.

이런 교훈들이 내 어깨에 있다면 인생의 짐이 더 무거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 짐이 무겁겠습니까, 미워할 때 짐이 무겁겠습니까?

물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기 보다 힘든 일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미움으로 인해 지게 될 그 불편한 짐보따리를 안 져도 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들은 주님의 마음과 똑같은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계명은 사실 다 순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독한 게 어디 있습니까?

지킬수록 우리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마음의 쉼입니다.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 싸우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판단하고, 그렇게 사는 데 쉼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라가면 사람이 거칠어지지 않고, 시련이 있다할지라도 삶이 험악해지지 않습니다.

주신 시련도 온유하고 겸손하게 이겨나가는 것이죠.

내 어깨에 주님의 멍에를 메고, 말씀으로 내 본성이 잘 조련되어 늘 마음에 쉼을 얻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수고롭고 무거운 짐들은 결국 우리를 낮추셔서 주님을 믿게 하신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무거운 짐들이 예수님께로 나가게 했고, 영원히 지고 살았을 가장 무거운 죄의 짐을 벗고 쉬게 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짐을 위해 기도하면 주님이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또 예수님의 멍에, 말씀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계속 배우고 숙지해서 말씀대로 이끌려 살아갈 때 우리 삶도 편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위한 짐들이 가볍고 복된 짐이 되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