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iSfInlR6Kq4
창세기1장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배도 설교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천지창조 위에 세워진 줄 믿습니다.
창세기2장은 이 창조세계에서 잘 살도록 사람에게 주신 사용설명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창세기3장은 이제까지 완벽했던 창조세계가 단박에 뒤집어진 내력을 전해 줍니다.
아름답던 창조세계가 왜 지금같이 선악이 공존하는 고통스러운 곳이 되었냐는 것이죠.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은 본문입니다.
이해되는 만큼 이해해 보고 그 이상은 말씀대로 믿으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표 이단들이 창세기1장에서 3장까지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말씀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는 동안 정말 우리 모두의 신앙의 기초석이 탄탄하게 놓여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의 3대미스터리인 뱀, 선악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스터리라 함은 백프로 완벽한 답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좋을 것입니다.
1.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뱀에 대해서입니다.
1) 아담의 범죄에 도화선이 된 것은 뱀이었습니다.
오늘 매우 당황스럽게 말하는 뱀이 등장합니다.
갑자기 창세기가 역사가 아닌 설화인가 갸우뚱해지죠.
설화에서는 토끼도 말하고 자라도 말하잖아요?
이 부분을 잘 넘어가지 못하면 죄의 기원은 물론이고 성경 전체가 잘 안 믿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믿음이 없다고 할까봐 물어보지 못하는 내용이기도 하죠.
다 믿어지는 분들도 내가 믿고 있는 내용이 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이 말하는 뱀이 과연 동물원에 있는 뱀과 똑같은 뱀일까요?
아니라면 이 뱀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9절에 사탄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죄에 빠트린 것은 파충류 뱀이 아니라 옛 뱀이라고 불려진 마귀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뱀이 당시에는 말을 할 수 있었다거나, 아담이 동물의 말을 알아들었다거나 하는 것은 완전 틀린 답입니다.
일개 뱀이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의 핵심을 알고 개입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오해가 없도록 그냥 마귀가 꾀었다고 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시비가 생길 일도 없을텐데요.
그런데 뱀을 내세웠기에 난해해지는 것이죠.
배후가 사탄인 것이 분명하다면 사탄이 뱀의 입을 통해서 말을 걸어온 것일까요?
뱀이 갑자기 말을 하는 데 아담과 하와가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사탄이 뱀에게 들어가 말을 했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령께서 사탄을 뱀으로 바꿔서 기록하셨다는 게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사람을 다른 대상으로 환치해서 부른 곳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왕을 여우라고 지칭하셨습니다.
마지막 성경 계시록에는 예수라는 이름 대신 주님을 어린 양이라고 더 많이 지칭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용과 기묘한 짐승들도 분명히 인격체입니다.
모세오경을 기록할 당시까지 성경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지식이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쌓이고 밝혀지듯이 사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뒤에야 구약성경의 모든 계시가 밝혀졌듯이 사탄과 귀신의 정체도 주님이 오심으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단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탄과 악령에 대해서는 한정된 지각만 갖게 하십니다.
성경 이상으로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탄을 뱀으로 환치해서 설화 형식처럼 기록하신 것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뱀의 기분 나쁜 형상이 마귀의 이미지와 가장 잘 맞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사탄은 어떤 존재이고 왜 인간을 범죄에 끌어들인 것일까요?
본문을 보면 사탄은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탄이 이 사실을 그렇게 훤히 알고 있었을까요?
에스겔서에 보면 두로라는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묘한 경고가 나옵니다.
28장12절,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으로 단장하였음이여..
14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단지 두로왕에 대한 설명이라고만 보기엔 뭔가 심오하죠.
이사야서에서 바벨론왕을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고 한 것도 사탄에 대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그것처럼 두로왕의 언급 속에 사탄을 계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타락하기 이전에 사탄이 에덴에 왕래했을 것입니다.
오늘 뱀이 에덴에 있는 것과 일치하죠.
그리고 이어서 사탄의 범죄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사탄이 하나님께 반역할 불의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에 대해 유다서1장6절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죄목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특별히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잖아요?
아름답게 창조하신 사탄에겐 하나님의 형상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의 소유권을 넘겨주실 정도면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사탄이 유심히 보아온 것이죠.
아담이 범죄 한다고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 같지 않다는 걸 안 것입니다.
죄지은 인간을 멸망시키지 못하신다면 죄 지은 자기도 멸망시키지 못하신다는 결론을 얻은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니까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마귀가 성도들을 참소하는 자라고 기록합니다.
죄를 짓는 성도들을 참소하며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가 사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대속하신 뒤에 사탄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이죠.
2. 그렇다면 왜 자유의지를 주시고 선악과로 시험하셨냐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죄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죠.
자유의지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지능이 낮은 동물에게는 자유의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지능이 뛰어난 고등한 존재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앞 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시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지금 아무 것도 선택할 능력과 권한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고성능 AI를 장착한 로봇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실 일 시킬 천사도 필요 없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슨 수종들 존재가 필요하겠어요?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천사와 사람과 동물들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와 복과 자유를 피조물에게 나눠주시고 함께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천사와 사람이 타락할 가능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갈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선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게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하나님은 자신의 선에 배치되는 악을 당연히 아십니다.
악을 모르시면 어떻게 악을 심판하시겠어요?
하나님은 악을 아시지만 항상 선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다 악을 선택하시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선을 선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고등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처럼 선을 선택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공동체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도 사탄도 타고난 죄성이 없었으니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동산 중앙에 있는 단 한 개의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 ‘선’이고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악’입니다.
사랑이 선이고 미워하면 악입니다.
악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반대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악입니다.
악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진멸되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도 사람도 얼마나 탁월한 존재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뭘 시시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들에 핀 꽃 한송이를 봐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탁월한 피조물들이 받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선을 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의 타락과 사탄의 존재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초에 있었던 히스토리입니다.
이해가 잘 되십니까?
창세기에 압축되어 있는 고도의 영적 지식들은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이 완전한 해석은 아니라 해도 이 정면 성경을 벗어나지 않고 이 난해한 내용들에 대해 믿음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뱀이 어떤 절차로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지를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지금도 그런 패턴으로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기 때문입니다.
명석한 아담과 하와를 자기 목적대로 이용하려면 사탄도 치밀한 전략을 갖고 접근했을 것입니다.
1) 사탄의 목적은 사람과 하나님을 갈라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떨어져 나온 인간은 사탄이 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조종하고 부리고 파멸시킬 수가 있거든요.
사탄의 목적이 에덴에서 성공을 거두었기에 아담의 자손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절대로 마귀의 수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접붙여진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연결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귀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끊으려고 작업 할 것입니다.
사이를 갈라지게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말을 자꾸 하면 되죠.
남에 대해 안 좋은 말을 자꾸 하는 사람은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1절,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말에 이미 가시가 있잖아요?
이 구절의 원문은 뱀이 여자에게 한번 물은 것이 아니라 계속 물어 봤다는 미완료 동사로 씌어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하고만 친교한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이전의 사탄과도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는 것은 믿을만한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르는 자의 유혹 한마디에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아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사이를 벌려 놓는 작전을 써 온 것이죠.
히브리어인 사탄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디아볼로스입니다.
그 어원이 사이를 벌린다는 뜻으로 중상모략자를 말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벌어져서는 안 될 사이를 벌려 놓는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찰떡같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요인은 영적 게으름과 죄입니다.
좋지 않은 죄를 지으면 제풀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자극해서 죄를 짓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또 세상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요한일서2장16절에서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빠질수록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인간은 곤고해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붙여 놓으신 것들은 떨어지면 불행합니다.
혈연공동체인 가족, 믿음공동체인 교회, 일 공동체인 직장 등에서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며 애를 써야 합니다.
마귀의 2차 목표는 그런 관계를 깨지게 해서 우리를 불행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벌어진 관계들도 회복되고 새롭게 좋은 관계들도 허락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2) 뱀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먼저 공략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선악과 금지 명령을 주실 때 하와는 아직 창조되기 전이었습니다.
하와는 금지 사실을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즉 언약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과 언약한 것이 아니라 아담 한 사람과 언약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기에 아담에게 속한 후손들과 함께 자동으로 언약관계에 포함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직접 듣지 않고 아담에게 금령을 전해 들은 하와를 넘어뜨리기가 더 쉬울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죠.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시험에 들기가 쉽죠.
특히 하와의 대답을 보면 하와가 언약에 대해 정확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축소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죽을까 하노라’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현대 기독교회 일부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멸망이나 심판 같은 것은 폭력적이라고 강단에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대신 우리를 위해 가장 큰 폭력을 당하신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은혜로운 감정이나 신비로운 체험으로는 하나님의 인격을 알 수 없습니다.
참된 관계는 인격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소개 된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과 만물에 대한 태도 등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오직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지하게 하십니다.
바라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믿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뱀은 이미 틀어진 하와의 생각을 더욱 왜곡하고 확신을 심어 줍니다.
4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하와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틈을 보이자 사탄이 그 틈에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가 편히 사는 것, 잘되는 것을 훼방하시는 분처럼 몰고 가는 것이죠.
신자들 믿음의 가장 큰 위기는 하나님이 나를 안 사랑하신다, 내게 무관심하다, 내게는 좋은 것을 주는 데 인색하시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오래 금지될 때 우리는 낙담하죠.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갈구하는 번영이 사실 죄의 번영도 가져다 줍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조절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죠.
하나님이 각박하시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인내하시면 점점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3) 결국 하와는 끈질긴 사탄의 덫에 걸려 들고 맙니다.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결국 부부는 선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에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어떤 명령이나 약속이라도 아담이 거역했다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죠.
비극은 악을 저질러 봐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약을 경험해야 마약 지옥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와가 선악과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사탄의 꾐에 넘어가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결정타는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사탄 자기가 품은 생각이 그랬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큰 유혹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죠.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통치자도 심판도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인생에서 하나님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 모든 인간의 바램입니다.
가짜 신은 얼마든지 많아도 좋습니다.
세상이 모든 종교에 우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 소리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이 진짜 신이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꼭 계셔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우리의 본성은 불쑥 불쑥 하나님이 안 계신, 내 맘대로 사는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그래,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편하겠어? ’
‘힘들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눈치 보며 말씀대로 살아가야하는 스트레스도 없을텐데.’
그것은 인간의 천성이기에 그런 생각에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 언제고 그런 마음이 나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제2의 본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는 선악과 이전처럼 하나님을 선호하고 따르는 본성이 심겨져 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은 타고난 본성이 없어지지 않듯이 거듭난 본성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싶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하나님이 궁금해지는 것이죠.
하나님과 좀 떨어지고 싶은 시험이 올 때는 지난 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얼마나 많은 시련들을 이기게 도와주셨는지, 지금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사는지.
하나님이 얼마나 내게 필요합니까?
그러면 다시 하나님께 돌이키고 낙망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3장의 뒷부분은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창세기를 가리고 있던 커다란 들보가 눈에서 사라졌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가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아마 우리도 하나님 없이 내 인생을 살고자 선악과를 따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은 것에 억울해 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영원히 유효하고 더 보장성이 완전한 새언약을 우리와 맺으셨습니다.
에덴보다 더 아름다운 천국에서의 영생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고도의 기술로 하나님과의 사이를 떼어놓으려 하는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예수님께 찰떡같이 붙어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붙여 주신 관계도 깨지지 않도록 귀하게 가꿔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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