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UyIF_H1hCU
어둑한 밤 불 켜진 창문들을 보면 드려다 보고 싶은 마음이 들죠.
저 집은 뭐 하고 있나, 밥 먹고 있나, 저 집은 행복한가?
오늘 본문 말씀은 범죄 이후 에덴에서 쫒겨 난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집의 문을 슬며시 열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집엔 더 이상 에덴동산의 행복과 기쁨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형이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참극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하루 만에 자란 독버섯처럼 죄가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색을 드러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 파멸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창세기의 내용들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채택하신 구원의 방법은 제물을 통한 속죄입니다.
죄는 계속 짓는 데 속죄가 없다면 그 끝에 영원한 멸망이 있는 것이죠.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 계시가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구원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뿌리부터 꼼꼼하게 확인해 가야 믿음에 확신이 생깁니다.
오늘 동생을 죽인 가인은 인구 2%에 해당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인간 내면의 죄가 노출 된 것입니다.
그 본성은 우리 안에도 무섭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욕할 때 그 마음에 살의가 있다고 죄의 뿌리를 지적하셨잖아요?
오늘도 보여주듯이 가인이 다스리지 못한 죄가 이 가정에 인류 최초의 죽음이라는 참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과는 별개로 죄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가정이든 내 인생이든 악이 자라고 불행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죄를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는지도 살펴보며 우리 예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 태어나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1절, 2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농경과 목축사회가 진행된 것으로 볼 때 더 많은 자손들로 부족사회 정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두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사건을 진술하는 것이죠.
가인은 아마도 첫째 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상당히 격앙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 말 속에서 드는 느낌은 ‘득의양양’ 이런 것이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출산은 당연한 것이고 큰 신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와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이 경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출산이잖아요?
범죄한 이후에 해산의 고통을 받게 되었지만 출산은 여성에게 큰 기쁨이죠.
그리고 하와의 말 속에는 사실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3장15절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우리는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단의 멸망이라는 것을 알죠.
그것을 모르는 하와는 가인을 낳고 그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에덴에서 쫒겨나게 유혹했던 그 사탄을 멸망시킨다면 다시 에덴으로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죠.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얻다’라는 뜻이 있고 ‘창’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뱀의 머리를 밟고 찔러 제압할 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가인은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단지 아담의 죄를 빼닮은 아담의 자손이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어려서부터 싹수가 보이잖아요?
가인이 갑자기 동생을 죽이고 죄책감도 없는 그런 인간이 되었겠습니까?
부모의 기대는 자식이 커 갈수록 실망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하와가 다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어서 낳은 아들인지 그 사이에 다른 자식들을 더 낳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을 낳고는 가인을 낳았을 때와 같은 경탄은 없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도 ‘허무’라는 뜻입니다.
하와가 이미 가인을 보며, 혹은 또 다른 자식들을 보며 인간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감을 표현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결국 한 사람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유리하고 방황하는 세속문화의 조상이 되었고 한사람 아벨은 의로운 자라 확증을 받고 믿는 자의 표상이 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을 보여주는 그들의 제사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2.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율법을 받기 전인 지금 벌써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렇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예배했습니다.
율법 이전에 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있었다는 것이죠.
또 주목해 볼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끊었는 데 하나님은 못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찾아오셔요.
단 에덴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제물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덴 밖의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제물이 필요해졌습니다.
선물이 아니라 제물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다가가려면 선물이 아니라 속죄의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남의 물건에 손해를 입혔다면 물건으로 변상하면 됩니다.
율법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존엄성과 사랑을 배신함으로 관계가 끊어져 영원한 사망에 이른 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아벨을 미워해서 없어지길 바라고 실제로 그렇게 했잖아요?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없길 바라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 죽였잖아요?
성경에는 어떻게 이들이 제사를 알았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도 제사는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죄를 용서받을 제사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단순히 일회성 친절을 베푸신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친절은 살 길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살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 종교 의식만 받으시는 게 아닙니다.
또 제사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가인의 제사를 문제 삼으실리는 없는 것이죠.
아벨이 동물의 각을 떠 기름을 분리해서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스스로 고안했을 리 없습니다.
아벨은 부모로부터 받은 제사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제물과 제사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농사와 목축은 사람이 사는 데 가장 기본적인 직업일 것입니다.
귀농하는 사람들 보면 다 텃밭을 가꾸고 닭을 키우더군요.
단 아벨의 경우는 당시엔 육식을 안 하던 때이기에 식용 목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육식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허용됩니다.
아마도 옷이나 침구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제사가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경작한 농산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립니다.
아벨은 자기가 키우던 양의 첫 새끼들과 기름들을 드립니다.
가인의 제물이 농산물이기에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 제사에도 밀가루와 곡식의 제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곡식은 속죄제를 드린 후에 감사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지 곡물 제사만으로는 속죄 제사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제사법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창세기 성경을 읽을 때 직관적으로 뭐가 잘못 되었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어? 피가 없는 제사는 속죄가 안되는 데?’
가인의 제물은 속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진상 파악이 안되었다는 것이죠.
사망선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들어도 안 믿잖아요?
직업이 농부라 농작물 밖에 없는 데 어떻게 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평소에 생산물을 서로 교환하며 생활했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서 곡식을 공급받았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예배할 때 속죄 제물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얼마든지 아우에게서 양을 얻을 수도 있었겠죠.
히브리서11장은 형제의 제사를 이렇게 판별해 줍니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아벨이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속죄의 제물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죠.
가인도 부모로부터 똑같이 제사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믿지 않았기에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제물을 택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가인은 농사지은 아름다운 곡식과 열매들이 아벨이 키운 양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인이 보기에 가축을 살상하는 잔인한 동물제사보다는 탐스러운 땅의 소산이 더 훌륭한 제물이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피가 낭자한 십자가를 믿는 것보다 우아한 명상음악을 들으며 수련하는 것이 더 좋은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임의로 신을 섬기는 세상종교와 하나님이 섬기는 방법을 정해 주시는 우리 믿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할 피의 제사만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는 이미 죽음이 선고된 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대신 죽지 않고는 피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누군가 대신 죽어줄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시려고 대속 제물의 법을 정해주신 것이죠.
그런 면에서 믿음 없는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죠.
성경에 정해주신 하나님의 뜻보다 더 내게 좋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정해주신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최상입니다.
나를 위해 뭐 더 좋은 것이 없나,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3) 그리고 가인의 제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자 가인의 안색이 변합니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겠죠.
하나님의 피조물 중 어느 생명체도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기근이 들어 쩍쩍 갈라진 땅에서 죽어가는 동물들 중 어느 것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생활비가 떨어지고 자식들이 굶고 있다면 당장 하나님을 향해 분노할 것입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 왜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냐고 분노하고 원망합니다.
창조주와 대등하다고 착각하는 피조물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먹은 선악과의 부작용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가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너 알면서 왜 화를 내냐시는 것이죠.
너 자신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드리는 가인의 제물은 종류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가인의 제물이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그것이 단지 선물일지라도 기쁘게 받으시고 속죄의 제사를 알려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인의 제물의 문제는 그것이 선이 아닌 악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선이고 맞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면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입니다.
왜 하나님만 선이시냐고 억지 부릴 분은 없으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처럼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선입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지쳐갑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은 반대로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사로 예배하게 되는 것이지 거래로 예배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모든 종교는 거래입니다.
우리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감사와 헌신이 아닙니다.
아직 거래의 단계인 신앙은 하나님을 미심쩍게 따르면서 내게 어떻게 하시나를 시험하고 약간씩의 거래를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아들을 벌하셨다는 대속의 사랑을 아는 단계가 되면 거래하지 않고 감사로 예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배를 점검합시다.
나의 예배와 헌신이 감사에서일까, 불안과 두려움 때문일까,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일까,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일까.
신앙이 미숙한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점점 대속의 은혜를 확신하고 감사하는 예배의 단계로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 헌금과 헌신은 속죄제와 함께 드리는 밀가루 소제와 같이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죠.
3.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 제사를 통해 아주 분명하게 교훈을 주십니다.
7절,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져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죄의 욕구가 선을 행하는 것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 둘 사이에서 선을 행하지 않으면 결국 죄가 성문을 차지한 원수처럼 우리를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인과 같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모태 죄인에게도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고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에 항상 끌려 다니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합리화 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선을 행하려 하고 남을 도우려고 합니다.
거짓말 안 하고 약속 시간 잘 지키는 걸 신조로 삼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선인지를 명확히 알려주셨습니다.
선을 따르고자 하는 거듭난 영이 있고 성령의 도우심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 인격과 삶과 가정에 악이 가시덩쿨처럼 자라 모든 복을 가로 막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무슨 짓을 벌일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다스리라고 지시하셨지만 가인은 또 말씀을 거역합니다.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죄를 지은 인간에게 벌로 주어진 육체의 사망이 처음 눈 앞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알았을 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혼이 산산히 부서지고 마음은 고통으로 문드러졌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품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같아지고,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자존하려는 인간에게 닥친 결과입니다.
우리가 다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생명을 얻지 않는 이 사망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가인에게서 어떤 죄가 드러납니까?
불순종, 시기, 분노, 살인, 원한, 이런 죄가 사람 속에 있습니다.
분노와 원한 때문에 끔찍하게 사람을 죽이는 뉴스가 매일 나옵니다.
일일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는 시기와 질투잖아요?
질투 때문에 주인공이 모함을 당하고, 아이디어를 뺏기고, 수모를 당하는 것이 계속 소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본다면 우리 마음에서도 그런 것을 읽어낼 것입니다.
이런 모든 죄는 극단적인 자기애입니다.
나만 남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하면 된다는 이기심과 탐욕에서 사회관계의 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사간에 서로 돈을 더 가지겠다고 임금 협상 때마다 충돌이 일어나죠.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부자를 제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부자 한 사람이 나려면 두 마을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가지면 누군가는 피해를 보는 것이 세상 물자의 공식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을 다스리려면 평균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평균이 안되면 더 구하시고, 평균 이상이면 나누면 되는 것이죠.
가인의 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가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9절,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은폐와 거짓, 그것을 정당하게 보이려는 뻔뻔함이 추가되죠.
그러니까 성경이 이르시길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는 가인에게는 아우를 죽인 벌이 부과됩니다.
12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아우의 피를 흘린 땅은 다시는 이전 같은 소산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가인이 당한 죄의 결말은 우발적인 한번의 범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죄가 고이고이 낳은 알들이 어느날 겉잡을수 없이 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죄를 짓든 그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삶의 난관이 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죄를 짓든 예수그리스도의 죄가 속죄함으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죄가 있으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좋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이츠 오케이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식이 죄 짓는 데 괜찮아, 괜찮아, 그런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하나님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잠언 11장 27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5장22절에서 명령하십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화내고, 거짓말하고, 남을 무시하고, 시기하고, 도둑질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가 웅크리고 있지만 우리 대문을 차지하지 않도록 잘 막고 버텨야 합니다.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시고 또 이기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26절에 보면 셋의 후손들이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참된 예배를 이어가게 됩니다.
히브리서11장은 아벨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속죄의 제물로 인해 의롭게 되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선하게 살아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속죄의 제물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자들이 의롭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족 간에 불화가 있는 이유는 서로 자기가 희생한 것만 기억하고 서운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희생한 것보다 내가 가족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더 기억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로만 다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복귀됩니다.
십자가를 믿고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성에 깊이 뿌리박힌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힘들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선악을 잘 분별해서 죄와 악을 잘 다스리고 복의 열매가 풍성히 넘치는 성도님들과 가정이 되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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