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05Ps0OuOtzg
지금 캐나다는 산불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절반이 불타고 있다고 합니다.
뉴스에서 영상을 보는 데, ‘야, 정말 대재앙이구나’ 싶었습니다.
뉴욕까지 자욱한 산불 연기로 덮여 뉴욕인지 베이징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큰비가 내리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려스럽습니다.
지난주 우크라이나는 댐폭파로 인해 인근 마을들이 수몰되었다고 합니다.
이재민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유출된 다량의 화학물질들로 환경문제, 식량위기 같은 재난도 예상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푸른 하늘 아래서 아름다운 산천을 누리며 살 수 있을지 심란한 마음이 들더군요.
대홍수 심판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40일간 비가 쏟아 붓고 지구 전체가 홍수 속에 잠겼다고 합니다.
지난 주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보았죠.
오늘 하나님이 예고하신 대로 대홍수가 시작되고 모든 생물들이 멸절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홍수가 실화일리 없다고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런 잔인한 하나님은 안 믿겠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하나님은 안 믿겠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본성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 그런 의혹을 숨기지 못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믿음은 대홍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 하고, 변호하려 하고, 나 자신을 설득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대홍수가 어떻게 세상을 덮쳤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대홍수와 방주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더 견고한 믿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1. 노아에게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6장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 방주를 만들 재료는 고페르나무와 역청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고페르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내구성이 강한 잣나무 종류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방주의 재료와 규격과 모양까지 알려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이 계획하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도 하나님이 정말 모든 것을 가르치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받아서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방주라는 단어는 테바입니다.
배가 아니라 상자라는 뜻입니다.
물에 떠다니는 네모난 상자 같은 형태의 배를 만든 것이죠.
방주에는 방향을 조종하는 키가 없고 정박을 위한 닻도 없습니다.
바람의 동력으로 속도를 낼 돛대도 없습니다.
그냥 물 위에 떠 있기만 하는 게 방주입니다.
지구가 완전히 물로 뒤덮인 대홍수 상황에서 노아가 방주를 몰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우리 믿음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이 정해진 세상에서 이 구원의 방주 안에 탑승했습니다.
내 스스로 목적지와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일이 사람 의도대로 되지는 않죠.
저하고 오금동에서 함께 전도하던 권사님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는데 몇 달 전에 남동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시더군요.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다 심정지가 와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의지했던 남동생인데 그렇게 떠난 것에 너무 힘들어 하셨습니다.
분명히 건강하려고 운동을 했는데, 그리 될지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많은 일들이, 행복하려고 선택했는데 불행을 가져옵니다.
돈을 벌려고 투자했는데 다 잃어버리잖아요?
사람들이 발버둥을 쳐도 원하는 방향으로 못 가는 것은 사실 이 죄악의 홍수에 떠밀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단 이미 방주에 탄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삶의 방향과 목적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서 아무리 내 길로 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방주 안입니다.
이 테바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경우가 방주 외에 한 군데가 더 있습니다.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던 갈대상자가 바로 테바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그 상자와 노아의 방주를 같은 단어로 사용한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하나님은 모세의 갈대상자를 이집트 공주에게로 데려가셨고,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모든 테바는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 양주로 이사를 왔지만 반년 전만 해도 양주라는 도시는 제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꾸준히 따라왔더니 양주에 도착했는데 모든 것이 퍼펙트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테바 안에서 살며 인도하심을 받아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2) 방주를 만들고 역청을 칠하라고 하십니다.
역청은 석유에서 생기는 끈끈한 검은 물질, 아스팔트입니다.
원어는 코페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무 틈새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이 역청을 바르라는 것이죠.
그런데 역청이란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도 나오는데 다른 데서는 코페르라는 단어를 쓴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방주에서 역청으로 번역된 코페르는 다른 성경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속전, 몸값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방주에 역청을 발랐지만 그 의미는 속전을 발랐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홍수가 방주에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이 코페르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고 방주는 곧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3) 방주의 크기를 지정해 주십니다.
15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방주 바닥 크기는 축구 경기장보다 약간 큰 정도입니다.
이번에 우리 청소년축구팀이 4강에 올라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죠.
마지막 3,4위전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 봅니다.
방주의 바닥 크기가 축구장 면적이면, 높이는 아파트 5층 높이쯤 됩니다.
잠실 운동장 크기의 방주가 주변 아파트 5층 높이로 건조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토목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고대에 굉장한 구조물을 만든 것입니다.
이 가로 세로 높이의 비율이 안정성 면에서 선박 건조의 황금비율이라고 합니다.
방주는 내부가 3층으로 만들어졌고 칸을 막아 방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동물들을 마구잡이로 실은 게 아니라 분류해서 질서있게 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2. 이 방주에는 여덟명 가족과 종을 보존할 동물들을 태우라고 하십니다.
19절,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절,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의 심판에는 멸절만 있는 게 아니라 구원과 보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쓸만한 게 조금이라도 있으면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고쳐 쓸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 보충 설명을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실었습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가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것을 볼 때 제사를 위해 준비하게 하신 것이죠.
똑같이 한 쌍만 실었다면 번제로 드린 양이나 염소는 멸종되잖아요?
북극 노르웨이 한 지역에 지구상의 식물 씨앗을 보존하는 국제종자저장소가 있습니다.
핵전쟁이나 기상이변 등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식물의 종자들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입니다.
일명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이 창고에는 450만종의 식물 종자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구상에 안전지대는 없다는 우려감에 이 저장소를 달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고 합니다.
이 저장고는 그다지 큰 건물이 아니지만 450만종의 종자를 넉넉히 보관할 수 있습니다.
씨앗은 부피가 작잖아요?
노아의 방주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의문들이 제기됩니다.
1) 세상에 있는 그 많은 종류의 동물을 축구장 크기 오층 높이에 다 실을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창조과학자들이 실험과 연구를 통해 타당성을 증명해 놓았습니다.
지구상의 동물들 중 대표종을 분류하면 만 칠천 육백 여종이라고 합니다.
그 동물의 평균 크기가 양 정도라고 합니다.
한 쌍씩 방주에 넣었으니까 양 삼만 오천 이백마리를 방주에 넣으면 되는 데, 부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학생들에게 창조과학에 대한 강의를 하면 꼭 공룡도 실었냐는 질문이 나온다고 합니다.
나중에 티라노사우루스만 혼자 살아서 방주에서 내리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공룡을 싣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큰 공룡은 어차피 홍수 뒤 변화 된 환경에서 생존할 수가 없기에 배에 싣지 않았을 것 같고 작은 공룡들은 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코끼리 같은 큰 동물들은 어떻게 실었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죠.
큰 동물들의 경우 새끼를 싣는다면 얼마든지 모든 종의 동물들을 실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 수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노아가 다 찾아서 잡아 오지 않았습니다.
20절,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데려다 놓으시는대로 노아가 배에 실었던 것입니다.
노아 가족이 동물들을 다 잡아다 싣는 것은 불가능하죠.
우리가 살아갈 때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지금 이 일을 하게 되었지?
누가 이 사람을 내게 보내주셨고, 지금의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떻게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 데려오셔야지 내가 가서 끌고 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내 앞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데려다주시길 축복드립니다.
2) 또 이 배 안에서 일년 동안 이 삼만 오천의 동물들을 노아 가족 여덟명이 어떻게 돌보냐는 의문도 제기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많은 동물들은 일시적인 동면 상태로 만드셨으리라 추정합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동물들이라 해도 어떤 특별한 환경 조건을 만들어 주면 동면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대한 현실적이고 부정적인 의문들이 이보다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실험과 연구결과도 충분합니다.
3) 그리고 이제 방주 안에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21절,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뒤에 보면 대홍수가 나고 노아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기까지 일년 하고도 열흘이 걸립니다.
비가 내린 날은 40일이지만 지구를 뒤덮은 엄청난 양의 물이 높낮이에 따라 자리를 잡고 땅이 완전히 굳는 날 수가 일 년 정도 걸렸기 때문이죠.
그동안 먹을 양식을 방주에 비축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여덟식구가 일 년을 먹을 양식이라면 양이 상당하겠죠.
한 사람 식비를 일년에 사백만원으로 잡아도 총 삼천만원이 넘습니다.
그만한 양식을 저축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백년 동안 방주 짓는 일에 전념했을 노아가 일 년 치 양식을 준비할 돈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방주를 짓는 백년 동안 노아 가족의 생계를 축복하셨던 것이죠.
방주 짓는 비용은 빼고라도 온 가족이 먹고 살고 저축까지 한 거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과 너무나 비슷하죠.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고 지금까지 어떻게 먹고 살았습니까?
거기다 일 년 먹을 정도는 있잖아요?
십년치가 없다 해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항상 일년 치 만큼씩만 저축하게 해 주셔도 괜찮잖아요?
3.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완성합니다.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여년 간 이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이 이 거대한 방주를 어떻게 지었을지 상상해 볼까요?
아마도 방주를 산 속 은밀한 곳에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시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공터에서 방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비가 오면 떠오를 것이니까 굳이 산에다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가족들이 먹고 살아야 하니 생업도 하며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년이 걸렸겠죠.
나무를 패서 대형 구조물을 만들고 있는 노아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노아가 대홍수를 대비해서 방주 짓는 걸 보며 사람들은 정신이 좀 돌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창조과학자들은 홍수 이전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으리라 추측합니다.
창세기2장5절에서도 당시에 비가 오지 않았다는 말씀을 보았잖아요?
한번도 내린 적이 없는 비가 와서 세상이 물에 잠길 거라는 노아의 말을 누가 믿었겠습니까?
평생 비라는 걸 본 적이 없는데요.
그런데도 베드로후서2장5절을 보면 노아는 꿋꿋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고 하지 않고 왜 의를 전파했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의는 심판만이 아니라 구원도 포함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을 하나님은 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의가 없다면 내 일생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죠.
우리도 노아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매 주일 교회에 옵니다.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게 절대로 납득이 안됩니다.
혹시 교회에 대해 호의적이라 해도 그냥 막연히 하나님을 섬기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정도입니다.
사람들에겐 차라리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면 천국간다는 게 더 믿기 쉽습니다.
우리 믿음이 상식적이 아니라서 남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렵잖아요?
백 여년 동안 비상식적인 방주를 만드는 일에 순종했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14절에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은 방주였지만 그 방주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세상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위해 분명히 포기하는 게 있잖아요?
또 성령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더 많이 헌신하기도 합니다.
그런 수고와 헌신도 결과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면 실망할 것이지만 하나님께 충성하고 실망할 리는 없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자 결국 홍수 심판이 시작됩니다.
4. 대홍수가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 보겠습니다.
홍수는 노아가 육백 세 때 일어납니다.
7장 11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7장과 8장에서 홍수가 진행되는 과정이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죠.
그리고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대홍수가 역사적 사실이고, 하나님이 그 모든 날들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탄식하며 집행하신 그 심판을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11절,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절,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홍수의 진행 순서를 보면 먼저 화산폭발과 지각변동으로 지하수가 폭발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쏟아졌습니다.
여기서 비가 쏟아졌다고 번역했지만 자연적으로 내리는 비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양동이로 쏟아 붓듯이 물이 쏟아졌다는 뜻입니다.
창세기1장에서 처음 지구를 완전히 덮었던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던 것 기억나실 것입니다.
그 물들이 40일에 걸쳐서 쏟아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8장에 보면 홍수 나는 과정보다 물이 마르고 땅이 굳어지는 과정을 더 길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시간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방주 안에서 보낸 일 년은 노아와 가족들에게 어땠을까요?
비는 분명히 그쳤는 데 땅은 왜 그리 더디 마르는지 얼마나 조급했을까요.
세상 모든 것은 물에 쓸려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죽고 나와 내 가족만 남게 될 세상을 상상하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문명이 다 사라진 황무지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 암담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타락한 문명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더 낫잖아요?
물론 가족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감사였죠.
그래도 은혜는 은혜이고 살아가는 현실은 현실이잖아요.
여덟명의 가족이 방주 안에서 사는 생활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방주에 탄 사람들이 천사는 아니고 우리와 같은 죄인입니다.
갇힌 공간 속에서 예민해진 가족들간에 다툼과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홍수가 다 끝나고 다음 장에서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짓고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든 일화가 나옵니다.
그때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실수를 가족들 앞에서 조롱하죠.
홍수 뒤에 다시 인간의 악의 사회가 움트는 징조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부자간의 관계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가정이 믿음의 방주 안에 있어도 이렇게 한정 된 방주 안에서 죄인끼리 살아가는 삶입니다.
가족들과 매일 부딪치죠.
가족이라 해도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며 사는 게 참 힘듭니다.
가끔 보는 사람들하고야 좋은 말만 하고 헤어질 수 있지만 매일 보는 가족들, 일터의 사람들하고는 감정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구원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 이런 사람관계에서의 어려움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함께 방주의 환경을 견뎌내려면 참아야 합니다.
자꾸 날카로워지는 내 본성을 먼저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주 밖에서 죽어가는 것 못지않게 괴로운 방주 안이 됩니다.
우리 가정이나 일터나 교회나 다 방주 안과 같은 제한된 환경이죠.
모두가 답답하고 힘들고 조급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 방주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서로의 행복을 잘 지켜주며 함께 가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긴 창세기 가야 할 길이 멀어서 대홍수에 대한 말씀은 여기서 마칩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 일생이 단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 가는데만 소비하는 시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시고 싹 다 구원하실 수는 없으셨나?
그러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어떤 죄를 지어도 결국은 다 구원해 주신다면 어떨까요?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고 그게 무한 반복되는 영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에덴동산의 아담이 무한 반복 재생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무한반복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심판도 없는 데 대체 무엇에서 구원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홍수 심판에서 아담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계속 타락하는 모든 시대 속에서 구원자 예수님이 오실 길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길을 만들며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구원의 방주에 우리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길 정말 원한다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이 방주로 인도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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