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2K3qhyOLStY
언어의 장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 영어 울렁증이 있죠.
학교에서 영어 배운 기간은 오래지만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하는 일은 정말 힘듭니다.
요즘 TV프로그램 중에 연예인들이 외국 여행 다니는 프로들이 많습니다.
유명 연예인인데 영어를 못해서 쩔쩔매는 걸 보면 왠지 위로가 되더군요.
지난 주 기0 이라는 작가가 인도에 간 방송을 잠깐 보았는데요.
길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힌두교 사제가 갠지스강가를 둘러보는 기0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이마에 힌두교 축복 표식을 해주고 주문 몇 개를 따라 하라고 하더니 머니를 달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요 했더니 5000루피라고 합니다.
그게 우리 돈으로 8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어를 잘 못하는 기안이 그걸 잘못 듣고 5백루피를 꺼내 줬습니다.
8천원을 준 것이죠.
힌두교 사제가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능청스럽게 천 루피로 흥정을 하더군요.
기안은 ‘왜 더 달라지?’ 하면서 오백루피, 8천원을 더 꺼내 주더군요.
결국 8만원 부른 걸 만육천 원으로 깎은 것이죠.
영어를 못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흥정에 성공한 것이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오늘 바벨탑 사건이 없었으면 이럴 일이 없었겠죠.
나라마다 말이 달라진 것은 바벨탑 사건 때문입니다.
이 내용이 과연 사실인지, 바벨탑을 쌓은 죄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만국 공통어를 산산이 흩어버리셨는지 살펴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살펴보아야겠죠.
말씀을 잘 듣고 우리 언어생활도 더욱 복되게 변화되길 소망합니다.
1. 바벨탑 사건의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벨탑을 쌓게 된 이 시기는 노아의 홍수 이후 삼대 후의 일입니다.
10장에 보면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자손들의 족보가 죽 나옵니다.
족보가 중요하다고 했죠.
족보를 살펴보면 바벨탑을 쌓은 주동자가 누구인지 나옵니다.
10장6절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구스를 낳았고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다고 합니다.
니므롯이 노아의 증손자인 것이죠.
그리고 이 니므롯이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10절,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오늘 본문 2절에 바벨탑을 세운 곳도 시날땅이죠.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시날 땅에 바벨을 건설한 사람은 니므롯이었고 계속 나라를 넓혀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1절,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노아의 가족으로부터 번성한 후손들이니 당연히 언어가 하나였죠.
땅은 넓었고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촌락을 이루어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 니므롯과 불량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이동을 하며 시날 평지에 이르러 정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날 평지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초승달 지형으로 메소포타미아라고 합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죠.
학창시절에 고대문명의 발상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배운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의 뜻이 ‘두 강 사이’라는 말입니다.
이 비옥한 시날평지에 니므롯이 성과 탑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오늘 니므롯이 건설하려던 바벨에는 그 뒤로 고대 바벨론제국, 신바벨론 제국이 세워져 위용을 떨쳤지만 지금은 폐허 위에 벽돌과 역청으로 지은 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2. 이들이 성읍과 탑을 세운 이유입니다.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니므롯의 무리들이 탑만 세운 게 아니라 성읍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1) 니므롯이 이렇게 도시를 세운 일이 잘못일까요?
성경에 특별히 도시를 세우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도시를 좋아하지 말라는 경고는 있지만요.
도시에 사람들이 밀집하다 보면 온갖 죄와 퇴폐한 문화가 생기고 악이 제도적으로 구축됩니다.
우리나라도 경제 성장기에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상경한 사람들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득은 기업가들이 다 가져가고 상경한 사람들은 도시빈민으로 비참하게 전락하게 되었죠.
지금도 바벨론 유적지에 가면 바벨탑과 같은 신전탑들이 남아있습니다.
주변엔 가로세로가 각 100미터 높이가 50미터로 설계된 지구라트 유적도 있습니다.
이것을 다 누가 짓겠어요?
노예 사냥을 해서 잡아와 일을 시키는 거죠.
이집트의 피라미트도 노예들이 세운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아프리카 정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데려다 노예 시장에서 거래했잖아요?
유럽의 그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보고 우리는 감탄하지만 억울하게 잡혀와 죽을 때까지 중노동을 한 노예들의 피땀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만드는 이런 일들은 인간의 죄의 본성이 총동원된 악의 집합체인 것이죠.
앞 10장9절에 보면 니므롯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게 하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폭군으로도 사용됩니다.
이전 성경에서는 기이한 사냥꾼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게 더 나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자들은 니므롯이 단지 맹수 사냥꾼에 그친 게 아니라 사람 사냥꾼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자기의 나라를 세우려면 가서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잡아와야 합니다.오늘 바벨탑과 도시를 세운 이면에 있는 그런 내막을 놓치면 안됩니다.
브뤼겔이라는 사람이 그린 바벨탑 그림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거대한 바벨탑 아래를 금홀을 든 험상궂은 니므롯이 시찰하고, 바닥에 노예처럼 조아린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바벨탑 사건을 화가가 통찰력있게 그려 낸 것이죠.
대홍수가 끝난 뒤 3대 만에 다시 악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들이 뭉쳐서 더 권력을 누릴 더 큰 제국을 세우려고 나선 것이죠.
사람이 많아지면 힘이 생기잖아요?
시위에는 몇 명이 모였냐가 항상 관심사죠.
우리나라 도시들도 인구를 늘려서 몸집을 키우려고 애들을 씁니다.
교회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큰 힘이 생깁니다.
사람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힘과 권력이 생기면 그 힘은 거의 본능에 악용 당합니다.
역사마다 그런 제국주의가 일어나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 넣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결국 바벨탑처럼 사라지고 말았죠.
사람 안에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기를 부풀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말고는 인간의 그런 탐욕을 막을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그런 탐욕과 허세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2) 또 니므롯이 높다란 탑을 세우는 데 그 말에 본심이 드러납니다.
4절,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굳이 왜 그렇게 높은 탑을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겠다고 합니까?
부모 세대로부터 전해 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니므롯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책에 평가했습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물에 빠뜨릴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께 복수하겠다고 말했다. 물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탑을 세우겠다고 했다’
하나님이든 누구든 나를 막기만 해 봐라. 그런 것이죠.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도 필적하겠다는 교만입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에 비하면 방탕은 작은 죄라고 했습니다.
부정, 탐욕, 술취함 같은 죄는 교만에 비하면 벼룩이라고 말합니다.
까마득한 탑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내 이름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거대한 도시에 사는 우월감을 누리겠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분명히 넓은 세상에 흩어져 서로를 해치지 말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더 큰 나라도 만들지 말고, 서고 비교하지 말고, 고만고만하게 각자의 생을 꾸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에 한 건설회사에서 이런 광고를 냈다가 맹비난을 받고 카피를 바꿨죠.
서초구 반포동에 들어서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 ‘더 팰리스73’ 분양 광고입니다.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사람들이 입으로는 평등한 세상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는 것을 간파한 광고문구죠.
마음은 모두 똑같지만, 형편은 안되는 사람들의 분노를 산 것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그런 인간의 교만한 본성이 수많은 사회악을 번성케 하는 것이잖아요?
사탄이 가졌던 마음이고 아담이 가졌던 마음이고 수많은 정복자들, 권력을 탐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졌다가 망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너무 다른 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그런 모습을 배운 적이 없죠.
주님은 인기와 명성을 생각해 보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겸손으로 사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닮아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9절,10절에서 성도들의 실체를 이렇게 진술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런 성도들은 ‘자 내 이름을 내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꾸 내 이름을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남들에게 각광 받는 모습이 되었으면, 그런 마음은 우리 죄의 본성입니다.
그런 욕구를 쫒다 보면 우리 신앙의 참모습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흩어짐을 면할 목적으로 성과 대를 쌓았습니다.
이것은 미래를 대비하고 안전하려는 본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큰 나라를 세우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 충분히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죠.
통장에 돈이 몇십 억 있다면 미래가 든든하잖아요?
그러나 인생은 사람이 대비한 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전도서 8장7절에서 지혜자 솔로몬이 말합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최고의 지능과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도 장래 일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죠.
어제 아산병원 흉부외과 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병원근처서 덤프트럭에 치여 생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너무 안타깝고, 의료계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에 생사가 바뀌고, 운전자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이런 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전도서 7장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스스로의 자존하며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살아갈 피조물의 의무가 있고 그럴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 하나님 같은 선하신 보호자 없이 바벨의 인간처럼 우리가 살아가겠습니까?
3. 하나님께서 이들의 반역을 조사하러 내려오셨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대단히 높은 곳에 계시다가 지구로 내려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안 것은 하나님은 그리 멀리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 환상을 보니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려 놓으신 커튼을 걷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즉시 뵐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내려오셨다는 것은 징계가 공정하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아브라함을 만나셨고 천사들이 소돔을 실사했습니다.
대홍수 전에도 하나님이 당시 사람들의 패역한 죄악를 보시고 심판을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조사하셨으니 이 징계는 공정하고 의롭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실사의 결과 그들에 대한 죄목은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이제 다시 악이 시작되었구나. 이대로 두면 홍수 이전처럼 삽시간에 인간의 죄가 세상을 가득 채우겠구나’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잘 이해해야 믿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괴팍하시다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행복하게 섬기겠습니까?
바벨에 세운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세력은 점점 커져 온 세상을 지배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몰아낼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 도시에서 실패한 니므롯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여러 도시를 세우고 그 지역의 우상숭배의 판을 짠 인물이 됩니다.
2) 하나님은 이들의 죄에 대해 판결을 내리십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벌은 언어를 다 흩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하셨다’라고 해야 할까요?
같은 말을 하던 사람들이 일순간 서로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신약시대에 또 일어나죠?
사도행전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던 마가의 다락방에서 똑같이 일어납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말이 갑자기 열여섯 개 국어로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때처럼 바벨을 건설하던 많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각기 다른 나라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언어가 오랜 시간을 두고 다양하게 진화한 게 아닙니다.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왜 이렇게 다양해졌는지 수많은 논문을 썼지만 답을 찾지 못합니다.
결국 권위있는 언어학회에서는 더 이상 그 주제로 논문을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왜 유독 사람들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답을 못 찾습니다.
왜 인간의 언어와 동물의 짖는 소리가 다른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언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소통을 위해서 사람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영장류가 더 진화하면 사람처럼 말을 할 거라는 걸 누가 믿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정도면 한두 마디라도 언어를 스스로 장착한 동물들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만 말 할 수 있게 창조하셨고,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각 나라와 민족들이 전혀 다른 말을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어를 흩으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8절,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소통이 안되니 말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방에 흩어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나라와 민족과 언어가 나뉘게 된 것입니다.
1) 그렇다면 하나님의 조치가 인간 안에 있는 니므롯의 야망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요?
제국주의와 식민통치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죠.
식민지를 만들 때 난관은 그 민족의 언어와 문화죠.
그래서 일본이 우리나라 지배할 때 국어 못쓰게 하고 일본신 섬기게 하잖아요?
민족과 언어가 다르기에 결국 제국주의의 야망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각 나라와 민족으로 다 돌아왔잖아요?
2) 그러나 사람들이 언어가 같다고 다 말이 통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소통이 안되게 된 것은 말이 달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아담은 소통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있냐고 물으실 때 그 마음을 아담이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내가 벗었기에 숨었다’고 말하잖아요?
진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잖아요.
가인과 아벨이 말이 같다고 소통이 되었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의를 전파할 때 타락한 사람들과 소통이 되었습니까?
이미 인간의 범죄로 인해 소통은 불통이 된 것입니다.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라도 어떤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에 따라 모국어가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가정, 살아온 환경에서 배운 각자의 모국어를 갖고 있다는 것이죠.
싸우듯 말하는 게 모국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간에, 부부간에도 사실 완벽한 소통이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통이 안되는 것은 그렇게 말이 달라서만이 아니라 마음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이 안 맞아서 말이 안 통하는 것이죠.
3)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속죄로 깨끗하게 하신 다음에 불통의 언어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다시 범죄 이전 같은 언어의 소통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기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소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 사람들 간의 소통의 증거가 바로 사도행전2장입니다.
제자들이 열여섯개 언어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듣잖아요?
이것은 말이 갈라진 바벨탑 때와는 다릅니다.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아래 모이고 믿음의 언어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들은 말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 어떤 사람들과 만나도 믿음의 언어가 통합니다.
우리도 이 복음의 언어로 세상에 대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도 다 같은 언어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집집마다 이렇게 언어가 다른 가족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꼭 다 같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믿음은 마음도 통하게 하기에 믿는 가정, 신자들의 일터가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언어는 반드시 생활 언어도 바꿉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덕을 세우는 말,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소망을 주는 말, 긍정의 말,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말, 정직한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말을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난 원래 그런 말 못해’ 하지 마시고 말씀에 순종해 말의 인격도 잘 성장시켜 가야겠습니다.
말을 막 하는 사람이 결국 대인관계에서 불리해지고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항상 서로에게 복이 되는 말을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벨탑 사건은 본성에 입혀진 죄의 실체가 무한 반복되는 걸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스스로 파멸하는 걸 막으시며, 다른 한편으론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으실 여자의 후손이 오실 길을 준비해 가십니다.
바벨탑을 세운 함의 자손이 아닌 셈의 자손의 족보가 11절부터 나옵니다.
셈으로부터 이어진 족보에는 드디어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인간의 반역한 죄의 값을 치르시고 단절된 언어를 다시 믿음의 언어로 통일해 주신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 믿음의 언어로 하나님과 잘 소통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가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믿음의 언어로 다 하나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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