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7Ye8-s_pr3E&t=3214s
지난 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으로 이주합니다.
너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고 네 자손이 이 땅을 받으리라 말씀하셨죠.
창세기3장15절에서 말씀하셨던, 인간의 죄와 사탄을 멸하실 여자의 후손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범위가 좁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실 민족과 족보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맞춰서 역사를 진행시키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관점으로 보면 의외로 성경이 쉽고 은혜롭게 읽혀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약속을 놓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공식적인 계약식을 행하시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속 함께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삶도 아브라함처럼 인도해 주심을 오늘 잘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1. 하나님은 가나안땅에서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축복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 복을 주시는 것이죠.
우리에게 구원의 복을 주신 것 안에는 이 땅의 삶을 책임지시는 것도 포함됩니다.
안 그러셨다면 우리가 지금의 이 모습 조차도 될 수 없었을거예요.
예수님이 영혼구원만 하셨다면, 우리의 지금 형편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당한 큰 위기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앞장 14장에서 또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이 이 사건에 관련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으로 이주한지 거의 십여년 되었고 조카 롯은 독립해 소돔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부족 국가들끼리 두 패로 갈라져 싸우는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왕 쪽 연합군이 패배하고 소돔성은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다 포로로 잡혀갑니다.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당연히 붙잡혀 가게 된 것이죠.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급히 자기 집에서 훈련 시킨 무사 삼백십팔 명을 데리고 추격해 밤중에 북쪽 연합군을 기습합니다.
아브라함은 대승을 거두고 잡혀갔던 사람들과 노략당한 물건들을 다 되찾아 옵니다.
목축업자였던 아브라함이 삼백십팔 명으로 4개국 연합군을 쳐부실 수 있었던 것은 백 프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그렇게 아브라함은 모든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되돌려 주고 다시 자기 장막으로 돌아옵니다.
2. 그 후에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본문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1절,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 왜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까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을 하실 리가 없죠.
아브라함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나는 네 방패’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앞서 있었던 전쟁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실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가나안 부족국가들이 조공을 바치던 강대국들을 건드린 것입니다.
얼떨결에 이방인 목축업자에게 패하는 망신을 당했으니 보복은 당연한 것이죠.
아브라함 같은 족장이야 한순간에 쓸어 버릴 수가 있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들을 이긴 것을 아브라함 자신이 제일 잘 압니다.
그래도 내일 일어날 전쟁은 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도 그런 것이죠.
우리도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러 가지 두려운 상황을 이기며 살아왔고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여전히 염려에 사로잡히고 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도와주실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듭니다.
간신히 막아 놓은 일이 있다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함이 늘 있죠.
삶의 불안 요소는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힘겨운 문제와 환경들 속에서 내가 억지로 버티고 있다면 이러다 내 스스로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는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지켜보시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돕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혔을 때 찾아오셔서 슬그머니 우리를 빼 내주십니다.
그 숱한 구덩이들을 그래서 우리가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잘 못 느끼고 잘 모를 뿐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방패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니 가나안의 맹주국들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너무 두려워하고 쫄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내 방패가 되시면 세상과 원수들이 오히려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도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에 대한 염려로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을 금하십니다.
빌립보서4장6절 말씀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오늘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근거가 있는 두려움이었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염려도 분명히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감사로 기도하면 염려하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분명히 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주님의 평강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두려운 문제들을 든든히 막아주시는 방패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복을 주셨고 상급을 많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집에는 삼백십팔 명의 무사가 있었습니다.
일 시키는 종이 아니라 집에서 무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거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이웃 부족장들과 동맹을 맺을 만큼 남들이 무시못할 힘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브라함의 가장 큰 상급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 아브라함에게 아무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얻으려 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대단하게 여기고 의지할수록 두려움은 커질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잃을까봐 더 두려워지는 것이죠.
정상에 올라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것을 지킬 자신도 없고, 거기서 내려갈 것도 두려운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기 절정에서 공황장애가 되고 활동을 접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했던 것들은 변하고 나를 떠납니다.
나 자신도 변하잖아요?
미쳤던 취미도 어느날 시들해지고, 그렇게 좋았던 것들도 더 이상 내 마음을 뛰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얻은 보상들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신 의미를 우리가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아브라함도 잘 모르고 엉뚱한 질문을 하죠.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라는 말씀은 아마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고된 인생을 믿음으로 잘 완주하면 천국에서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상급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귀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상급이신 하나님을 천국에서 완전히 누리겠지만 지금도 나를 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내게 위로가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럴 때가 꼭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심이 믿어지면 그것까지도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세상에서 얻는 자잘한 즐거움을 조금씩 유보하고 주님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 한걸음씩 더 앞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것이고 하나님이 내게 가장 큰 상급이심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도, 반복되는 일상도,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 안에서 이뤄질 때 지혜로 반짝이고, 값지고, 행복으로 충만해집니다.
행복을 세상에서 찾기 전에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먼저 찾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동문서답을 합니다.
2절,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무리 믿음을 굳건히 가진 성도라 해도 결국 현실 문제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에게 지금 가장 간절한 상급은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롯이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무사들이 있지만 그들은 돈 받고 지켜주는 용병일 뿐입니다.
자기가 위기에 처할 때 가족처럼 자신을 위해 희생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자식이 없다는 것이 더 쓰라린 것이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섭섭함이 오늘 대화에서 결국 드러나죠.
3절,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체념, 섭섭함, 내 힘으로 해 나갈 대안.
오랜 숙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실 때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죠.
우리 믿음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먹고 사는 문제, 자식 문제, 몸의 건강, 장래 문제 이런 것이 신앙의 성장이나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큽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문제들은 신앙과 상관없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랄 것이 없다면 우리는 일주일, 한 달, 일 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상급으로 알지 못하고 현실 문제로 돌아온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실 문제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주실 자손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시청각교육까지 동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에 빽빽한 별들을 보게 하시고 네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별처럼 많은 구원받은 자녀들을 생각하시며 더 감격하시는 느낌이 들지죠.
4) 아브라함은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다시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6절,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원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이 창세기부터 일관성 있게 가르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내가 뭔가 좀 해야 구원을 받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신앙에도 공로 사상이 되고, 헌신을 남과 비교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큰 방해 요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믿고 있었죠.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을 기준대로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과 속죄의 제사를 함께 주신 것이잖아요?
속죄의 제사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대속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처럼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구약 역사가 진행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3장15절에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에게서는 만민의 복이 될 한 명의 자손으로 점점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자손을 주실 것을 믿었기에 의롭게 된 것입니다.
5)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약속에 대한 보증서를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해서 증거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증거를 보여 주시면 믿겠다는 것과, 믿고 증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사야서7장에 이런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유다왕 아하스 때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 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선지자를 보내셔서 유다를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증표를 구하면 무엇이든 주시겠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때 아하스왕이 끝까지 나는 증표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무조건 믿는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가끔 주변에서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께 기대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기도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며 증표를 구할 때 기꺼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잔뜩 기대하고 이것저것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저도 어떤 문제는 ‘아버지, 이것은 수일 내에 이뤄주셔서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 증거를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도 기도합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는 차라리 기복적으로라도 기도하는 것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대한 증표로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9절부터 21절까지가 이 언약체결에 대한 내용입니다.
방법과 과정이 우리에게는 좀 생소하고 미래에 대한 예언과 상징들이 섞여 있어서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1) 동물을 쪼갠 언약의 방식은 실제로 고대 중동의 왕들이 조약을 맺을 때 하던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방법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준비하라고 하신 동물들을 가져와 즉시 둘로 쪼개고 쪼갠 것들을 서로 마주 대하여 배열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면 조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일 약속을 어긴 사람은 이 동물들처럼 쪼개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엄중한 계약인 것입니다.
예레미야34장18절에 이스라엘에도 이렇게 조약을 맺었던 사례가 나옵니다.
언약을 배신하는 이스라엘을 경고하신 내용입니다.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언약을 무시한 그들을 바벨론에 넘겨 찢기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조약 준비를 마쳤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를 않습니다.
사체를 노리는 솔개를 아브라함이 쫒느라 애를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언약의 성취에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그 사이에는 방해하는 악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3) 또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예언을 먼저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4백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시죠.
16절에 보면 사대 만에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시죠.
4대와 4백년과 잘 안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연수로는 4백년이지만 자손의 대수로 하면 4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던, 지금보다 수명이 길던 시대입니다.
한 가족을 예로 들자면, 애굽에 내려갔던 야곱의 아들 레위의 사대 손이 모세와 아론입니다.
레위 때 애굽에 와서 모세 때 탈출했으니 정확히 4대가 되는 것이죠.
이 먼 훗날의 예언을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이 시점에서 언급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4백년 애굽생활이 언약과 다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설교를 많이 들었듯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역사가 곧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역사를 상징하잖아요?
출애굽 역사 속에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예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4) 하나님이 당장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지 않으시는 이유는 거주민들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백년 동안 가나안 사람들의 죄가 조금씩 더 악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현재도 소돔성이 멸망할 정도로 가나안 사람들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4백년 동안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그만큼 유보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스라엘을 통해 심판하신다는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대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서 세상의 죄가 밝혀지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그리고 환상적이고 신비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합니다.
그리고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17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합니다.
불, 구름, 빛, 흑암, 지진, 이런 것들은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뜻입니다.
저는 출애굽기에서 시내산 정상을 태울 듯 불과 연기로 임하셨던 장엄하신 하나님이 오늘 횃불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에 마음이 겸손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맺으러 내려오시는 것도 놀라운데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기 위해서 횃불같이 작은 모양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는지를 알 수 있잖아요?
이제 서약을 맺는 당사자 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면 이제 언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를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시고 언약식은 끝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구원 언약을 성사시키시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다 하실 일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계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좀 뒤에 이삭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낳고 맙니다.
그리고 또 믿음이 흔들려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똑같은 죄를 짓거든요.
우리가 하나님과 일대일 계약을 맺었다면 우리는 다 쪼개져야 할 운명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왜 하나님 한 분이 지나가셨겠습니까?
그 한 분은 하나님도 되고 사람의 대표도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말하자면 일인이역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겠지만 사람은 그러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할 때 사람의 대표가 되신 예수님께서 쪼개지시겠다는 뜻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아담 이후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인간을 대신해서 그 몸을 찢으신다는 것을 이 횃불 언약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횃불 언약이 이렇게 은혜로운 언약인 것을 이번에 묵상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손을 기다리지만 오늘도 아들을 안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앞으로도 십오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아들을 얻을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 약속의 자손을 주신다는 데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이 더디다면 다 뜻이 있음을 믿고 인내해야겠습니다.
또 기다리고 간구하는 시간들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성숙해지는 가장 복된 시간이 됨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힘든 날도 기쁜 날도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고 가장 큰 상급이십니다.
그것을 매일 복되게 누리며 믿음의 길을 굳게 걸어가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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