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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창세기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근원을 다시 살피고 있습니다.
기초공사는 그 위에 얼마나 높고 튼튼한 건물을 세울지를 결정합니다.
지난 주까지 창세기1장부터 11장까지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부분을 원역사, 혹은 고대사라고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중요한 네 가지 역사를 살펴보았죠.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대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입니다.
이제 12장부터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계획이 점점 좁혀지고,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먼저 선택되고 부름 받은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되죠.
본문 12장부터 창세기의 마지막 장까지는 예수님의 족보 안에 있는 세 족장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애굽으로 이주하는 야곱의 가족들과 요셉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누구인가입니다.
1)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 앞에 족보와 연결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앞에 11장을 보면 노아의 아들 셈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역시 이 족보를 참고해야 아브라함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홍수 뒤 셈의 8대손이 데라이고 그의 아들이 아브라함입니다.
연대기로는 대략 주전 이천년 경입니다.
데라는 세 아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는데 그 중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고 합니다.
하란은 생전에 롯이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이 이 조카 롯을 자식처럼 돌보게 된 것이죠.
아브람의 고향은 지난 주 바벨탑을 쌓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갈대아 우르입니다.
여호수아서 24장2절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데라의 가문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종교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8세대 만에 온 땅에 우상종교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도 면면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도 우상숭배자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경외했듯이 택하신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을 다른 말로 하면 신뢰입니다.
믿음 안에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관계를 통한 신뢰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기속성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좀 푹 묵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고향을 떠나라 하셨을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의 부름이라 해도 생판 모르는 신에게 인생을 걸 사람은 없죠.
또 만일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복종했다면 그걸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에는 10절 이후의 일처럼 여러 차례 결정적인 실수와 잘못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고대사회 야만적인 사람들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기품이 있고 사려 깊은 인격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공통적인 인품입니다.
그런 것이 단 몇 년만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에서 우상숭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하나님은 이렇게 준비시킨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명령하십니다.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사도행전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문제는 10장에서는 데라가 가나안땅으로 가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을 데리고 떠났다고 하죠.
데라가 중도에 하란이라는 곳에 눌러 앉았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 직접 명을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우르에서 살기 힘든 문제가 있었거나, 또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아들과 함께 가려고 결심했을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 둘 다일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난다고 하고 마침 우르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생긴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주변 사람들과 환경도 움직이시잖아요?
그렇게 우르에서 나온 데라는 하란에서 살다 거기서 죽습니다.
사도행전7장을 보면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아브라함이 다시 가나안땅을 향해 떠났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1절의 내용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죠.
아브라함과 창세기의 인물들을 앞으로 이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특별히 사용된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이 오실 길을 만든 것이죠.
한편 하나님과 메시야를 믿었던 구약시대의 성도잖아요?
그들이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를 보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는 것이죠.
이런 관점으로 앞으로의 족장들의 생애를 이해하면 됩니다.
2. 하나님은 가나안땅으로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이루어 주실 몇 가지 복을 약속하십니다.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 첫쩨 복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큰 구원계획을 처음부터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자손들로 부족국가 하나를 세우시려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요한복음8장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결국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세우실 나라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부르심을 받는 상황에서는 단지 이런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우선,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자식들이 노후 대책이었습니다.
죽은 뒤에 묘소 관리나 제사 문제까지 자식이 없으면 큰일이었죠.
고대사회에서 많은 자식은 더더욱 가문의 안전과 번영을 뜻합니다.
자손을 많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순종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게 된 데는 현실적인 어떤 문제가 동기가 되었잖아요?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우상숭배 사회가 좋았을 리가 없죠.
베드로후서는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성으로 들어간 롯이 그 성 주민들의 죄악으로 고통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의 땅 고향에서 얼마나 더 그랬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의 폭력 범죄, 영아유기 같은 뉴스를 보면 보통 사람 우리들도 마음이 다 상합니다.
게다가 사회가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만 믿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땅에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을 믿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2) 둘째 복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명예로운 이름, 큰 인물을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실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보면 이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생활을 보면 점점 위상이 높아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실 타지에서 온 무명의 이주민일 뿐이잖아요?
우리나라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안정적인 지위와 유명한 이름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희한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주로 왕이나 부족장들을 상대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10절에서부터 즉시 애굽왕 바로와 상대합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왕들과 교류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상당한 존경과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신 것이죠.
그들의 입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하시죠.
현재 이스라엘에서도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한 조상으로 추앙을 받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이름이 된 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믿음의 조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영예로운 이름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전보다 점점 더 우리 이름을 높여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이라면 설령 세상에서 유명한 이름은 아니라 해도 내가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존귀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가장 명예로운 이름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잖아요?
그 이름만큼 영예롭고 복된 이름은 없습니다.
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없다면 그의 이름은 묘비에만 새겨질 뿐이지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17장 13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이번에 미국의 억만장자 부호가 타이타닉호를 탐험하는 잠수정에 탔다가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억만장자라는 이름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부자의 죽음이나 노숙자의 죽음이나 동일합니다.
생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웠는지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죠.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워지시길 축원드립니다.
3) 셋째 복은, 너를 복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만민이 복을 받게 해 주신다고 하시죠.
이것은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님이 만민에게 주실 복을 뜻합니다.
그러나 실제 아브라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함께 형통해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결별해 소돔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부족 국가 간의 전쟁으로 포로로 잡혀간 롯을 아브라함이 구조해 줍니다.
결국 소돔이 심판을 당할 때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살아남은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하고 동침해서 자손을 봅니다.
끔찍한 결말이죠.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복되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오고 가지만 제가 확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에는 모두가 다 복을 얻는다는 거예요.
성도가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이 임하면 또 그 주변 사람들도 함께 복을 받습니다.
잘 믿는 성도가 하나님께 항상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잖아요?
그래서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그 성도로 인해서 복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죠.
모두 복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4) 또 아브라함과 한편이 되어주시겠다고 합니다.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하신지라
하나님은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10절부터 기록된 아브라함의 큰 실패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죄는 아브라함이 지었는데 바로왕의 집이 재앙을 받게 하시는 게 불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에게 합당한 징계를 하신 것입니다.
사라가 이주민이라는 약자의 처지에 있는 여인이기에 개인 의사도 묻지 않고 데려다 아내로 삼은 것이잖아요?
또 그로 인해 바로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도 간과하면 안됩니다.
스가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성도 편을 들어주시는 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2장8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고 가나안땅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 여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4절,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칠십오 세였더라
1) 5절을 보면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나 하란에서 사업도 안되고 희망이 없어서 이민을 떠난 게 아닙니다.
하란에서도 이미 부자였던 아브라함은 거기서 어려움 없이 잘 살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소유를 이끌고 먼 가나안땅으로 간다는 것은 재산을 다 잃을 각오를 한 여정인 것이죠.
믿음을 버리고 무언가를 지키려고 한다면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잖아요?
마가복음 8장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거 없으면 안 된다고 움켜쥔 것들이 구원의 숨통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이 점점 거부가 되는 복을 주십니다.
2) 마침내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6절,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나님은 세겜 땅에 도착했을 때 다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이 약속을 뒤에서도 여러 번 아브라함에게 반복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거듭 언약을 확인해 주시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만도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경건한 성도가 예배에 신실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가나안사람이 살더라’는 말씀은 무심히 기록된 것 같지만 아브라함의 실망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가나안땅에 왔더니 이미 가나안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8절과 9절에서 아브라함이 자꾸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비옥한 세겜 땅을 떠나 다시 벧엘 근방으로 옮겨 장막을 칩니다.
그리고 다시 남방으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
내가 받을 땅이 여기인지, 저기인지를 불안하게 탐색하는 마음이 느껴지죠.
가나안 지역은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메마른 사막지대입니다.
이미 좋은 땅을 사람들이 다 차지했기에 아브라함이 밀려 밀려 남방의 사막지대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약속은 현찰이 아니라 어음이라고 합니다.
약속을 품고 있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우리의 믿음에서 항상 마주하는 현실 아닌가요?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만 현실은 항상 기다려야 합니다.
‘혹시 이번이 기회인가? 이제는 주시려나?’
그렇게 기도하며 기다린 시간들로 우리 인생이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많은 자손을 약속을 받았지만 백세가 되어서 간신히 이삭을 안게 되죠.
감사한 것은 우리의 기도응답은 대체로 25년까지 걸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을 약속받았지만 죽기까지 매장지로 쓸 땅 외에는 한뼘의 땅도 받지 못했습니다.
거부였던 아브라함이 성읍을 지을 만한 땅은 충분히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아직은 이 땅 주민들의 악이 가득 차지는 않았다, 그전까지는 그들이 살게 하겠다. 앞으로 사백년 뒤 네 자손이 이 땅을 얻게 될 것이다’
결국 안전한 주거지를 찾아 남방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은 심각한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일강으로 인해 가뭄 피해가 적었던 애굽까지 내려갑니다.
4. 이어지는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사실 큰 믿음으로 시작된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사건이 연이어 나오는 것이 좀 의아하죠.
이런 것은 빼도 되잖아요?
그러나 이 사건은 이렇게 나약한 인간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하나님이 어떻게 지켜나가시는지를 선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아내 사라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무력이 법이던 시대에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남편의 운명은 뻔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바로에게 사라를 뺏깁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왜 가나안땅에서 버티지 않았냐, 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지 못하고 거짓말을 했냐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던 아브라함이라도 현실로 닥친 죽음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그렇잖아요?
여러 가지 죽음 같은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믿음의 위기와 실패를 겪으며 점점 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위기와 실패는 무엇보다 내 자신의 믿음과 본모습을 알게 합니다.
나의 실체를 아는 만큼 하나님도 알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자신이 결코 믿음의 조상도, 복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처절히 알게 되는 것이죠.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이런 저런 가뭄을 만납니다.
다급히 내 판단을 따랐다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그 뜻대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죠.
물론 히브리서11장이 증언하듯이 더 좋은 부활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영웅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얼만큼 강인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강인한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죽음이 두려워 하나님도 외면하고, 아내도 희생시킬 만큼 나약한 육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보증이 되신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내를 되찾고, 민망하지만 사라 덕분에 얻은 재물로 더 큰 부자가 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죄 짓고, 실수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그럴 때 우리 자신이 사실 얼마나 더 힘들고 좌절하는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 너도 힘들었다.’
하나님이 그래서 실패한 우리에게도 때로 좋은 것을 주시지 않나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뿐 아니라 그 사랑도 알아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그런 나약함 속에 있지만 그걸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알아가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제 창세기 역사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가는 것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길을 나섰듯이 우리도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믿음의 가문을 이루고, 점점 명예로운 이름을 얻고, 이웃에 복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시는 은혜가 항상 끊어지지 않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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