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22장1절-14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남수연 2023. 7. 14. 00:34

 

https://www.youtube.com/watch?v=doi2PfGTmLg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정점을 찍은 사건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아마도 성경에서 기억나는 최고의 한 장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이 당혹스럽죠.

여기서 비신자들은 인신제물을 요구하는 원시 종교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내 놓으라고 하실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실제로 목사님들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게 이삭이다, 이삭이 있다면 그걸 내놓으라고 하신다, 이런 식의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사건이 가리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제물로 드려진 것과 판박이 사건입니다.

가려 놓았던 현수막이 드디어 걷히고 독생자를 대속 제물로 주실 구원계획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죠.

이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뜻을 오해 없이 잘 살펴보고, 깨달은 대로 순종하는 복된 은혜를 주시길 빕니다.

 

1.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끔찍한 시험을 하셨냐는 것입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여기서 그 일 후에는 그동안 아브라함의 삶에서 중요한 일들이 흘러간 뒤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백 세가 되어 드디어 이삭을 안아보게 됩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주실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여종에게서 낳았던 이스마엘은 분란의 불씨가 됩니다.

성급히 하나님의 뜻이라 속단하고 결정한 일들이 결과적으로 볼 때 이와 비슷하게 되더군요.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1)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받으시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제물로 받으시지 사람을 제물로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죄가 많아서 제물의 자격도 안됩니다.

차라리 죄를 모르는 동물은 제물의 자격이 조금 되는 것이죠.

사람의 드러난 죄는 정말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죄인은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죄의 육중한 무게에 꼼짝 못하게 붙들려 있습니다.

그 죄의 인격은 하나님 자체를 싫어해서 함께 못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삭을 번제로 요구를 하셨다는 것이 우리를 흠칫 놀라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제물로 쓰실 생각을 하셨다는 자체가 우리를 겁나게 하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인류의 대속제물로 받으셨잖아요?

단 대속제물은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됩니다.

어떤 인간도 제물이 되어서도 안되고,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2)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시험하시려고 했을까요?

그것도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한 뒤에 하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시험 종목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안 하는지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진정 경외한다면 그 명령에도 순종할 거라는 겁니다.

3)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과 하나님이 꼭 우선순위를 가리셔야만 하는 걸까요?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가 벌써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잖아요?

믿음이 좋은 성도들은 혹시 나한테 신학교 가라고 하시는 건 아닐지, 내 여윳돈을 어디 구제하는 데 보내라고 하시는 건 아닌지.

우리가 다 그 정도 믿음 밖에 안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우리가 똑같은 믿음의 줄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416,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에게 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인에게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을 우리 믿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브라함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할 때 과연 순종하느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증명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받을 수 있냐고 물었던 부자 관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죠.

부자관원이 재산이 많아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성경은 그 사람의 파국을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이삭을 드리지 못했다면 우리가 이해는 하겠지만, 믿음이 어떤 순종까지 가능하게 하는지, 그 위대함에 대한 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침으로 그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내가 아끼는 것들과 하나님을 놓고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생 치열하게 그것을 증명해 가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우리가 이삭을 바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이미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위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이삭을 바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그때는 이삭을 드릴만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목숨이 두려워서 두 번이나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잖아요?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이삭을 바칠 만큼 연단 되기까지 오십 여 년의 시간이 지난 것이죠.

우리가 연약하고 세속적이고 미련 맞아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복된 순종의 사람이 되기까지 은혜로 양육해 주실 것입니다.

 

2. 인간 아브라함은 어떻게 본성을 이기고 이 시험에 순종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정말 쇼킹한 명령과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기이하고 인상적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감정을 묵살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동물에게 찢겨 죽었다는 말에 옷을 찢고 울었다고 기록하죠.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에서 생긴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에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합니다.

자식의 죽음, 자식과의 헤어짐을 성경은 아프게 기록합니다.

몇 달 전 졸피뎀이라는 수면제를 먹고 운전을 하던 운전자가 역주행을 하는 바람에 마주 오던 차와 충돌해 상대방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암으로 죽은 아들의 납골당에 다녀오던 어머니였습니다.

사고를 조사하다 어머니의 차량 불랙박스를 열어보니 운전하면서 죽은 아들에게 건네는 혼잣말들도 녹음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 힘들었어?’

죽은 아들이 뭐가 힘들겠습니까?

이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투병하며 아파했던 그 아들의 고통이 끝나지 않고 진행형인 것입니다.

내 자식의 죽음, 생각하기도 두렵죠.

그런데 오늘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심경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합니다.

21장에서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아브라함도 역시나 우리와 똑같은 아버지인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 노년의 기댈 든든한 아들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을까요?

1) 우선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단지 명령하신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청컨대’, ‘원컨대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나님이 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청한다. 너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쳐다오

의미가 완전히 다르죠.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마치 옆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부르시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하나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지 않았다는 게 느껴지죠.

아브라함이 평소에 예배와 기도로 하나님과 진짜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돔의 심판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죠.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내 평생의 눈물을 하시고, 모든 시련에 변치 않고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는 그 은혜 때문에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고향에서 아브라함을 건져내시고 현재 누리는 모든 것을 주신 고마우신 분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청하시는 데 아브라함이 거절하겠습니까?

우리도 누가 내게 청하면 안 들어줄 수가 없는 특별한 사람이 있잖아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그런 분이고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청이시기에 망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 아브라함의 애끓는 부정이 없어진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그런 것입니다.

사무엘상6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뺏깁니다.

그런데 뺏어다 놓은 법궤로 인해 블레셋에 자꾸 재앙이 일어나는 거예요.

결국 논의 끝에 법궤를 소달구지에 실어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송아지를 젖 먹여 키우던 암소에게 그 수레를 끌게 합니다.

소의 모정으로 볼 때 절대로 수레를 끌고 혼자 이스라엘로 가지 않습니다.

만일 송아지에게 돌아오면 이 재앙이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우연히 일어났을 거라는 것이죠.

그러나 암소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울면서 벧세메스를 향해 걸어갑니다.

이게 순종입니다.

순종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순종과 우리의 희생을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2) 또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죽은 이삭도 살리실 것을 믿었던 것이죠.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바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과 영생을 믿기에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께 헌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본문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예표의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이삭의 믿음도 보아야 합니다.

이삭이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오른 것을 봐서 이십 대의 청년일 것입니다.

한 사람을 태우려면 나무의 양이 상당합니다.

늙은 아버지가 건장한 이삭을 강제로 결박해 번제단에 억지로 눕힐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삭이 스스로 결박당하고 스스로 번제단에 누운 것입니다.

이 순간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이 너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신뢰했고, 아버지의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나중에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꼭 이런 표현을 씁니다.

창세기 31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이삭의 경외하는 이(하나님)’ 53,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고

아들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기억되길 축복드립니다.

이삭은 충분히 십자가를 순종한 예수님의 예표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예표의 사람을 세우실 때 예수님과 동떨어진 사람을 세우시면 우리가 헷갈립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너무 동떨어지면 세상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오늘의 사건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성부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일 두 사람의 순종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에게 남겨주실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2) 이 사건 전체와 지명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예표입니다.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되죠.

*하나님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의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모리아땅의 한 산이 어디인지 짐작하실 수 있죠?

그 산은 바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시온산입니다.

모리아산이 성경에 딱 한번 더 나옵니다.

역대하 31절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하나님이 작심하시고 오늘 독생자를 제물로 내 줄 그 곳 예루살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 아들은 자신이 번제로 태워질 나무를 짊어지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죽일 칼과 불을 들고 모리아 산을 오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분들이라 해도 이 장면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서 심판의 칼과 불을 드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할 것이 거침없이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사건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실 예수님이 실제로 그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확인하시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불러 칼을 든 아브라함을 저지 시키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구절은 좀 유심히 보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른 분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 여호와의 사자가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성육신하시기 전의 성자하나님은 성부하나님과 구별해서 여호와의 사자로 구약에서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미래의 그 십자가의 현장에 오신 것입니다.

됐다, 아브라함아. 나를 믿어줘서 고맙다.’

죽어야 할 너와 네 아들, 그리고 네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대신해 제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들리십니까?

그리고 1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무언가 준비하셨다는 것을 아는 둣 하죠?

앞에서 이삭이 아버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있냐고 물을 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8,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이삭이 번제가 된다 해도 별도의 속죄 제물이 필요한 죄인이잖아요?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해 주셔야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숫양 한 마리가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이삭을 대신해 죽은 숫양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난 뒤 이삭을 눕혔던 그 제단이 있던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 모리아산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4,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 준비되리라 하더라

원어의 뜻을 더 잘 살려서 번역하면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그 산을 지켜보리라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바로 거기 예수님이 못 박히실 산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못박힐 곳을 바라 보시는 하나님의 심경은 어떠셨을까요?

하나님이 이 땅 모리아산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이죠.

하나님은 갈보리산에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안에 우리의 영생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모든 복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시험을 통해 믿음을 인정받은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의 정점을 지나 서서히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의 말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이삭은 어땠을까요?

한마디로 위험한 사건이 너무 없어서 설교할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삭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평탄하게 하십니다.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복이 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것과 그냥 내 생각대로 사는 것과 똑같다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겠습니까?

말씀대로 따라서 후회할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크고 대단한 일에 순종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기도하라는 말씀,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말씀, 그런 것에 순종하면 됩니다.

또 성령께서 양심에 한가지 순종할 일을 지적해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걸 순종하지 못하면 믿음이 그 상태에서 정체되거나 퇴보하고 신앙의 권태기가 옵니다.

믿음이 정체되어 있다면 그 순종할 것을 찾아 돌파해야 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배운 만큼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순종한 만큼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수록 내 삶의 부족함이 부족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젊은 날에도, 늙어지는 날에도 하나님의 크심이 우리에게 제일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할 때 복도 복으로 누릴 수 있고, 시련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 믿음이 순종으로 검증되고 점점 더 강해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