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3XpEO-S2uok
오늘 말씀은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삭 장가보내기죠.
이 내용은 67절까지 길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있겠죠.
창세기는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자가 오실 것을 잘 따라가며 읽어야 합니다.
오늘 이삭에게 아내를 데려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의 긴 내용은 그 일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이루시되 성도들이 그 일을 협력하여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늙은 종, 리브가.
이 세 성도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성도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구나’를 잘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며 사는 게 우리 목적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우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부를 찾아 결혼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자식의 배우자를 찾아 주는 것은 우리 모든 부모들의 관심사이고 책임을 느끼는 일이죠.
그런데 아내 사라는 23장에서 12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사라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홀로 남겨진 아브라함이 아내 없이 혼자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게 된 것을 보면 아브라함에게서도 인생의 애수가 느껴지죠.
이제 이삭의 나이가 40세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140세의 고령입니다.
1절,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서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늙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미 부자이고 명성도 얻은 아브라함에게 더 이상 무슨 복이 필요했을까요?
돈도 가난했다 부자가 되야 복이지 재벌이 계속 돈이 들어오는 게 무슨 복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범사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노년이 범사에 평안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육체와 정신적 건강의 복도 주셨겠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과정마다 꼭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젊을 때의 복도 좋지만 노년에 받을 복이 매우 소중합니다.
세상에서는 늙고 병든 노년이 되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복을 주시며 끝까지 아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모두의 노년을 바라보는 믿음 가지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노년에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잘 보는 눈을 구해야 합니다.
노년엔 아브라함처럼 배우자도 떠날 것이고, 자녀들도 짝을 채워 떠날 것이고, 모든 게 줄어들고 사라질 것입니다.
섭섭한 얘기지만 죽기 전에는 자신이 누운 병상 하나 차지하잖아요?
하나님만이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고 내게 복을 주십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에게 대해 그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노년에 인생에도 고락은 있을지언정 사망의 음침한 그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아들 이삭의 짝을 찾아주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어떤 원칙을 갖고 혼례를 준비했는지 부모와 자녀들 모두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에 있어서 확고한 원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자손에게 가나안땅을 주신다는 언약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1) 가나안 부족의 딸은 이삭의 신부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뜻과 묶여서 가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은 가정이라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고, 자녀 세대로 믿음의 복을 이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잘 믿고 있는 것 같다가도 중요하고 다급한 일 앞에서 신앙의 원칙을 던져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항상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믿음의 원칙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원칙은 가나안의 딸은 이삭의 신부로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땅에서 위대한 대족장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가나안왕들도 당연히 아브라함과 혼사를 맺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런 정략결혼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고대 왕족들 간의 결혼도, 대기업 자녀들끼리의 결혼도 서로 세력을 확장하고 덕을 보기 위해서잖아요?
아브라함은 그런 것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그의 방패이고 상급이시기 때문이죠.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일생에 경험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해 갈수록 사람들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 사업에 도움을 좀 주고 내 자식 앞날을 좀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점점 안 하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의 결혼도 득이 되어야 한다는 세상 기준이 아닌 신앙의 원리를 따르길 축복드립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의 딸을 이삭의 아내로 삼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지난 번 횃불언약에서 4백년 뒤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부족을 정복하고 이 땅을 차지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가나안의 후손은 멸망 당할 불신 세상의 상징이고 모형입니다.
가나안의 혈통이 이삭의 자손과 섞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는 자기와 같은 셈의 자손 중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죠.
이후의 모세 율법에서도 가나안족들과의 혼인을 계속 금합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바울사도에 의해 이렇게 적용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함께 결혼이라는 인생의 배를 타고 간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입니다.
인생 항해에 얼마나 많은 풍랑이 있습니까?
목적지가 다르면 풍랑 중에 더구나 어떻게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가겠습니까?
미혼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로 인한 환난을 살면서 감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이삭이 신부를 찾기 위해 가나안으로 가서도 안됩니다.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의 고향까지는 800여킬로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부감을 찾았다 해도 누가 그 먼 길을, 얼굴도 모르는 신랑에게 시집가겠다고 따라오겠습니까?
그렇기에 5절에서 이 일을 책임진 늙은 종이 묻는 것입니다.
만일 딱 맞는 신부감이 있는데 여기로 따라오지는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이삭을 그곳으로 데려가냐는 것이죠.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노! 아무 곳에서나 자손을 낳아 번성시키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오라 하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됩니다.
약속과 축복이 있는 곳은 하나님이 정하신 가나안땅입니다.
나중에 이삭의 아들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갔다 거기서 아내를 구하죠.
거기서 눌러 앉아 온갖 고생을 하다 20년이 지나 가나안땅으로 돌아오잖아요?
만일 신부감이 따라오지 못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절대로 이삭을 데려가지는 말아라.
이것은 다른 의미로 하나님이 당연히 이삭의 아내를 준비하셨을 것이란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면 따라온다는 것이죠.
안 따라오면 아직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성도들이 항상 떳떳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NO라고 단호히 말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세상적으로 내게 득이 될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망설임 없이 거절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우리 믿음생활에서 이렇게 세상과 선을 그은 것들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은 예배하는 날로 선을 긋고, 예수님 말씀은 반드시 지키고, 다시 세상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점점 우리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세계에 확실한 뿌리를 내리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2. 신부를 구하는 일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에게 맡겨집니다.
물론 늙은 종이 혼자 떠난 것은 아닙니다.
32절을 보면 다른 종들이 동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1) 이 늙은 종이 믿을만한 사람이었고, 충분한 경험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본문에서 다 밝혀집니다.
이 종은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이 후계자로 지명했던 엘리에셀이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 신뢰받을만한 사람을 보냈을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일처리를 보면 그의 충정심과 믿음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누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로 그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의 인격에 하나님이 스며들었습니다.
우리 인격에 세상이 스며들기보다 예수님이 스며들길 바랍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과 평생을 살며 아브라함의 신앙과 인격에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에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곁에 사는 누군가도 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이 하나님의 언약과 얽혀있음을 엘리에셀에게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늙은 종의 손을 자기의 환도뼈 밑에 넣어 맹세하게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내 시신을 가나안에다 매장하라고 맹세시킬 때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할례받은 생식기 밑에 손을 넣는다는 것은 사람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준엄한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에셀이 이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행하게 요구하는 것이죠.
2) 엘리에셀은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늙은 종은 자기가 이삭의 아내를 간택해 오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 정해 놓은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죠.
그 신부가 누군지 알 수 있도록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제시하고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희한한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 중 딸들이 물을 길으러 오는 우물에 기다리다 여인들이 왔을 때 물을 달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흔쾌히 자기에게 물을 마시게 하면 이삭의 신부감으로 1차 합격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정확히 찾아낼 수가 없죠.
그 정도는 웬만한 사람은 다 베풀 수 있는 친절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조건을 추가합니다.
그 처자가 낙타에게도 물을 주어 마시게 하겠다고 자기 입으로 먼저 말을 꺼내면 그 사람이 바로 이삭의 신부인 줄 알겠다는 것입니다.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는 처자들이 많아서 경합자가 생길 염려는 없습니다.
엘리에셀은 열 마리 낙타에 선물을 싣고 왔습니다.
낙타 한 마리가 먹는 물의 양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거의 70킬로의 물을 한번에 마신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씩만 물을 준다 해도 엄청난 물을 길어대야 하는 것이죠.
엘리에셀이 거의 가능성이 없는 식별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엘리에셀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렇게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기도대로 응답하신 내용이 길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하나님만의 신비의 영역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특권이지만 기도응답은 우리 뜻대로 안됩니다.
어제는 기도했을 때 아픈 곳이 나았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우리가 안달한다고 빨리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안달할 때는 오히려 응답을 안 주십니다.
낙담하고 연민에 빠져서 불쌍해 보인다고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떼를 쓴다고 빨리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어린 자식들이 아무리 울고 떼를 쓴다 해도 노련한 부모는 그걸 들어주지 않잖아요?
믿습니다로 확신한다고 기도가 응답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대중없이 보통 기도하지만 엘리에셀의 기도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구하는 게 제일 좋은 기도입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내게 가장 유익하고 복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을 하시는 것이죠.
오늘은 아주 급하게 응답하십니다.
15절,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아브라함이 원했던 대로 동생의 손녀 리브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리브가는 엘리에셀이 기도한 대로 친절하게 엘리에셀과 낙타에게 마실 물을 길어다 줍니다.
3) 하나님은 리브가를 진작에 이삭의 아내로 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과 리브가를 만나게 하시는 과정에는 리브가가 제 발로 이삭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신부감을 찾기 위해서 하란으로 종을 보내야 했습니다.
종은 지혜로운 기도로 리브가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데는 사람들의 의지와 행동과 함께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란에서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풍성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열 마리의 나귀에 금은 보화와 값비싼 옷들을 바리바리 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가셔서 이삭의 아내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귀한 며느리를 위해 후한 예물과 지참금을 준비하는 게 혼례의 상식인 것이죠.
성의없는 예물들을 들고 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땅으로 따라오는 신부를 찾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인간사 모든 일에 정상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실제로 리브가의 부모가 딸을 먼 곳에 보낼 마음을 먹은 데는 엘리에셀이 가져온 값비싼 선물도 한몫 톡톡히 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임을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경우는 있더라도 상식 이하는 안되는 것이죠.
엘리에셀이 하나님 앞에 내건 조건도 상식적으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아내를 준비하셨다면 사람 됨됨이가 이럴 것이다 생각한 것이죠.
돈 있는 집안이냐, 외모가 어떠냐, 건강하냐 그런 것이 아닐 거라는 것이죠.
나그네를 존대하고 동물까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을 준비하셨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가나안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엘리에셀은 아브라함 곁에서 평생 지켜 보았잖아요?
일례로 앞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뒤 매장지로 쓸 밭과 굴을 구합니다.
자신들이 죽고 나서도 자손들이 무덤을 보며 가나안땅이 약속받은 땅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땅주인은 이미 가나안땅에서 명성 있는 아브라함에게 선심을 쓰고 싶어 공짜로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혔다고 합니다.
겸손하고 정중하게 땅 값을 다 치르고 매장지를 구입합니다.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 사람 됨됨이가 예수님의 교훈과 너무 다르다면 뭔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 6호선에 천사가 나타났다는 기사가 났었습니다.
관련된 영상을 보니 20대 청년이 지하철 좌석에 누가 토해 놓은 토사물을 물티슈로 박박 닦고 있었습니다.
닦아낸 휴지가 수북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하고 대견해서 반대편에 앉았던 사람이 영상을 찍어서 올렸는데 조회수 3백만뷰가 넘었다고 합니다.
지하철공사에서 수소문해 이 청년을 찾아서 감사장과 선물을 주었답니다.
청년은 마침 자기에게 물휴지가 있어서 그랬다고 겸손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댓글을 보니 ‘도로공사에서 특채해라, 삼성 현대가 데려가라, 뒷모습도 아름답다’.
오랜만에 훈훈한 댓글로 도배가 되었더군요.
청년의 평소의 선한 생각과 습관에서 이런 선행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에셀은 친절과 미덕이 몸에 밴 사람,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부라는 걸 확신한 것입니다.
3. 리브가는 고향 아비의 집을 떠나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삭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엘리에셀을 따라 나섭니다.
리브가가 부잣집 명문 가문에 신데렐라가 되기 위한 야망으로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리브가가 살던 성이 할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따서 나홀의 성이었다는 것을 보면 그 성의 성주였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떠나올 때 유모와 여종들도 함께 보낼 만큼 재력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어떻게 안락한 고향을 버리고 한번도 못 본 신랑과 결혼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던졌을까요?
리브가는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땅으로 이주한 친척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22장에 보면 아브라함도 형제 나홀이 자손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서로 오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리브가는 엘리에셀이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긴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본문은 엘리에셀의 기도가 나오지만 뒤에는 그 기도내용을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하셨다는 엘리에셀의 감격적인 증언이 더 자세히 이어집니다.
그래서 24장이 이렇게 길어진 것입니다.
리브가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죠.
25장을 보면 결혼한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음답을 듣는 내용이 나옵니다.
리브가는 본래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것과 리브가가 떠난 것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평생 안락하게 지낼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모험을 감행한 리브가는 그렇게 믿음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타고난 본성과 자라온 세속세상을 떠나 온 사람인줄 믿습니다.
오늘 24장 전체를 다 읽어보면 한가지 특이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들 열심히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당사자인 이삭만은 수동적이라는 것이죠.
63절을 보면 이삭은 들에서 묵상을 하다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장면을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된 예수님께로, 하나님께서 신부를 이끌어 오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장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지난 주 번제가 될 나무짐을 지고 모리아산에 올랐던 이삭은, 십자가를 지고 그 산을 올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모형이었죠.
이제 구원받은 성도, 교회가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을 잠들게 한 뒤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뒤, 하나님이 하와를 데리고 아담에게 오신 것과 같은 것이죠.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연합이라고 해석하잖아요?
서서히 예수님과 그 피로 구속받은 교회의 연합의 그림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삭은 리브가를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이끌어 들이고 아내를 삼고 평생 사랑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주실 해피 엔딩, 마지막 그림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세 명의 성도가 어떤 믿음과 순종으로 성취해 가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인도하실 아름다운 계획을 그렇게 인생의 모든 일들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맟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것인지를 깨달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는 믿음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늙은 종에게서는 주인에 대한 충성과 믿음의 기도를, 리브가에게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을 우리가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에게 이삭과 리브가와 같은 믿음의 배우자를 예비하고 만나게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을 보내실 족보를 이뤄가기 위해서 오늘 이삭의 아내를 택하심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뒤에 혼자 이삭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이 왠지 쓸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노년에도 하나님은 계속 복을 주시며 함께 하셨듯이 우리의 모든 생애에도 필요한 복을 주시며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삭의 결혼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그 계획에 성도 아브라함과 엘리에셀과 리브가가 어떻게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신대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께 맞추며 복되게 살도록 믿음을 더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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