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야곱의 돌베개 (창세기28장10절-22절)

남수연 2023. 8. 3. 23:38

https://www.youtube.com/watch?v=3F7Ch_vGjas 

지난 5월에 영국 찰스국왕의 대관식이 있었습니다.

왕이 필요 없다는 시위가 한쪽에서 일어나는 중에도 대관식은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곳은 웨스트민스터 성당입니다.

전에 함께 공부했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제정했던 곳이죠.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되는 물품들은 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것들입니다.

왕관도 4백년 전 것이고 의상과 왕이 앉는 낡은 나무 의자도 역사가 깊습니다.

그런데 대관식 때는 그 의자 밑에 스코틀랜드에서 빌려오는 운명의 돌이라는 사과상자만한 돌을 집어 넣습니다.

그 돌이 바로 오늘 야곱이 베고 자던 돌이라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곱이 벧엘에 세웠던 이 돌을 애굽으로 내려갈 때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 이후 여러 경로를 거쳐서 스코틀랜드까지 가게 되었는데, 영국이 그걸 뺏어다 왕이 거기 앉아서 대관식을 치르게 됩니다.

지금은 다시 스코틀랜드에 돌려주었지만 왕의 대관식이 있을 때마다 빌려다 쓰고 다시 돌려 준다고 합니다.

어쨌든 야곱의 돌이 상징적으로 그만큼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죠.

오늘 야곱이 베고 잤던 그 돌베개가 벧엘이 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엔 꿈에 보았던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돌베개, 사닥다리, 벧엘이라는 세 단어를 기억하고 설교를 들으시면 잘 이해되고 은혜도 받게 되실 것입니다.

 

1. 야곱이 하란으로 가던 중 밤에 돌베개를 베고 자게 됩니다.

1) 지난 주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리브가의 복중에서 쌍둥이 아들들이 싸울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리브가는 태 중에 쌍둥이가 있다는 걸 하나님께 들었을 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이 누구에게 갈지를 하나님께 물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아들에게 복이 이어질 것이라 말씀하셨죠.

리브가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약속에 사로잡혀 먼 나라로 시집 온 사람입니다.

남편 이삭은 그 약속에 대해 리브가 만큼 치밀한 믿음은 아닙니다.

구약성도들의 믿음의 본질은 신약성도들과 같지만 신앙의 지식에 있어서는 완전하지 않다는 걸 감안 해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삭 부부에게 26장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그랄땅에 거주하던 때 아리따운 리브가를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아름다운 아내로 인해 화를 당할까 두려워했던 것이죠.

아내 입장에서 기가막힐 노릇이죠.

이런 일을 당하고 리브가가 남편을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남편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고,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남편의 믿음도 인정할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 야곱에게 복이 이어지도록 나서서 다 지휘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가정 불화의 명분은 장자권이었지만 실상은 네 명 가족의 약점과 죄의 본성이 얽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그렇듯이 이삭의 가족도 성스러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끈질긴 죄의 본성은 평생 우리와 함께 갑니다.

다 정복한 것 같았던 죄도 믿음이 약해지면 독사처럼 고개를 들죠.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을 때 너무 지탄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큰 아들의 사냥요리를 좋아했던 이삭은 장자의 축복을 에서에게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이삭은 죽기 전에 빨리 에서를 축복하고자 서둘렀습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먹고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리브가가 듣게 된 것이죠.

리브가는 에서가 사냥 간 사이 급하게 염소새끼를 잡아 에서의 레시피로 요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삭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을 이용해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히고 염소털을 손에 씌워 이삭에게 음식을 들려 보냅니다.

이삭은 아들 목소리에 미심쩍었지만 결국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가 저놈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형 손에 죽는 것을 막아야만 했죠.

그래서 야곱을 자기 친정인 하란의 밧단아람으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와는 혼인할 수 없으니 이렇게 된 김에 외가에 가서 아내를 얻어 오라고 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삭도 하나님의 뜻대로 장자권이 야곱에게 옮겨간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앞 3절에 보면 이삭이 정식으로 다시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어머니의 외가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외가로 가는 길은 무려 9백여킬로나 되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아내를 얻으러 가는 야곱은 지참금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말하길 지팡이 하나만 들고 외삼촌집에 왔다고도 하죠.

아마도 분노한 에서를 달래려고 내쫒듯이 보낸 것 같습니다.

축복기도는 받았지만 아버지와 형을 농락한 죄에 대한 문책성 조치였겠죠.

 

2) 오늘 본문에서 브엘세바 집을 떠나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 야곱은 노숙을 하게 됩니다.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브엘세바에서 루스까지는 약 80킬로 거리입니다.

아마도 이삼일 간 쉴 새 없이 걸었을 것입니다.

보통 여행자들은 밤이 오면 마을 어귀에 있는 여관을 찾죠.

야곱은 인적 없는 산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합니다.

야곱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과연 멀고 먼 외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외가 식구들은 거지꼴인 나를 반겨줄까?

과연 나를 믿고 삼촌의 딸을 내 아내로 줄까?

언제쯤이나 다시 아버지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 사냥의 명수인 에서의 화살이 언제 뒤에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돌베개는 베개 용도만은 아닙니다.

원문에서 추측해 보면 습격에 대비해 방어할 목적으로 머리맡에 준비한 것이기도 합니다.

돌베개라는 단어가 참 모순이면서 인생의 괴로움을 대변하는 말 같습니다.

안락하게 머리를 뉘어야 할 베개가 딱딱하고 불편한 돌이라는 거잖아요?

사람을 위로하고 편안을 줘야할 것들도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죠.

가시방석, 눈칫밥, 밑 빠진 독, 그런 말도 본래의 용도가 무색해지는 것으로 삶의 애환이 물씬 풍기는 말들 입니다.

좋아야 할 것들이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말들이잖아요?

우리 인생에서 나를 행복해야 할 것이 나를 괴롭게 할 때 돌베개를 베고 자는 야곱과 같은 것이죠.

야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종을 부리며 부를 누렸습니다.

지금은 빈털터리로 땅바닥에 누워 있는 신세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우리도 살면서 그렇게 내려 앉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 누리던 좋았던 것이 이젠 내 것이 아닐 때,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속상함이 복받쳐 오르죠.

사실 야곱은 꼭 장자가 아니라도 아버지로부터 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관심이 왠지 조부 아브라함에게로부터 내려오던 그 언약에 쏠렸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인 것이죠.

하나님께로부터 그 축복이 자기에게 이어진다는 어머니의 말도 믿었습니다.

그걸 얻으려다 이 신세가 된 것이죠.

야곱은 지금의 이런 결과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복의 언약을 팥죽 한그릇보다 못하게 여긴 에서는 야곱이 사라진 집에서 아버지 재산을 독차지 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에서는 행운의 사나이인 것이죠.

우리의 복을 세상의 복의 차원으로 본다면 성도에게 오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땅에 모든 소망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땅의 것을 얻게 두실 것입니다.

우리가 더 귀하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한다면, 하나님을 섬길 때 만나는 여러 가지 시련에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야곱에게처럼 우리 믿음을 인정하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주실 복을 따로 마련하실 것입니다.

 

2. 그 밤 야곱이 아주 신비한 꿈을 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겨우 잠든 야곱의 꿈에 어둡던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땅과 하늘을 잇는 높다란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그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꼭대기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로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셨던 성자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근심과 슬픔에 잠긴 깜깜한 밤을 비추는 빛과 신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두려우면서도 황홀했을까요?

신자들이 그런 환상 한번이라도 다 보고싶어하죠.

야곱의 꿈에 보여주신 이 환상은 단지 감탄이나 위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도하신 정확한 뜻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야곱의 씨를 통해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를 환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환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곱이 본 환상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직접 해석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장차 이루실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오늘 야곱이 본 그 사닥다리 꿈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던 제자들도 즉시 야곱의 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사닥다리라는 말을 인자라는 말로만 딱 바꾸신 것입니다.

사닥다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이죠.

인생 돌베개를 베고 살아가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갈 유일한 사닥다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께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146절에서 말씀하셨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닥다리 위에 하나님이 서 계셨다는 원문을 보면 마치 사닥다리와 하나님이 일체처럼 묘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닥다리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야곱의 이 환상에서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 천사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전달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보통 천사들이 하잖아요?

또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들도 메신저입니다.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끊임없이 예언과 정보를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모든 성경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신 것이 그 말씀입니다.

구약시대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부지런히 사역한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으로 다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닥다리 환상도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밝혀지잖아요?

야곱이 본 환상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우리도 똑같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환상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더 확실하게 아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 크신 계획 속에 야곱이 참여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13,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가나안 땅, 많은 자손, 복의 근원이 된다는 세 가지 약속이 또 나오죠?

이 약속은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만 맺으십니다.

그래서 출애굽때 드디어 가나안땅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뭐라고 알리십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죠. 그 언약 지키러 오셨다는 것이죠,

그동안 야곱은 듣기만 하고 믿었는데, 오늘 하나님은 야곱과 직접 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야곱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실수에 하나님은 놀라지 않으십니다.

죄인들이 죄짓는 게 너무 당연하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하신 그 언약들은 먼 훗날에 순차적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현재 야곱의 생애도 축복해 주십니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너무 복된 말씀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좀 신중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끌고 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는 야곱이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렇게 야곱이 자의에 의해 선택한 결과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야곱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설령 그 길에서 또 눈물로 돌베개를 적실지라도 함께 하고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수많은 잘못 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과연 그럴까요?

물론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같다면야 따르겠죠.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면 내 뜻을 꺾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걸 잘 모른다면 거의 내 생각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은 내 생각대로 살았다가 돌베개를 베게 되죠.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야곱과 같은 절망의 밤에 울면서 주님을 만납니다.

과기부장관을 지낸 정근0 박사의 간증을 들으면 그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4개월 만에 다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불과 5년 뒤인 스물네 살에 플로리다 대학의 최연소 교수가 된 전설적인 분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게 됩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걸 보던 아버지가 자기 신장을 이식해 줍니다.

그런데 이후에도 거부반응으로 흑달이 오고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분이 그런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별스럽게 만난 것도 아닙니다.

에베소서21절 주일설교였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 말씀을 듣는데 한절한절 마다 눈물이 솟구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던 중 너를 위해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에게 고마워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아들이 아프지 않았다면 네가 내게 와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너의 가족이 구원받지도 못했다는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하는 의문이 항상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16년 동안이나 신장병으로 고생했던 것이 운이 없어서도 아니고, 뭘 잘못해서도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죠.

우리에게 고난이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도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진지한 신앙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힘든 시간들도 우리는 믿음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아침에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환상을 본 야곱은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신자는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오늘 야곱이 잘 보여줍니다.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1) 야곱이 일찍 일어난 아침, 뭔가 세상이 달라진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여전히 갈 길은 험하고, 낯선 친척집에 얹혀 살며 집으로 돌아오라는 소식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한 야곱의 행동은 어제와 달리 결연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사람이 목적이 분명하면 과정의 어려움은 그래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더 힘든 일도 참아냅니다.

사람들이 왜 삶에 짜증을 내고 지겨워하며 질질 끌려가듯이 삽니까?

목적을 찾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삶의 이유를 모르고 이 삶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야곱은 목적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목적과 목적지를 찾은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고 맥빠질 때는 이 목적과 목적지를 부지런히 따르고 있지 않다는 신호입니다.

다시 그 사닥다리 환상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야곱의 아침과 같은 생동감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2) 야곱은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기념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 그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눈물의 베개, 목숨을 지키려고 챙겼던 그 돌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기념비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과거에 그 눈물과 고통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기념비가 됩니다.

그런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과거를 후회하고 애석해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극심하고 기간이 오랠수록 오히려 더 신이 나는 듯 합니다.

3) 야곱은 그 돌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항상 예배의 자리를 지킵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인 기름을 돌기둥에 붓습니다.

기름은 긴 여행에서 다친 곳을 치료하고 위급한 경우에는 팔아서 경비로 쓰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재산일 것입니다.

계산에 빠른 야곱이 가장 비싼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내 힘으로 모든 살 궁리를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진짜 보호자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살아갈 걱정을 덜 하게 됩니다.

물론 더 확신 있게 일하고 더 미래를 대비하겠지만 그것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이 뒤로도 야곱의 삶은 위태위태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와 가족들의 죄의 본성과 처절히 부딪치며 점점 복된 믿음의 조상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약속을 이뤄달라는 야곱의 기도처럼 하나님은 빈손으로 떠난 야곱에게 큰 재산과 많은 가족을 주시고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야곱의 일화는 명료하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돌베개는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인생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인생에서 우리를 들어 올려 하늘에 이르게 하시는 분은 십자가로 사닥다리를 만드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서사를 창세기부터 이렇게 진실되게 기록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들이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 받아 전해 준 이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고통스런 돌베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벧엘의 기념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에게 약속의 땅을 보장해 주시고 그 삶에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천국의 기업을 주시고, 믿음의 여정에 반드시 함께 하며 돌봐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