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3x65RrR85Oc
지난 주 형의 장자권을 도둑질한 야곱은 쫒겨나듯 집을 떠나 외삼촌집으로 향합니다.
부자집 아들이 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죠.
그러나 야곱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꿈을 꾸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닥다리는 하나님께로 갈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신차를 가린 위장막이 조금씩 벗겨지듯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오실 나라는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만드실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는 뒤로도 많은 분량이 나올 만큼 아주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룰 야곱의 역할을 보여주시고도 하나님은 야곱이란 사람에 대해 계속 관심이 많으신 것이죠.
하나님은 원래 사람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한 그런 관심이 없으셨다면 독생자를 대속제물로 주실 계획은 애초에 세우지 않으셨겠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오늘 야곱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그들과 얽혀 사는 생애가 이렇게 자세히 기록된 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관심있게 지켜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바라보시는 시선처럼 우리도 지켜보십니다.
그러니 오늘 야곱을 통해서 잘 배우고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 야곱은 먼 여행을 마치고 이십 년을 머물 게 될 외삼촌 집에 도착합니다.
1절,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1) 우리말 성경은 길을 떠났다고 번역했지만 원어상으로는 ‘발을 높이 쳐들었다’라는 식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야곱의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다는 걸 나타내는 것이죠.
형의 살기 어린 눈을 피해 집을 나올 때 야곱의 걸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야곱의 발걸음이 이제 날아갈 듯한 것이죠.
은혜를 받으면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걸 아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20여일 걸렸을 하란까지의 여정을 아주 간단히 기록합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큰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죠.
사실 무법하던 시대에 혼자 20여일의 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어떤 부족들이 잡아다 종을 삼으면 그만인 것이죠.
아무리 징계성이 있다 해도 이삭과 리브가가 귀한 아들을 이렇게 내 몬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마치 형에게서 가로챈 하나님의 축복이 진짜 야곱에게 임하시는지 테스트라도 하려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실 빈손으로 나온 야곱이 가나안땅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재산과 가족들을 거느립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야곱에게 복을 주신 증거인 것이죠.
내게 뭔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더라도 말씀의 약속과 믿음이 있다면 무엇이든 우리에게 이루게 하십니다.
하란까지 가는 길이 길고 고달픈 여행길이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에 소풍을 가듯 기분 좋게 걸었을 것 같습니다.
발을 높이 쳐들었다는 단어가 꼭 맞는 것이죠.
지난 주 발걸음이 가벼우셨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매일 발걸음이 가볍길 축복드립니다.
2) 그런데 야곱의 걸음걸이만 달라진 게 아닙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야곱의 성격이 좀 바뀐 것을 보게 됩니다.
간혹 큰 사건을 겪고 나면 사람의 성격이 바뀌는 경우가 있죠.
지난 주 살펴본 바로는 야곱이 조용한 성격의 내향인이었잖아요?
2절부터 야곱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야곱은 우물이 있는 한 성읍의 들판에 도착합니다.
마침 그 우물가엔 성읍 목자들과 세 떼의 양무리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동료 목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다 모이면 우물을 덮어둔 무거운 돌을 옮기고 다 같이 양에게 물을 먹이는 게 이들의 규정이었다고 합니다.
물이 귀한 중동지역인 만큼 다른 동네 목자들이 우물물을 축내는 걸 막으려는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먼저 목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겁니다.
4절,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누가 보면 야곱이 그 땅 원주민인 줄 알겠죠?
내성적인 야곱이 ‘내 형제여’ 라며 적극적이고 친근한 관심을 보입니다.
야곱에게 이전에 없던 자신감과 적극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가 평안하냐’ 시시콜콜 대화를 이어갑니다.
내향인들은 원래 스몰 토크 스타일이잖아요?
혹시 대화가 길어질까 봐 묻는 말에 짧게 대답만 하는 게 내향인이거든요.
이전까지는 야곱이 말한 게 몇 마디 안 나옵니다.
이제부터는 야곱이 하는 말이 자주, 길게 나옵니다.
야곱이 단지 외삼촌 집을 찾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물은 것만은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야곱이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해가 중천인데 왜 벌써 가축을 모아들였냐는 것입니다.
얼른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더 먹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런 걸 참견할 게 아니잖아요?
목자들도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못 하겠노라’
우리 규정대로 할텐 데 왠 참견이냐는 것이죠.
이후를 보면 야곱은 목축 전문가였고 성격도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눈에 목자들이 일을 덜 하고 모여서 농땡이 부리는 것이 보였던 것이죠.
앞으로 야곱이 얼마나 입에서 단내나게 가축을 칠지 묘한 복선이 깔리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야곱으로 말하자면 남에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할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축복과 언약 때문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또 이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을 만났고, 이 정도 엄청난 약속을 받았다면 달라질 수 밖에 없죠.
이전의 야곱은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했던 열등감의 사나이였습니다.
여러 부족함에서 열등감이 생기지만 가족처럼 삶에 영향력이 큰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열등감이 생깁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는 것을 알수록 치유됩니다.
우월감도 열등감 만큼 병입니다.
우월감도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의 실체를 제대로 알게 되면 치유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변합니다.
열왕기하8장을 보면 엘리사가 보낸 종이 북이스라엘 군대장관이었던 예후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악한 아합왕가를 대신해 왕으로 세우신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게 왕에 대한 쿠데타잖아요?
이 말을 하고 두려워서 종이 냅다 도망칩니다.
그런데 예후가 이런 신빙성도 없어 보이는 작은 사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 스스로 일어나 군사력을 갖춰 아합 가문을 처단하고 왕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바울사도가 말씀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받으면 우리에게도 말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고, 지키려 하고, 말씀대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은 나 자신만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무리 내향인 성도라 할지라도 주변사람들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된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야신이라고 불리는 김성0감독이 최강야구에서 상대팀 선수 타격자세를 교정해 주는 영상이 있더군요.
되게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야구에 있어서만은 내 팀이나 네 팀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야구에만 진심이어도 이렇게 이타적이 되고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지게 되는 것 같더군요.
오늘 야곱이 처음 보는 목자들에게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것 같지만 이게 자기에게서 나온 게 아닌 것입니다.
야곱 자신은 몰랐겠지만 우리 눈에 그의 변화가 보이듯이 우리가 변화된 것도 사람들 눈에 보입니다.
성도들이 수줍게 자기 신앙만 가꿨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 큰 구원이 이루어졌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교회와 내 주변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참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 때 마침 라반의 딸 라헬이 아버지의 양떼를 몰고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우물에서 리브가를 만났던 것과 데자뷰 같죠.
물론 야곱이 성에 들어가서 수소문해 라반의 집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짜맞춘 듯한 절묘한 상황은 하나님이 야곱의 삶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짜릿한 사인인 것이죠.
사소한 일이라도 신기하게 들어맞을 때 우리도 ‘하나님이 그러셨구나’ 뭔가 믿음이 뚫고 들어오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라헬이 다가오자 야곱이 갑자기 돌발적인 행동을 합니다.
장정 여럿이 들어야 할 무거운 돌을 들더니 라반의 양떼에 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야곱이 우리가 상상하던 좀 허약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런 모습을 보면 예쁜 사촌에게 호의를 얻자고 규정도 어기고 우물물을 새치기하는 영락없는 야곱 근성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바뀐 야곱과 과거의 야곱이 공존하는 것이죠.
우리 안에도 성령으로 변화된 새사람과 이전의 옛사람이 공존합니다.
어떨 때는 내 옛사람이 요즘 날씨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느껴집니다.
그게 옛사람의 나쁜 인격인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이 쉽게 다뤄지지 않죠.
옛사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야곱의 변화된 부분을 우리가 보았지만 그 이상으로 강한 야곱의 본성이 몰고 가는 고달픈 생애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는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2. 야곱이 라반의 두 딸과 결혼하게 된 사연을 살펴보겠습니다.
1) 라반은 조카 야곱을 지나치게 반기며 맞아 줍니다.
성경에 드러난 외삼촌 라반은 탐욕적이고 교활한 사람입니다.
돈을 위해서는 딸도, 조카도 이용해 먹는 그런 사람이죠.
라반이 야곱의 등장에 반색을 한 것은 오래전 동생 리브가를 시집보낼 때 받았던 거액의 지참금 때문입니다.
과거 엘리에셀이 낙타 열 마리에 싣고 왔던 예물을 받았던 라반입니다.
야곱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런 기대에 차서 뛰어 나왔겠죠.
그런데 남루한 행색으로 혼자 나타난 야곱을 보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빈손으로 삼촌집을 찾게 된 이유를 다 털어놔야 했고, 라반은 야곱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걸 파악합니다.
한 달간 야곱을 관찰한 라반은 부지런하고 일머리가 좋은 야곱을 붙잡아 놓는 게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넌지시 품삯을 받고 일을 하라는 제안을 합니다.
라반의 두 딸 중 동생 라헬을 사랑했던 야곱은 칠년 품삯 대신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야곱의 수중에 돈이 없고, 라헬을 사랑한다는 걸 안 라반은 그런 계산까지 다 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칠년 품삯이면 딸의 지참금으로 손해 날 게 없는 큰 돈이죠.
그래서 야곱의 칠년 머슴살이가 시작됩니다.
중동지방의 목축은 사방팔방 양떼들을 몰고 풀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매일 양떼와 함께 자며 양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비천한 노동입니다.
야곱이 뒤에 보면 자기가 한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31장40절,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이런 고된 노동을 야곱이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오늘 본문에서 한 줄로 표현합니다.
20절,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여기까지 야곱의 인생은 힘들기는 해도 좋았습니다.
곧 아내를 얻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장밋빛 꿈을 꾸었던 때죠.
2) 칠 년이 지나자 야곱은 드디어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요구합니다.
라반은 마을 잔치를 한 뒤 밤에 라헬이 아닌 레아를 신방에 들여 보내죠.
라헬인 줄 알고 첫날밤을 보낸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 황당하고 기가 막힌 현실을 마주합니다.
신부가 레아였습니다.
이런 신부 바꿔치기는 역사상 거의 들어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라반이 신부를 구분 못할 정도로 야곱에게 술을 진탕 먹였을 것입니다.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던 반면 레아는 그냥 시력이 약했다고만 하죠.
한마디로 별로 예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라반은 이런 레아를 야곱에게 떠넘기듯이 줘 버린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 라헬도 아내로 주고 7년을 더 일 시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이죠.
황당한 사기극에 넘어간 야곱이 아침에 라반에게 달려가 따집니다.
25절,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이럴 줄 알았던 라반은 준비한 대로 뻔뻔하게 나옵니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 하는 바이라
이 말은 형 대우를 하지 않았던 야곱에 대한 조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형의 권리를 속이고 차지한 너보다는 내가 더 의롭다는 것이죠.
잔말 말고, 레아와 일주일 신혼을 지내면 바로 라헬도 아내로 줄테니 그 댓가로 칠년 간 또 나를 섬기라고 합니다.
간절히 사랑했던 라헬 대신 레아를 받은 야곱은 속은 자신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남을 속이기만 했던 야곱이 한 수 위 라반에게 속은 것이죠.
야곱은 지켜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런 악몽을 주신 걸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지켜주신다는 것은 야곱과 관계 된 모든 사람, 모든 환경을 다 유리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살아가게 만드셨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전이나 이후나 사람들은 창조주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지난 한 주 내내 내 의지대로 선택하며 살았잖아요?
하나님은 라반의 의지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자기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완전한 인격체가 되게 하신 핵심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임의대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단지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으셔도 우리가 잘못된 길을 굳이 택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야곱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사악한 라반에게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시련이 나의 잘못이나 선택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왜 이렇게 칼부림 사건이 많은지 길을 걷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이런 수많은 사고, 질병, 자연 재난, 잘못 만난 인간관계, 이런 일들은 내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난무하는 세상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우리가 그 세상 속에 살아가기에 내 뜻과 상관없이도 불행을 당하는 것이죠.
오늘 야곱의 경우를 통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3. 야곱의 아쉬운 선택으로 이 가정의 앞날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이미 레아를 아내로 얻은 야곱이 라헬을 포기하지 않고 라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겠죠.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었다, 나도 피해자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렇게 된 상황 속에서 결정과 선택을 올바르게 하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야곱은 라헬까지 아내로 취하는 선택을 했기에 평생 이 가정에 끔찍한 고통이 따라 다니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발적인 선택은 각자가 그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두 딸을 한 남자에게 줘 버린 라반은 결국 두 딸을 다 잃어버립니다.
두 딸은 아버지를 증오하며 가나안을 향했고 이후 영원히 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동생과 야곱이 서로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지시에 못 이기는 척 야곱을 차지한 레아의 선택도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외모로 항상 동생에게 비교당한 레아는 자신의 피해의식으로 항변할 것입니다.
짝사랑했던 야곱을 남편으로 맞으려면 내게 무슨 방법이 더 있었겠냐.
그러나 그렇게 남편이 된 야곱은 평생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더 목마름 속에서 동생을 질투하며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죠.
이미 언니가 야곱의 아내가 된 상황에서 라헬은 자기를 향한 야곱의 사랑에 자만하며 두 번째 아내가 됩니다.
처음부터 그 자리는 내 자리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 또한 언니가 계속 아들을 낳는 것을 바라보며 참담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다면서도 언니에게 드나들며 자식을 낳는 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라헬에게도 하나님이 아들 요셉을 주십니다.
라헬은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던 중 둘째 베냐민을 낳다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을 붙잡지 않았었다면 이런 죽음은 피할 수 있었겠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두고, 막내는 단 한번도 젖을 물려보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경쟁적으로 자식을 낳던 자매는 자기들의 여종까지 야곱에게 들여보내 또 다른 아들을 낳게 합니다.
야곱의 가정은 네 명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배다른 열두 형제들이 우글거리는 집안이 된 것입니다.
이 집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일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에서 각자가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야곱이 자기 부모처럼 이런 때 어떻게 하면 될지 좀 더 시간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어땠을까요?
사랑했던 여자하고 꼭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첫사랑하고 결혼하신 분 없잖아요?
하나님은 분명히 야곱에게 레아 한 명에게 충실하라고 응답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충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보여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만일 야곱이 라헬을 포기했다면 하나님은 레아를 통해서 열두 아들을 주시고 열두지파를 이루어 주셨을 것입니다.
레아가 예뻐 보이고 사랑하게도 하셨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레아를 야곱의 아내로 인정하셨기에 레아의 넷째 아들 유다의 족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도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아브라함의 가족 묘실에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안치하고 자신도 거기에 매장됩니다.
우리가 오늘 야곱과 얽힌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을 보면서 배울 점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속에서 내 욕망과 세상 기준으로 선택한 일들로 인해 우리 인생은 이렇게 더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내 앞의 상황들을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억지로라도 살아보면 반드시 그 효력에 놀랄 것입니다.
구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런 죄악으로 얼룩진 가족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통해 세상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야곱은 자기 집안의 행복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세상이 야곱으로부터 얻게 될 복이라고 하신 것은 처음부터 야곱이 아닌, 야곱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린 속죄의 보혈로 온 세상에 흩어진 주님의 신부인 성도, 교회를 사셔서 영원한 하늘 가정에 속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곱 가정의 치부는 앞으로도 계속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래도 이 가정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고 구원받은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 부끄럽고 실망스럽다 해도 우리도 같은 구원의 언약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녀들입니다.
다만 세상대로 선택하는 삶에 어떤 고통이 따라오는지를 야곱의 가정을 통해 오늘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되는 재난들은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때론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많은 불행과 고통은 말씀대로 살면 우리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대로 살아감으로 형통하고 평탄한 삶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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