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대본을 본인 스스로가 쓰는 것이라면 야곱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일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의 굉장한 계획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안 뒤, 형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는 위험한 대본을 쓴 것이죠.
사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만 귀띰하셨습니다.
굳이 작은 아들이 큰 아들의 자리를 차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야곱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약속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죠.
리브가와 야곱이 약속의 성취를 위한 대본을 잘 못 쓴 것입니다.
잘못 쓴 대본은 두 사람이 다시는 못 만나게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십년 처가살이와 머슴살이의 인간극장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 쓴 인생대본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결말을 만드시는 연출가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야곱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된 내용입니다.
연출가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던 귀향을 지휘하신 것이죠.
이것이 야곱의 귀향 이야기의 핵심일 것입니다.
우리의 대본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인생 끝에 엉뚱한 장소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인생 여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을 갖게 되시길 바랍니다.
30장부터는 31장까지는 야곱이 처가살이를 정리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1. 가나안땅으로의 유턴이 시작되는 것이죠.
1) 야곱이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려고 첫 번째 시도를 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지참금 명목으로 14년간을 라반의 일을 해 줍니다.
14년이면 타향도 고향이 될 세월이죠.
아내와 자식들은 다 밧단아람이 고향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된 바에 야곱은 하란에 눌러 살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에게서 요셉이 태어나자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땅 아버지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왜 이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까요?
우선은 의무 노역 기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전엔 돌아가려 해도 채무관계 상태라 갈 수가 없는 것이죠.
또 유독 요셉을 낳은 뒤에 돌아갈 마음을 먹은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요셉사랑이 어땠는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 외에 다른 자식들에게는 별다른 부성애가 없었습니다.
유독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힐 정도로 사랑이 애틋했습니다.
부모 마음이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당당하고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죠.
부모가 자식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일 것입니다.
야곱도 처갓집에 얹혀사는 아버지 모습을 커가는 자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가나안 아버지집의 재력과 명성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이제 가족들을 이끌고 잘사는 고향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때 라반은 아차 싶었던 것이죠.
라반은 일 잘하는 야곱과 그 많은 가족들의 노동력이 사라질 것을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에겐 아내 넷에 딸까지 해서 자식이 열둘입니다.
나무꾼이 가졌던 선녀 옷을 내준들 야곱이 마음대로 떠날 수 없을 거라 라반은 단정지었던 것이죠.
다급해진 라반은 그제사 품삯을 정하고 자기와 함께 있자고 야곱을 붙듭니다.
야곱도 돈 한 푼 없이 식솔들만 우르르 거느리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처가에 6년을 더 눌러 앉게 됩니다.
2) 그러나 두 번째로, 진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시각이 다가왔습니다.
그 시간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1절,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절,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오늘 야곱은 장인과 사촌들의 싸늘한 시선과 바뀐 안색에서 불안을 감지합니다.
20년 전 형의 눈빛이 그랬잖아요?
라반의 안색이 달라진 것은 야곱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6년 만에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6년 전, 야곱을 붙잡기에 다급해진 라반은 야곱과 임금협상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라반과 야곱의 임금 협상이 희한한 조건으로 타결됩니다.
30장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오늘 본문과 연관이 있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은 돈이 전부인 라반이 어떤 임금 협상을 해도 자기 유리한 대로 뒤집을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동안 임금을 열 번이나 마음대로 바꿨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라반이 꼼짝 못할 절묘한 조건을 제안합니다.
야곱이 거래의 천재잖아요?
팥죽 한그릇에 형과 장자권을 거래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삯을 정하지 말고, 자신이 돌보는 라반의 양과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 중에 아롱진 것, 얼룩무늬, 줄무늬 있는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흰색의 양과 검은색의 염소만으로 시작하겠다고 합니다.
양은 거의 흰색이고 염소는 검정색으로 단색이죠.
간혹 점박이나 얼룩무늬가 나오긴 하지만 흔치 않습니다.
라반이 들어보니 야곱이 아주 호구 같은 제안을 하는 것이죠.
무늬 있는 양이나 염소가 드문드문 나온다는 걸 잘 아는 라반은 얼른 야곱의 제안을 받아줍니다.
야곱은 왜 이런 불리한 카드를 꺼낸 것일까요?
월급 받아서 언제 14년 세월을 만회하겠습니까?
목축사업을 해야죠.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지 않다면 야곱의 청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요?
그래 놓고 야곱은 어떻게든 얼룩무늬 양을 더 낳게 하려고 나름대로 묘수를 부립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신빙성 없는 수태 방식이 등장합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껍질을 얼룩덜룩하게 벗겨낸 뒤 교미하는 양 앞에다 꽂아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흰색의 부모 양들 사이에서 아롱진 새끼를 얻은 것이죠.
아마도 야곱은 실험적으로 미리 시도도 해 봤을 것 같습니다.
야곱이 또 목축 전문가잖아요?
흰색의 양 사이에서도 얼룩무늬 양이 나온다는 걸 알았고 그 출생의 비밀을 알려고 묘수를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과학적으로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까?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돌하루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과 같은 것이죠.
그게 사실 유전자의 비밀이라는 게 현대에 멘델의 법칙에서 발견되잖아요?
흰 양끼리 교배해도 얼룩무늬 양이 나오는 이유는 부모 중 누군가의 유전자 속에 얼룩무늬 유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하면 그런 인자를 가진 부모 밑에서는 비율적으로 흰색과 얼룩무늬가 3대1로 나옵니다.
야곱은 열심히 자기가 고안한 방법을 써서 얼룩무늬 양을 얻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이 비율만 조정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나중에야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꿈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잘해서 잘 된 줄 알았던 것들이 그게 아닐 수가 있는 것이죠.
라반은 그렇게 야곱이 잘되는 걸 얼마나 훼방했겠습니까?
8절을 보면 예상대로 라반이 이 계약조건도 자기 좋을 대로 뒤집었다고 합니다.
라반이 보니까 아롱진 무늬의 양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점박이만 네 것으로 하자는 것이죠.
그러고나면 양이 낳는 모든 새끼들이 점박이였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얼룩무늬가 있는 것이 네 몫이라고 하면 또 전부가 다 얼룩무늬를 낳았다는 것이죠.
이렇게 라반의 양떼는 불어나지 않고 야곱의 소유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매달 얼마의 품삯을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부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13절까지는 야곱이 밧단아람의 20년 세월을 아내들 앞에서 반추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다는 뜻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지나온 인생이 거의 다 해석이 되잖아요?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이 십사년 동안 수고한 댓가를 육년 만에 만회하도록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고생하면서도 얻는 것은 적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야곱보다, 라반보다 더 계산적이십니다.
우리의 노력과 기도를 반드시 셈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때로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것을 응답하십니다.
잘 낫지 않아서 기도하다 포기했던 질환도 그래서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너무 기대를 안 하고 삽니다.
‘세상은 나대로 꾸려가 볼 테니 하나님은 천국만 준비해 주세요.’
그런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도 눈여겨 보시고 기도도 들으십니다.
야곱이 장인의 양떼를 성실히 돌보고 그의 재산만 불어나게 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야곱에게 돌아오게 하시잖아요?
라반의 양떼가 한 백마리였다면 그 양들이 낳은 새끼들도 그만한 수준 밖에 안됩니다.
수백마리 양떼를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돌보았더니 결국 그게 자기 것이 된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하는 믿음 뿐 아니라 일터에서의 우리도 지켜보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모든 직무에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직장 일이라는 게 열심히 일하나 시간만 보내나 내 월급에 아무 관계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실히 일할 때 사람들도 알아보고 하나님도 보고 계십니다.
결국 성실히 일하는 성도들은 사회생활에서 인정받고 하나님의 계산대로 보상도 받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 빠진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3절,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잃어버린 20년의 수고를 되찾아 주셨지만 밧단아람에서 재산을 늘리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야곱에 대한 목적은 아닙니다.
성경은 계속 성도들을 가나안땅으로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그렇게 부르셨고, 야곱을 밧단아람에서 다시 부르셨고, 야곱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들을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땅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리가 편하면 안주하려 합니다.
잘 나가는 길에서 이 길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은 없죠.
야곱이 부자가 된 상황에서 가족 관계까지 편안하다면 굳이 에서가 버티고 있는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겠죠.
폭신하던 보금자리 속에 따가운 가시가 들어오면 안주하던 곳에서 일어나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라는 신호인 것입니다.
야곱이 부자가 되자 장인의 얼굴색이 변합니다.
야곱도 이 정도까지 양떼가 불어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축복에는 그에 따른 부담과 책임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좋은 것, 또 좋은 것, 그 다음에도 좋은 것이 오길 기대하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인생에 섞어 놓으셨다고 전도서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이렇게 불편한 상황이 되자 야곱은 이제 여길 떠날 때가 되었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우리도 그만해야 하나 갈등하게 되잖아요?
그럴 경우 어떻게 결정할지가 큰 고민이죠.
무언가로 부터 떠날 것을 고민하고 있다면 가급적 미적거리는 게 좋습니다.
더 견뎌보고, 더 기도해 보고, 내가 결정하기보다 타의로 결정되게 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타의 속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장 큰 것이죠.
물론 좋은 의미에서 선택하고 결정을 해야 할 일들은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빨리 결정해야 하겠죠.
기회는 무한정 기다려주지는 않으니까요.
사는 게 참 기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그런 면에서 상당히 유리한 것이죠.
우리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생각해 보면 변화의 시작은 사람관계일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 점점 조여올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떠날 것을 명령하십니다.
2)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의 언약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11절,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길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야곱과 하나님의 사자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게 느껴지죠.
야곱아! 내가 여기있나이다!
13절,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한마디로 내가 너를 데려가려고 왔다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서원한 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를 섬겨라, 너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일을 내가 행하려 한다.
그런 말씀인 것이죠.
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 속에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11절에서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셨다고 하죠.
그런데 13절에서 그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합니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사닥다리 위에 계시던 벧엘의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이신 성자하나님이신 게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이 한 분이신 단일신이시라면 하나님의 사자도 되고 하나님도 될 수는 없죠.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야곱의 일생에서 성자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이루실 구속사역을 스스로 준비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이 왠지 먹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생각보다 얼마나 위대하신 것일지 지금은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야곱아, 부르시고 내가 너를 도왔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함께 갈테니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와도 동행하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성을 지닌 채 세상을 믿음으로 살며 가는 길이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힘들고 복잡합니다.
야곱의 인생도 사실 그래서 꼬이기 시작한 것이죠.
에서처럼 세상적으로만 살면 망할 때 망하더라도 심플합니다.
믿음으로 삶을 선별하며 사는 게 만만치 않기에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어려운 문제는 당장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 남은 것은 믿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인 것이죠.
야곱의 갈등이 본문 뒤에 계속 드러납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내 방법도 썼다 기도도 했다 우왕좌왕하는 그런 우리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땅에 가기 위해 야곱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형과의 문제입니다.
사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에서 돌아오라는 기별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에서의 분노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는 뜻이죠.
뒤에 보면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에서가 사백명이나 동원해서 야곱과 싸우러 옵니다.
가족 간에도 사건과 감정들이 서로 얽히면 죽일 듯이 증오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형제간에도 칼부림이 일어납니다.
방송인 박수홍씨 같은 경우도 형과 원수가 되어 법정 싸움 중이잖아요?
친형이 회삿돈과 박수홍씨 개인 돈을 포함해서 60억 이상을 횡령했다고 하죠.
판결이 어떻게 나든 이 형제가 과연 화해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무리 바꾸려 한다고 해도 마음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잖아요?
아버지 집으로의 귀향을 잊은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에서가 있는 한 귀향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들이 야곱을 따라 나설지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4절부터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불러 가나안땅으로 떠날 결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장인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 6년 전 임금협상,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의 많은 재산을 얻게 해 주신 것들로 아내들을 설득하는 것이죠.
나중에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야곱이 에서를 위해 선물로 준비한 양, 염소, 소, 낙타가 도합 550마리입니다.
총재산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되죠.
그렇게 20년 수고를 보상해 주신 하나님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셨다고 아내들을 설득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권하는 것이죠.
야곱의 기적적인 재산형성을 옆에서 본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말에 적극 동조하고 야곱과 함께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평생 보아왔던 아버지 라반의 악을 혐오하며 남편과 남편의 하나님을 따라 가나안땅으로 가게 된 것이죠.
세 번째는 라반이 과연 딸과 손주들과 재산을 끌고 나가는 것을 허락할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택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문 뒤에 나오는 데,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쳐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것처럼 또 몰래 라반을 속이고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과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게 이만큼 어렵습니다.
결국 라반이 뒤쫒아 와서 하는 말이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처럼 끌고 갔다’고 합니다.
야곱만 죽이고 가족과 재산을 다 가져갈 뻔한 빌미를 준 것이죠.
결국 믿음으로 부딪쳐 해결해야 할 것은 피해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못하게 막으셨기에 그 위기를 또 모면하고 결국 라만과도 화해하며 헤어지게 됩니다.
에서의 문제만 해결되지 않은 채 가나안땅까지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 가서극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이것은 다음 주에 살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약속을 믿고 두려운 현실을 스스로 마주해야 했던 것이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나라의 약속도 불확실한 현실을 믿음으로 뚫고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야곱이 벌인 일로 20년 타향에서 속절없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말씀하신대로 야곱을 다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라반에게 착취당한 모든 재산도 되찾게 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야곱 같은 선택을 하죠.
그렇게 세상에서 헤매다 불쾌하고 불편한 일을 만나고 나서야 하나님을 떠올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만도 하나님의 은혜죠.
그러나 야곱의 죄성과 성질이 야곱을 풀무불 같은 인생 속으로 계속 끌고 들어갔던 것도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사랑했던 요셉을 형들이 노예로 팔아버리게 된 것도 결국은 야곱의 지독한 편애 때문이었잖아요?
요셉을 잃은 야곱에게 그 이상 더 어떤 지옥이 있었겠습니까?
믿음으로 다뤄지지 않은 본성이 우리를 그런 시련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요즘 왕의 DNA란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한 학부모가 자기 아이가 왕의 DNA를 가졌다며 아들을 왕자처럼 대우해달라는 편지를 쓴데서 나온 말입니다.
아이의 자존감이 심하게 훼손되니 고개 숙이는 인사를 강요하지 말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합니다.
우리야말로 왕의 DNA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DNA가 구현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족장 야곱은 마지막에 가서야 믿음의 조상의 위엄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자녀인 정체성을 증명하며 살아가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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