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야곱은 아버지집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에서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문제의 본질이 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씨름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야곱에게 있는 문제를 모른다면 이번에 에서 문제가 해결되어도 제2, 제3의 에서가 앞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반복되는 문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면 자녀 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련과 갈등은 대개 우리 사람 됨됨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야곱과 우리를 연단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게 된 것, 에서를 만나기 위한 준비,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가나안땅을 향해 가던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야곱의 인생은 이제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나라와 연합되어 있는 것이죠.
우리도 나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고 하나님나라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라반의 집에서 20년 더부살이 한 야곱에게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지난 주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걸림돌이었던 라반의 문제가 잘 해결되었죠.
이제 고향에 버티고 있는 에서의 문제만 해결되면 됩니다.
야곱에게 에서는 넘을 수 없는 두려운 산 같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가나안땅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이 가려는 가나안땅에 동행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야곱을 통해 세우실 나라를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파괴하려는 공격자가 있다는 뜻이죠.
현실에서는 야곱과 이스라엘을 방해하는 사람이 에서입니다.
사실 에서가 야곱과 가족들을 몰살시키면 하나님의 언약이 백지화됩니다.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죠.
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섭섭하게 하면 가차 없이 반역하는 게 에서로 대변하는 죄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로 몰고 간 것이잖아요?
지금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과 동행한다는 것은 에서의 배후에 있는 영적인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세상에 악한 영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걸 드러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악령들의 존재를 다 드러내고 폭로하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정말 많이 나오죠.
사람들은 한 명의 귀신이 들렸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네 이름이 뭐냐고 물으시자 군대 귀신이라고 하잖아요?
레기온은 로마시대 군대 단위로 가장 큰 단위로 6천명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을 쫒아 내시자 2천마리 돼지떼에 들어가 몰살시켰잖아요?
구약성경에서는 아직 사탄과 악령들에 대한 계시가 제대로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은 당연히 구약성경 시대에도 활동합니다.
에서의 손자 중 아말렉이라는 족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말렉족속은 앞으로 4백여년 뒤 애굽에서 탈출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의 후미를 공격해서 사상자를 냅니다.
막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낙담시킨 전쟁입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기도하는 양팔을 들어주고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웠던 그 전쟁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 아말렉에 대해 내가 아말렉과 영원히 싸우리라고 하십니다.
아말렉이란 나라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싸우시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배후에서 새로운 아말렉을 계속 만들어 내고 조종하는 사탄의 세력과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야곱과 가족들을 전멸시키려고 하는 데서 마귀의 계략이 분명하게 드러나죠.
야곱과 가족을 다 죽인다고 에서가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진 않을 거잖아요?
하나님의 관리 안에서 사는 게 싫어서 장자권도 판 것이 에서입니다.
뒤에 보면 결국 에서는 야곱과 화해하고 가나안땅에서 함께 삽니다.
그런데 에서는 가축이 너무 많아서 함께 살 수 없다며 쿨하게 요단 동편 땅으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약속의 땅, 그런 거엔 관심도 없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달리 미련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던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이십년을 복수의 칼을 갈았던 데는 창세기3장에서부터 등장한 뱀의 후손, 약한 사탄의 존재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이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존재를 폭로하셨고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마귀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을 취하라고 하십니다.
이것들이 악한 마귀와의 전쟁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싸움을 전쟁에 빗대 긴급하게 가르치시는 데 성도들은 너무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무엇인지를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쫒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귀신을 내쫒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악령들이 간섭하지 않게 하려면 매일의 기도로 우리 자신을 잘 방어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마귀에게 속한 생각, 말,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에서처럼 미움을 이십 년 품고 살면 그 마음에 마귀가 아마도 군대를 구축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삶을 성경이 가르치시는 좋은 것들로 채워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합니다.
아무리 천사의 군대를 보아도 야곱에겐 에서가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를 약속하셨는데, 우리도 불안해 하면서 살아가죠.
눈 앞에서 다 이뤄진 다음에야 믿는 사람의 한계입니다.
야곱은 먼저 에서가 아직도 자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지 사환을 보내어 알아보게 합니다.
20년간 돌아오라는 소식이 없었던 걸 보면 에서가 분을 풀지 않았다는 것을 야곱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예상대로 에서를 만나고 돌아온 사환은 최악의 소식을 전합니다.
에서가 4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환영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아닌 것이죠.
야곱에게도 종들과 가족들이 있지만 자식들은 아직 다 어리고 종들은 전쟁을 치를 무사가 아닙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야곱 쪽이 전멸당할 것입니다.
야곱은 대비를 해야 했습니다.
먼저 자기의 가축떼를 두 떼로 나누어 종들에게 맡깁니다.
에서가 한 떼를 공격하는 동안 나머지 한 떼가 시간을 벌어 도망쳐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야곱은 큰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9절부터 12절까지가 야곱의 기도입니다.
이제까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기도한 내용이 이렇게 자세히 나온 적은 없습니다.
야곱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이해하고, 믿고, 올바른 기도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은근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에 풍파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이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도우심을 구합니다.
11절,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라는 것이죠.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하고 보장하신 것들은 우리가 담대하게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제목을 선별할 필요도 없고, 좋은 것들을 얻기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칼에서 구원하시길 정말 간절히, 간곡히 빌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야곱은 작전을 변경합니다.
두 떼로 나눠서 도망칠 작전 대신 에서에게 선사할 많은 가축을 준비합니다.
우리도 기도하기 전에는 어떤 것이 최상의 방법인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나면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날 때가 종종 있죠.
기도는 분명히 올바른 상황 파악과 대처할 지혜를 얻게 해 주십니다.
야곱이 준비한 선물은 염소, 양, 소, 나귀, 낙타가 모두 550마리나 되었습니다.
뒤에 보면 에서를 만났을 때 준비한 이 가축들을 전부 에서가 받아갑니다.
야곱의 이 방법은 좋은 방법일까요, 나쁜 방법일까요?
저는 전에 생각하기를 어차피 화해하게 해 주실 텐데, 야곱이 꾀를 부리다가 괜히 재산의 절반을 에서에게 상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묵상하다가 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에서의 마음을 돌리려 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야곱이 기도하고 난 뒤 지혜롭게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족 간의 문제로 20년 전 사건을 본다면 절대적으로 야곱이 형에게 잘못한 일입니다.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버렸다면 요즘 시대 상속권을 가로챈 것과 같습니다.
이로 인해 에서가 지난 20년간 마음에 분노를 품고 살았다면 당연히 야곱이 그에 대한 보상과 위로를 하는 것도 맞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 안에는 마땅히 지혜롭고 적절한 행동과 보상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뜬금없이 바꿔 놓으시지 않습니다.
야곱의 그 많은 뇌물들을 보고, 에서가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는 야곱의 성격을 에서가 잘 알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형의 발끔치를 꽉 붙잡고 나온 게 야곱입니다.
애기 때부터 보면 성격이 다 나타나잖아요?
그랬던 야곱이 그 많은 선물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움직였고, 하나님도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지게 역사하시는 것이죠.
관계의 회복을 원한다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기도하고 지혜를 얻어서 물질이든, 사과든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이라 해도 상처받은 게 있다면 반드시 사과해야 앙금이 없어집니다.
부모에게 상처받고 부부간에 상처받은 걸 사과받지 못하고 넘어가면 자기에 대한 연민, 자존감 하락 같은 심각한 마음의 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들 가정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좀 더 많이 사용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런데 그 밤에 한 사람이 야곱에게 나타나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아주 신비하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가족들을 먼저 얍복나루를 건넨 뒤 혼자 남았습니다.
저 많은 가족들, 그리고 눈도 못 붙이고 모은 가축들, 재산들.
이것들이 에서의 칼에 추풍낙엽처럼 스러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십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 같습니다.
가장의 무게도 야곱을 짓눌렀습니다.
야곱은 모두에게서 떨어져 혼자만의 번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담판 지으실 때를 포착하십니다.
우리가 다 야곱처럼 내 힘으로는 안되겠다 좌절할 때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꼭 맞는 방식으로 몸싸움을 걸어오십니다.
야곱이 건장한 자기 몸, 자기 꾀로 살아왔잖아요?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온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야곱이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이 분도 예수님으로 오시기 전의 성자하나님이신 것이죠.
구약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실 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도록 초석을 놓는 것이죠.
구약의 성도들이 성자하나님을 뵙고도 생명이 보존된 것은 태초부터 성자하나님은 중보자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에서도 야곱의 씨름 사건을 언급할 때 이렇게 기록합니다.
12장3절,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그렇다면 하나님과 야곱이 씨름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의 입장은 개의치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야곱입니다.
에서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겠지만 이 성격대로 살면 야곱의 생애는 험악한 일들이 계속 될 것입니다.
야곱은 처음엔 이 사람이 에서가 보낸 자객일까 생각하고 죽기살기로 싸웠을 것입니다.
전에 살펴보았지만 야곱이 원래 힘이 장사입니다.
돌로 된 우물 뚜껑을 냅다 열어젖힌 그런 힘이 있었죠.
그렇기에 밤새 이 사람과 씨름할 수가 있었던 거에요.
씨름선수들의 경기가 길어야 몇 분에 끝나는 것은 몸싸움을 하는 게 그만큼 순식간에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지치도록 몸싸움을 계속하면서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요?
이 분이 자기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을 끌어안고 씨름을 하고 있는 그 품에서 인간 그 누구의 품도 아닌 하나님의 품을 느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씨름을 하신다면 그 품은 매섭게 우리를 밀어 붙이고 내동댕이 치시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야곱는 점점 자기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이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난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 왜 내게는 이런 시련만 계속되는 거야’
눈물 콧물 흘리며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고집과 힘으로 버티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종료를 선언하십니다.
‘네 힘으로 너 자신을 이기지 못하니 내가 네 환도뼈를 꺾어 주어야겠구나’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위골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어떤 이름을 주십니까?
약탈자라는 야곱이란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겼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죠.
철없이 엇나가는 사춘기 아들이 부모를 이겨 먹었다면 좋은 것입니까?
야곱은 자기 힘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사람을 상대로 이겨 먹은 사람입니다.
야곱에게는 그 악착같은 성격과 강인한 몸이 무기였습니다.
지금도 혼자라면 어디로든 도망가서 이전처럼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 야곱에게서 하나님은 환도뼈를 위골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이젠 자기 힘으로 도망도 못하고 무거운 돌도 옮기지 못하게 된 것이죠.
야곱은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하는 장애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만일 야곱을 그대로 두신다면 야곱은 평생 자기 꾀와 힘을 의지하며 사람과 하나님을 이겨 먹으며 살 것입니다.
야곱이 다 이겨 먹으면서도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자기 자신을 극복하며 살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위골 된 환도뼈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집과 교만을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람과 조화롭게 살도록 각 사람의 환도뼈를 꺾으신 것입니다.
타고나면서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아픔, 병약한 몸, 많이 배우지 못한 아쉬움, 작은 키에 평범한 얼굴.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면 이것이 위골 된 우리의 환도뼈입니다.
바울에게 허락하신 가시와 같은 것이죠.
우리는 내게 이것만 허락해 주셨다면 세상에서 좀 더 행복하게 살 것 같은데,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바로 그것을 위골 시키십니다.
그것을 주시면 우리가 내 힘과 머리로 사는 것을 막으실 수 없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 안에는 얼마나 내 존재와 실력을 증명해 보이려는 강한 본성이 있습니까?
그게 되면 우쭐해지고 그게 없으면 한없이 쭈그러 드는 것이죠.
세상에서 그렇게 나 자신을 증명하고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야곱처럼 될 것입니다.
결국 칠흙 같은 밤 혼자 주마등처럼 지나쳐 가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삶에 만족과 평안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겨 먹는 본성을 바꾸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죄성으로 인한 괴로운 결과들에 대해 다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난 주 내내 하나님을 이겨 먹다 나왔잖아요?
기도하라고 해도 안 하고, 말씀 보라고 해도 안 보고, 용서하라고 해도 안 한 우리가 야곱처럼 하나님을 이긴 자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바로 야곱과 씨름하신 그 성자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는 죄값 대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도 내 뜻대로 안되면 하나님과 멱살잡이라도 하며 버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멱살을 움켜쥐듯이 하며 절대로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그런 우리들을 축복하실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죠.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것 때문에 이스라엘사람들이 가축의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곳에 대한 경외심인 것이죠.
우리를 기울어지게 만든 환도뼈가 그런 것입니다.
저는 다리, 여러 가지 연약함을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걸로 우리를 천히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가끔 월드비전 영상을 보면 아기들도 가난한 나라나 부모 없이 크는 아이들보면 귀하게 보이질 않더군요.
아기들이 이미 기울어진 인생을 시작한 것이죠.
어제 잠깐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부모가 다 지적장애인이고 네 명의 아이를 낳았더군요.
네 아이가 다 정상일 뿐 아니라 심성도 곱고 하나같이 부지런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심한 지적장애를 가진 부모 밑에서 아이들은 기울어진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 아이들을 믿음으로 키운 것 같더군요.
아이들이 전혀 측은해 보이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난하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병약하게 하셨다면, 아무도 우리를 측은히 보지 않게 하십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모습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야곱이 절뚝이며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다고 합니다.
두 다리 멀쩡하게 자기 힘으로 살던 때는 번민에 잠 못이루는 밤이었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에 절뚝거리며 걸어가도 태양이 찬란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렇기에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자고 했습니다.
나의 약함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도 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믿게 된 예수님으로 인해 내 힘만으로 살던 과거보다 더 풍성한 복을 얻으며 살게 될 것을 믿으시고 환경에 낙담하지 마시고 항상 용기 있게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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