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40장 강해 (고난 중에도 형통하다) 두 관원장의 꿈

남수연 2023. 9. 5. 21:59

https://www.youtube.com/watch?v=HKA6En-pK8w 

믿었던 내 인생이 무언가에 밀려 붕괴되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죠.

지난 주에 기독교 TV에 나온 한 일타강사의 간증도 그렇더군요.

이분은 현재 공무원 시험 한국사 수강생 수가 10년 연속 1위라고 합니다.

이분이 삼십 초반에 대구에서 서울의 종로학원, 대성학원급의 대형학원 이사장이 되었고 출판사까지 운영하며 승승장구합니다.

드라마의 시작이 화려하면 회차가 지날수록 불행이 스멀스멀 다가오죠.

요셉의 이야기가 채색옷으로 시작된 것처럼요.

이 강사도 그렇게 이룬 모든 것이 어느 한 해에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인기 추락, 학원 폐업, 출판사 부도가 한 해에 다 일어납니다.

그것이 자기 힘으로 막을 수 없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더랍니다.

그 해 교육과정이 바뀌며 역사과목의 비중이 줄어들며 인기 강사의 추락이 시작됩니다.

그 해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EBS교육방송에서 70%를 출제하도록 수능출제 방식이 바뀝니다.

수험생들이 EBS 방송만 보니 학원 수강생은 줄어들고, 교육방송 교재만 팔리다 보니 출판사도 문을 닫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잘못한 것 없이 연달아 일어나는 데 이건 내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야, 우리 집 재산 날아가는 게 신기하게 누가 인도하는 것 같지 않냐?’

성도들에겐 불행과 고난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는 배신과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받습니다.

남의 밑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것도 때로 자존심 상하는 데, 인간 취급도 못받는 노예의 삶이 얼마나 괴롭고 죽고 싶었겠습니까?

애굽으로 끌려 간 요셉은 바로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립니다.

보디발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한 요셉은 주인의 신임을 받고 가정 총무의 일을 맡게 됩니다.

노예의 신분이지만 그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의 추파를 거절하다 강간미수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런 이들을 줄줄이 당하며 요셉은 기가 막혔겠죠.

일타강사의 경우처럼 이건 어떤 힘이 자신을 몰아가고 있다고 밖에 설명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까지 노예로 살고 옥살이까지 하게 된 세월이 십삼 년입니다.

그러나 39장에서 이런 요셉에게 누차 따라 붙는 말씀이 있습니다.

23,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고난이 계속되고 있지만 요셉은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형통합니다.

실제 요셉은 어떤 환경에 놓여지든 인정받고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요셉에게 차질없이 진행되니 형통한 것이죠.

또 요셉은 몰랐지만 이 코스가 가장 빨리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었잖아요?

우리가 잘 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게 아닙니다.

돌아보면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셨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렇기에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 형통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꿈이 이뤄질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1) 요셉이 갇힌 감옥에 새 죄수가 들어오죠.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요셉이 갇힌 감옥에 바로왕의 최측근 관원장 둘이 수감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죠?

지난 주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실 이스라엘 국가를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길러내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에 파견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도 스스로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 먼저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오

20에 팔려 비참하게 끌려가던 요셉이 바로의 총리가 되고, 가족을 살리게 될 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신약성경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은 30에 팔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의 예표라고 해석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자기 인생을 살았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를 비추는 예표가 많은 사람입니다.

요셉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구주되심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 처음 팔려 간 집이 바로왕의 친위대장 집이었습니다.

모함을 받고 갇힌 곳은 바로왕의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로왕의 최측근 두 명의 장관이 이곳에 수감 된 것입니다.

요셉이 자꾸 누구와 엮이고 있습니까?

노예 신분으로는 만날 가능성이 1도 없는 바로왕과 엮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런 일들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노예가 왕을 만나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가정을 이루게 된 것, 직장을 옮기게 된 것, 은인을 만난 것, 교회로 인도된 것, 여러 가지 환경과 관계들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2) 감옥에 들어온 두 관원장을 요셉이 수종들게 됩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일 아내 말을 믿었다면 요셉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요셉을 감옥에는 쳐 넣었지만 잘 대접해야 할 두 관원장을 요셉에게 수종들게 하죠.

이들을 잘 모셔야 복권된 다음 자기에게도 좋은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보면 보디발이 실은 요셉의 결백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것이, 그러면서도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살이하게 둡니다.

요셉의 무죄를 인정하면 아내의 무고죄가 발각되고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내게 호의를 보인다고 해도 과히 믿을 것은 못됩니다.

내게 대한 호의도 자신의 이익 앞에선 얼마든지 악의로 바뀌는 게 사람이죠.

어제 호의적이던 얼굴이 오늘은 딴 사람처럼 굴어서 우리를 당황시키잖아요?

그렇기에 성경은 진실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수감 된 두 관원장은 바로의 최측근으로 음식과 의전을 맡은 높은 권력자입니다.

음식을 맡긴다는 것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왕들에겐 음식과 음료를 통한 독살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종황제도 일본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하잖아요?

건강에 문제가 없던 고종이 늘 하던 대로 식혜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밤에 세상을 떠났죠.

삼일 만에 시신이 다 부패하고 이가 다 빠진 것을 보면 고종이 비소라는 독극물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아버지 고종의 독극물 피살에 대한 충격으로 덕혜옹주는 항상 마실 물을 보온병에 가지고 다녔다고 하죠.

감옥에 수감 된 두 관원장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릅니다.

왕을 독살하려다 들켰다면 즉시 사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미결수로 수감된 것을 보면 권력형 비리나 반역에 가담했거나 그런 모함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요셉은 이 두 관원장을 그의 성품에 따라 열심히 섬겼습니다.

내 환경이 어두울 때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안 하면 다음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앞날을 두려워하던 두 관원장은 성심껏 자기를 섬기는 예사롭지 않은 청년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 자기 꿈 이야기를 순순히 내어놓는 것이죠.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 두 관원장이 동시에 꿈을 꾸게 됩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도 사람에게 뜻을 알리실 때 꿈과 이상을 종종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성경과 성령시대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지혜, 내 환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해답을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게 해 주십니다.

오늘 두 관원장의 꾼 꿈은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을 보여주신 꿈입니다.

그들도 그것이 운명적인 꿈이라 예감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침에 관원장을 섬기러 들어갔더니 두 사람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사람들은 서로 얽혀있다 해도 각자 자기 문제에만 몰두해 살아갑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외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지 못합니다.

요셉이 관원장들의 얼굴 빛을 읽은 것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일 뿐 아니라 성령의 감화이십니다.

41장을 보면 바로가 요셉을 만난 뒤 감탄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우리가 진심으로 사람의 근심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입니다.

성령님의 감화가 없는 관심과 사랑은 어쩔 수 없이 나 중심이고, 아니면 겉치레일 뿐입니다.

평소 요셉의 사려 깊은 마음을 알고 있던 관원장들은 꿈 이야기를 합니다.

궁정에 있을 때는 꿈해몽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물을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는 것이죠.

요셉이 두 관원장의 말을 듣고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8,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이 어떻게 꿈해석에 대해서 이런 자신감을 가지는 것일까요?

실제로 어떻게 꿈을 정확히 해석해 줄 수 있었을지 참 신비하죠.

그러나 요셉을 신통력을 가진 특별한 인간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학문과 서적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듯이 환상과 꿈을 깨닫는 지혜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걸 알 수 있죠.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니엘에게 그런 특별한 은사를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했던 요셉에게도 그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신통력은 아닙니다.

다니엘도 느브갓네살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었을 때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요셉의 꿈 해석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의미있는 꿈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 뜻을 묻고 실제로 이뤄지는 경험들을 쌓으며 점점 해석의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과 같은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죠.

물론 직관적으로 해석의 은혜를 주실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은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훈련이 없이 개별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셉도 8절에서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죠.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가 나옵니다.

우리의 복된 믿음생활을 위해서, 또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각자에게 맡겨주시는 은사가 있습니다.

섬기는 은사를 주시든,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든, 기도와 전도의 은사를 주시든, 그것은 꾸준히 순종하며 행해야 귀한 선물이 됩니다.

전도의 은사를 받았다고 사람들을 만나면 저절로 입이 열리고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그걸 힘들어도 꾸준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1)술관원장의 꿈은 포도나무에 세 개의 가지가 났는데 거기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자기가 즙을 짜서 바로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꿈이 사흘 안에 복직되는 것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듣고 나니 꿈과 해석이 그리 난해하지는 않죠?

그러나 지금처럼 해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확신있는 해석이 아니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술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뒤 요셉은 술관원장에게 부탁을 합니다.

사흘 뒤 복권이 되면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는 것이죠.

자기는 죄없이 팔려 왔고, 감옥에 있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으니 바로에게 말해 자신에게 자유를 달라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죠?

사실 이 문제라면 자기 주인 보디발에게 잘 중재해서 내보내달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일개 노예인 자신의 문제를 왕에게 요청해 달라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 앞으로 인도하실 계획임을 요셉이 뭔가 눈치채고 있다는 게 느껴지죠.

마치 바울사도가 유대인들과의 소송에서 로마황제에게 상소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디발의 용서를 받고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은 아닐 것이라는 걸 요셉은 알았습니다.

우리를 고난이라는 풀무에서 단련하셨다면 다시 과거 정도의 생활로 돌아가라시는 게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 믿음과 삶을 업그레이드 시키시는 분명한 목적입니다.

고난을 겨우 통과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게 가장 실속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발전도 없고 무익한 고난은 무한 반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련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영혼의 구원, 영혼의 성숙,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사명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죠.

그걸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우리를 형통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에게는 분명히 네 자손이 이방에서 4백년을 살다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손들에 대한 그런 중대한 말씀을 아브라함이 혼자만 알고 묻어두지는 않았겠죠.

요셉도 그 이야기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알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임종시 이런 유언을 남기죠.

50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이스라엘의 입애굽과 출애굽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을 위해 요셉은 뭔가 바로의 왕궁에서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우리가 손발을 잘 맞춰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걸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곳에다 공을 들이게 됩니다.

요셉이 사람을 더 의존해서 술관원장에게 석방을 주선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고 살다보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지혜롭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면 나중에 술관원장이 어떻게 요셉을 기억해서 바로 앞으로 부르겠습니까?

 

2) 요셉의 고난에서 우리가 또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 그렇게 총리의 일을 감당할 믿음과 실력을 갖도록 요셉을 훈련하고 계신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의 종으로 살았던 십삼년은 허송세월이 아닙니다.

애굽 시위대장의 집에서 가정총무로 일하며 애굽인들의 삶을 충분히 배웁니다.

감옥이란 곳은 어떤 곳입니까?

송사에 걸린 사람들의 일을 보며 애굽의 사회상을 깊숙이 알게 되는 것이죠.

사람은 의인을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악인들을 통해서도 배웁니다.

악인들을 보면 인간 내면의 깊이 내재 된 죄악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이 내 죄의 뿌리와 같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이 단지 하나님의 훈련에서 실력만 연단했다면 나중에 자신을 팔았던 형들에 대한 용서와 관대함을 보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인자함과 관대함은 자기 자신의 숨겨진 죄악을 깨달은 것만큼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서 흠잡을 데 없지만 남의 잘못과 약점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다면 아마도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이 미비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 두 관원장을 섬기며 바로의 왕궁에 대해 배우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형통하다는 것은 고난 중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유용한 것들을 고난 중에 배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복된 믿음을 고난이 아니면 어디서 얻게 되었겠습니까?

 

3) 문제는 떡관원장의 꿈입니다.

술관원장의 꿈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떡관원장도 자기의 꿈이야기를 합니다.

떡이 든 광주리 세 개를 이고 있었는데 새가 와서 그 떡을 집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모르는 우리가 들어도 이건 길몽은 아니죠.

요셉은 사흘 뒤에 바로가 관원장의 목을 매달 것이고 새들이 시신을 뜯어 먹게 될 것이라고 해석을 해 줍니다.

요셉은 그간의 사려 깊음과 달리 지나치리만큼 냉정하게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말을 듣고 떡관원장이 불같이 역정을 낼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런 반응은 나와 있지 않죠.

아마도 떡관원장이 꿈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요셉에게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망감 속에서 자신이 받을 죄값을 받아들였겠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우리 감정이나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고려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떡관원장이 당할 운명을 알면서도 적당히 애둘러서 꿈을 해석해 주었다면 술관원장의 꿈 해석도 신빙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좋게 해석해 준 떡관원장이 사형을 당했다면 술관원장의 복직에 대한 해석도 우연일 수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죠.

그랬다면 술관원장이 바로의 꿈 해석자로 요셉을 추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의 답답한 인생에 대해 해석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의 그들의 삶을 우리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해석해 주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도 당장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 죽어도 괜찮다는듯한 메시지를 주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만 살면 다른 사람은 어찌되는 상관 없다는 무심한 마음은 아닐까요?

우리 국민들 가슴에 큰 상처로 남은 세월호 사건 때 선장이 아이들을 배에 남겨 둔 채 본인만 일찍이 해경에 구조되어 병원에 입원했었죠.

남은 아이들이 배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선장이 병실에 누워서 물에 젖은 자기의 돈을 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형통하기만 구하는 그런 신자들의 모습이 아닐지 반성합니다.

가족들에게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다면 가장 큰 비극인 것입니다.

 

4) 이 사건의 결말입니다.

사흘 뒤 바로왕의 생일이 돌아오고 두 관원장은 왕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리고 술관원장은 복직되고 떡관원장은 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복직 된 술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사람이 역시 그런 것이죠.

아무도 우리 일에 우리만큼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술관원장이 2년간이나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살아났던 사건을 어떻게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리고 그 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꿈이 생각나고, 꿈을 해석해 준 요셉이 생각나야 자연스러운 것이죠.

요셉은 술관원장이 자신의 부탁을 잊은 것에 대해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즉시 술관원장이 요셉을 도와주었다면 요셉은 일찍 사면되었을지는 몰라도 바로를 만나 꿈을 해석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지금이 하나님의 때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때는 모든 것이 퍼즐처럼 들어맞는 정확한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술관원장이 고통스런 과거와 요셉의 일을 잊어버리려 해도 하나님이 다시 기억을 소환하시면 기억해 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사람은 우리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기도응답이 늦어진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계획대로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기에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 해도 우리를 연단하시는 훈련을 착실히 받아야겠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어제 헤트트릭을 달성했다는 뉴스를 보고 제가 너무 기뻤습니다.

손선수가 왠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응원을 하게 되더군요.

최근 골이 터지지 않아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손선수의 실력을 알기에 언젠가 골이 터질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훈련해야 합니다.

꾸준히 지식과 경험과 내 전공 능력을 연마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항상 믿음의 실력을 연단해 가면 어떤 시련의 때든 능히 이길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아름답게 이룰 날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