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UbwGCl8p8sE
오늘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과 이십이 년 만에 재회를 합니다.
살다 보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기죠.
형제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안 만나고 사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요셉도 자기를 돈 받고 팔아넘긴 형들을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한때 그 사실을 잊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아들을 낳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41장51절,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사실 요셉이 아버지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얼마나 꾸었겠습니까?
그 꿈은 미처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형들에게 끌려가는 악몽으로 끝났을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차라리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총리가 된 다음에도 안 찾아가잖아요?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지금 애굽의 총리가 된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가족들과 재회할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요셉이 그 재회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형들과 재회하는지를 살펴볼 때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으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1. 요셉은 형들과의 재회를 치밀하게 준비합니다.
42절부터 44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오늘 본문과의 연결을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칠년 동안 애굽 온 땅에 큰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이년 흉년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오년의 극심한 흉년이 남아있는 것이죠.
2년째 흉년에 벌써 애굽과 인근 가나안땅에 곡식이 완전히 동이 납니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기 위해 몰려옵니다.
칠년 흉년은 보통 재난이 아닙니다.
나중엔 애굽인도 밭을 국가에 팔아 곡식을 사고 바로왕의 소작인이 됩니다.
칠년 동안 월급이 없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재앙이죠.
몇 개월만 월급이 없어도 가정 경제가 휘청대잖아요?
올 전반기 임금체불액이 1조원이 넘어 이미 많은 가정이 파탄 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 걱정이 많습니다.
가나안땅의 야곱도 기근의 피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친동생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아들을 애굽으로 보내 곡식을 사 오게 합니다.
요셉은 그때까지 가족들을 찾지 않고 재회의 때를 기다립니다.
사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가해자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야 피해자가 용서를 하고 안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것에 더욱 분노하죠.
형들이 동생을 팔아넘긴 악행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면 요셉의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미안해해야 용서를 하는 것이죠.
그래야 가해자들의 죄도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쁜 인간인 걸 알아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안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이해가 안되고 나와 겉도는 신앙이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항상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인식하고 믿게 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요셉은 형들이 과연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린 그 악한 죄를 뉘우치고 있는지 알아본 다음에 용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치밀한 각본을 만들고 형들을 시험할 준비를 합니다.
드디어 곡물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납니다.
요셉의 연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요셉은 형들을 알아 보지만 형들은 애굽의 위엄있는 총리가 요셉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요셉은 통역을 세웠지만 형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이죠.
요셉은 형들에게 애굽을 엿보러 온 정탐꾼으로 몰고 갑니다.
형들의 가나안땅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두고 왔다는 막내 아들에 대해 캐 묻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 형들만 돌아가라고 합니다.
가서 가나안땅에 남아있다고 했던 동생을 데려오면 너희 말을 믿어주고 시므온도 풀어주고 곡물 무역할 권한도 주겠다고 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친동생 베냐민이 잘 있는지, 그 얼굴을 보고 싶었겠습니까?
요셉이 시므온을 찍어서 감옥살이를 시킨 것은 아마도 과거 자기를 죽이자고 주도한 인물이 시므온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므온은 잔혹한 성격이죠.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땅으로 돌아올 때 여동생 디나의 일로 세겜 남자들을 다 죽인 사람입니다.
이 시므온에게 억울한 감옥살이를 통해 동생에게 행했던 죄를 회개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시므온이 당해봐야 요셉의 막막하고 두렵던 심정을 알겠죠.
요셉의 치밀한 각본에 휘말린 형들은 결국 과거의 죄를 떠올립니다.
42장 21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억울해도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나서야 과거 동생에게 했던 범죄를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죠.
그렇게 시므온은 옥에 갇히고 형들은 곡식을 싣고 가나안땅으로 돌아갑니다.
곡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히 또 바닥이 나죠.
결국 2차로 곡식을 사러 갈 때 야곱은 할 수 없이 아끼는 베냐민을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잃어버린 요셉의 은잔이 나오고 베냐민은 종이 될 위기에 처합니다.
형들의 반응을 보려는 요셉의 각본이죠.
그런데 형 유다가 뜻밖의 모습을 보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종이 되겠으니 베냐민을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달라고 합니다.
44장에 보면 유다의 간절한 호소가 읽는 우리도 감동될 만큼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베냐민 대신 자신의 희생을 자청했던 유다가 메시야의 족보를 이을 장자의 명분을 잇게 됩니다.
파란만장한 야곱의 가정사 속에서 유다와 요셉만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나타내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이죠.
아버지와 베냐민에 대한 유다의 진심을 듣다 안도한 요셉은 갑자기 남은 대본을 덮고 드라마를 끝냅니다.
2. 요셉은 드디어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들을 용서합니다.
1절을 보면 요셉이 유다의 말을 듣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정체를 밝힙니다.
저는 전에 요셉이 형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이 장면을 그냥 읽고 지나갔습니다.
오히려 너무 형들에게 더 매달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총리 된 지 십여 년인데 위엄도 있고 관록이 붙을 만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는 데 요셉의 마음이 좀 느껴져 살짝 눈물이 났습니다.
요셉이 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니,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에게 무슨 그런 정이 남아있는지 요셉이 참 애처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형들을 좋아하고 있었나 봅니다.
22년 전의 그 동생 요셉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죠.
반면에 요셉이 형들을 안고 울 때 같이 울었다는 형은 없습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베냐민만이 요셉을 안고 울었다고 나오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살아있는 것이 좋았을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기뻤을까요?
기쁨보다는 요셉에게 당할 후환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오늘 요셉의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 배신의 상처, 가족에 대한 그리움, 재회의 기쁨, 이런 것들이 폭발한 울음에서 인간 요셉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남자의 울음이 얼마나 컸으면 요셉이 울었다는 소리가 바로에게까지 들렸겠습니까?
그렇게 요셉은 형들을 끌어 안고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시죠.
피해자에겐 이것은 2차 가해로 들릴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죽이려 하고, 나를 망하게 하고,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을 뺏어간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조금 섭섭하게 하고, 약간 모욕을 준 사람에 대한 응어리도 잘 풀리지 않잖아요?
요셉도 어두운 감옥에 갇혀 결코 형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형들을 마음으로 용서했을까요?
1) 자기가 성공하고 나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고, 첫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잖아요?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것은 과거의 상처를 잊은 것도 되지만 용서했다는 뜻도 됩니다.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과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려면 요셉처럼 내가 성공하고 내 신분이 높아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괴롭던 과거가 잊혀질 만큼 행복하면 됩니다.
고난이 파도처럼 계속 겹쳐 올 때는 내 인생도, 내게 상처를 준 사람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과오를 범한 나 자신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언제 고난이 다 끝나고 내 인생이 언제 역전되겠습니까?
언제 과거를 다 털어버리고 잊을 만큼 행복해지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인생에 이미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 상승, 예수님 안에서 얻은 축복과 만족, 그것이 요셉과 같은 인생 역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젠 용서해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자꾸 믿음으로 확신할 때 우리는 용서의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2) 또 요셉의 용서에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배신과 치욕의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은 명백한 그들의 범죄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신비롭게 이뤄졌다는 것이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 비로서 과거와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그 사건은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함 아니었나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던 일들도, 지금의 모든 괴로움도 인생의 마지막엔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영광스러운 천국에 이르게 한 것이구나’
‘그것을 통해 내가 죄인 됨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구나’
그럴 것을 확신하면 괴로웠던 과거와 현재를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내가 먼저 용서가 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고통과 과거를 반드시 우리 앞에 무릎 꿇게 하실 것입니다.
3. 요셉은 용서한 형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며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1) 요셉의 가족이 온 것을 바로와 온 신하들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정치판이 그때나 지금이나 경쟁자를 밟아야 내가 삽니다.
바로에게는 충성해서 인정을 받았다 해도 신하들의 마음까지 얻었다는 것은 요셉의 헌신과 진정성을 그들이 다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목회연구원에서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삶과 신앙이 따로 논다’라는 답변이 여전히 1위였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도 우리가 믿음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죠.
요셉은 유능했지만 자기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유능하기만 하면 어디 가서나 경쟁 상대가 되지만 말씀대로 살면 사람들이 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그들을 위하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야만 세상이 우리의 신앙에도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2) 21절을 보면 바로왕은 아버지를 모시러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수레를 내주고 필요한 모든 것을 아끼지 말라고 합니다.
바퀴가 달린 수레를 말이 끌게 하는 마차는 고대 이집트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에게 마차는 신기한 문물인 것이죠.
요셉은 나귀 스무 마리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들과 야곱이 오는 길에 먹을 양식들을 가득 실어 보냅니다.
야곱의 가족을 태우러 가는 수십 대의 아름다운 왕궁 수레들과 선물을 가득 실은 수십 마리 나귀의 행렬이 장관이었겠죠.
그런데 이것이 곧 애굽으로 이민 나올 사람들에 대한 그림으로는 왠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시간을 넘어 사백년 뒤, 이들이 큰 민족을 이루고 애굽의 물품들을 가득 싣고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모세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 과거사를 기록할 때 이 광경 속에 창세기15장14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출애굽의 약속이 성취되는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15장14절,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미 출애굽에서 이스라엘과 자신이 경험한 광경이잖아요?
우리도 성경에서 내 현재와 미래가 잘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십자가를 지고 고되게 살아가지만 이생을 마칠 때 우리의 천국 입성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얻은 열매와 하나님의 축복을 전리품처럼 얻고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3) 22절에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옷 한 벌씩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는 옷 다섯 벌과 은 삼백을 줍니다.
물론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친형제이기에 베냐민은 각별했겠죠.
그런데 단지 그 때문에 형들을 다시 차별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의지했던 형을 잃고 가장 큰 충격을 받고 울었을 베냐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인 것입니다.
크게 잘못한 형들에게도 좋은 옷을 주었지만 베냐민이 더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보상하실 때도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예수님을 충성되게 섬기며, 세상의 악으로 인해 애통하던 성도들이 더 큰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긴 것은 헛수고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4) 새 일이 시작될 때 사람들은 새 옷을 사 입죠.
요셉이 형들에게 옷을 주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민족을 이룰 새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형들을 요셉이 파악한 것이죠.
사람이 어디 쉽게 달라집니까?
여전히 요셉의 일로 불안해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 넘기고 시비를 가리자고 다툴 것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와 약점 투성이 형들을 통해 열두지파의 이스라엘을 만드실 것을 요셉은 알았습니다.
야곱도 그것을 알고 죽기 전에 열두 아들들을 축복하죠.
그 나라는 완벽한 자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그런 형들을 다 끌어 안은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허물투성이 입니다.
잘못을 알지만 잘 고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도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도 서로의 약점과 잘못을 끌어 안고 가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이 길에서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내 일터에서 나와 다투는 소리가 들리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5)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꿈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늙은 야곱은 맥이 풀려 잠시 혼절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피가 묻은 요셉의 채색옷을 받아 들고 야곱이 얼마나 슬프게 울었습니까?
그토록 사랑했던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에 야곱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애굽행을 결심합니다.
28절,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그러나 이 가나안땅은 야곱이 형 에서와의 두려운 만남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돌아온 곳입니다.
약속이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승낙 없이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날 리는 없습니다.
형들이 요셉의 말을 상세히 전했다고 하죠.
하나님이 야곱의 후손들을 남기기 위해서 요셉을 그토록 험난한 길로 인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곱도 깨닫게 된 것이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이 이제 눈 앞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네 자손이 사백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섬기다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느끼며 야곱은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떠보려는 각본을 쓰고 지혜로운 재회를 합니다.
행복한 결말이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행복한 결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결말만 쓰셨지, 요셉처럼 각본을 쓰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씌여진 각본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각본 없이 애증과 탐욕과 죄와 고통으로 이리저리 쏠려 다니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어떤 것이 끼어들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복된 결말이 그런 것을 다 끌어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것 같은데도 다시 일어납니다.
다 끝난 것 같은 데 다시 시작됩니다.
요셉처럼 환경과 사람이, 때로 절망과 고통으로 몰고 가지만 그 모든 것은 단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복된 결말을 향해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들과 과거들과 이젠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너무 힘겨운 내 삶도 조금만 여유있게 보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파도에 휩쓸려 떠다니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줄 안전한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드시길 바랍니다.
요셉처럼 매 순간, 모든 환경 속에서 주님이 주신 기준을 잘 따라 복된 결말을 향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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