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L7mdzZq1BH4&t=2749s
오늘 말씀은 야곱의 가족이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하는 내용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니까, 마치 설계도면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설계도면은 건축을 위한 것이죠.
본문 말씀을 그냥 평면적으로 읽으면 한 가족의 이민 모습입니다.
그러나 설계자의 의도대로 이 도면 위에 신구약 성경 자재들을 잘 쌓아보면 입체적인 건물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의 윤곽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 자재들을 본문에서 세 가지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우리 신앙을 이루는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모세도 출애굽한 민족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갖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성경 말씀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천국 시민 된 우리가 어떤 자재들로 믿음의 집을 건축할 것인지 본문 말씀의 측면에서 잘 배우고 그렇게 살아낼 수 있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나라의 첫 번째 요소는 예배입니다.
1)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예배하는지 아닌지를 통해 구분됩니다.
1절,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브엘세바는 가나안땅의 남쪽 끝입니다.
여기를 넘어서면 네게브사막이 나오고 애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창세기 곳곳에는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기록이 나옵니다.
애굽을 눈앞에 두고 드린 이 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본문의 제사는 야곱의 개인 신앙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세워질 나라의 이름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모세가 1절에서 야곱의 이름을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한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전에 얍복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했을 때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죠.
고대국가는 국가 시조의 이름이 그대로 국가명이 된 나라가 많습니다.
아말렉, 에돔, 세겜 같은 나라들이 다 사람 이름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도 국가명이 됩니다.
오늘 야곱을 처음으로 이스라엘로 기록한 것은 이제부터 개인 야곱의 인생사가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3절 하나님의 응답을 보면 야곱 개인보다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응답이 더 부각됩니다.
모세는 지금 4백년 전 조상의 역사를 써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예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다른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만 예배하지 세상에서 다른 누가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지난 주 오랜만에 제가 함께 근무하던 교사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분 때문에 제가 참 마음이 기뻤습니다.
교직 당시에 집사였던 분인데 그 사이 권사가 되셨더군요.
이 권사님 시댁이 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시어머니가 자식들을 좀 어렵게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듣기로도 시어머니 믿음이 참 신실하셨습니다.
항상 새벽기도에서 돌아와 자식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곤 했답니다.
큰 아들인 권사님 남편은 효성그룹에 근무하다 섬유수출 사업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사업이 너무 잘 되서 정말 잘 사십니다.
오래 전에도 벤츠를 운전하고 다녔는데 이번에도 벤츠를 몰고 오셨더군요.
돈이 많아서도 잘 살지만 권사님과 남편분이 믿음으로 잘 사는 게 기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신 그 시어머니가 아들이 사업차 외국을 자주 다니며 주일예배 빠지는 것을 제일 걱정했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 기도제목이 아들이 주일에 출장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주일에 출장을 가게 되면 이른 아침에라도 꼭 교회에 들려서 보냈다고 합니다.
출장이든 해외여행이든 외국에 가서도 부부가 주일 되면 꼭 인근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가정이 예배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기20장24절에서 말씀하셨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예배로 성도 됨을 증명하고 예배로 복을 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오늘 야곱의 제사에서 우리 예배에 대한 두 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야곱의 제사가 희생제사였다는 것이죠.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믿음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대신할 동물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야곱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야곱의 제사에는 하나님께 간구가 있었습니다.
그 간구에 대해 하나님이 3절에서 응답을 주신 것이잖아요?
우리의 예배 속에도 이런 간구와 소망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드리되 아무것도 구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 것은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 하나님께로부터 얻는다는 믿음이 없기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은 기도도 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3)야곱은 하나님께 제사하며 어떤 간구를 했을까요?
하나님의 응답 속에서 무엇을 기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온 가족을 데리고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애굽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야곱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애굽행을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살아서 애굽 총리가 된 기적적인 상황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타국살이에 대한 인도이심을 확신하고 떠난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총리가 된 요셉이 안전을 보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민은 장차 자기의 자손들이 애굽을 섬기게 될 사백 년 역사의 시작이잖아요?
어떻게 마음에 두려움이 없겠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요셉이 네 눈을 감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간절히 바라던 일, 꿈에도 그리던 일이 이뤄지기 직전에 오히려 더 불안해지죠.
혹시나 일이 틀어질까, 안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야곱이 꿈같은 요셉과의 재회를 앞두고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이 임종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잘 인도해 주실 것을 몰라서 우리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죠.
우리 삶에 늘 잔 근심이 있고 때로 큰 두려움도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걱정이 몰려오는 날도 있습니다.
당면한 인생의 실제 문제들은 내 힘으로 풀어내기는 버겁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야곱과 같이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이 잘 인도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을 주시면 만 가지 괜한 근심이 사라지죠,
또 실제로 일어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평강과 지혜로 인도해 주십니다.빌립보서4장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배하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이런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평안한 마음만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 자체에 낙망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평강으로 붙들어 주시는 것이죠.
평강은 즉시 주시지만 문제 해결은 풀어야 할 과정들 때문에 종종 늦어지는 것입니다.
3) 야곱에게 있던 두려움이 제사를 드린 뒤에 사라집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사다리꿈을 꾼 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떠났던 것 기억하시죠?
오늘 5절도 그런 느낌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 새..그의 모든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갔더라
오늘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가볍길 축복드립니다.
그렇게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헤어졌던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죽은 줄 알았던 요셉과 감격의 재회를 합니다.
이스라엘의 건국 역사에 하나님이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 놓으셨죠.
헤어져 있던 아버지와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의 뜨거운 재회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야곱은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 대신 동생 베냐민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빈자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요셉을 잃은 그 빈자리가 아마도 삶의 의미를 다 앗아갔을 것입니다.
야곱이 석양을 바라보는 뒷모습에서 그 마음을 읽었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입니다.
1) 28절을 보면 야곱이 애굽땅에 이르자 유다를 요셉에게 보냅니다.
우리가 애굽에 들어섰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안내하라는 것이죠.
유다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이은 넷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이 넷째 아들 유다를 가장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죠.
왜 야곱은 유다를 신임하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두 번 애굽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유다의 진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곡식을 사러 갈 때는 애굽총리 요셉의 명령대로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시므온도 풀어주고, 스파이 누명도 벗겨지고, 곡식도 사고, 무역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은 베냐민마저 잃을까 두려워 역정을 냅니다.
그때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다른 자식들을 다 살리려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 만일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면 내가 그 죄를 지겠다고 나섭니다.
결국 유다의 말에 설득되어 야곱은 베냐민을 보냅니다.
그때 야곱이 유명한 말을 하죠.
44장14절,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유다는 아버지가 베냐민을 왜 그렇게 끼고 도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었을까요?
본문 1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이 가나안땅에서 죽었다고 하죠.
그들이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죽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식의 죽음인데 어떤 죽음이라 한들, 아버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았겠습니까?
악을 행하다 죽은 아들이기에 목 놓아 슬퍼하지도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유다 역시 남은 한 아들을 더욱 끌어 안습니다.
죽은 아들의 며느리에게 그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하죠.
아들을 앞세운 유다만이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알았고 남은 아들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도 그런 유다의 마음을 알았던 것이죠.
둘 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잖아요?
성경은 우리를 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십니다.
2) 야곱이 잃었던 요셉을 드디어 만나게 됩니다.
29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요셉이 아버지에게 자기를 보였다고 하죠.
자기 얼굴을 아버지가 살펴보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22년 만에 만난 요셉의 얼굴을 야곱이 뜯어보고 또 뜯어보고 눈을 떼지 못하며 쓰다듬다 목을 안고 목놓아 한참을 울었던 것이죠.
야곱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30절,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야곱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국가로 첫발을 내디딘 시점에 아버지와 아들의 재회가 뭔가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야말로 아버지가 잃었던 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들이 놓쳤던 아버지의 손을 다시 잡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유다가 등장하는 것은 심오하고 의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에 반드시 계셔야 하는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님을 암시해 놓으신 것이죠.
하나님의 설계도의 두 번째 자재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 확실한 믿음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 분리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가족들을 고센땅에 정착시킬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요셉은 왜 고센땅을 이스라엘의 정착지로 정한 것일까요?
고센은 가나안땅에서 가까운 애굽의 최북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으로 되돌리실 것을 알고 있던 요셉은 가나안에서 가까운 땅을 선택한 것입니다.
반면 고센은 애굽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요셉이 의도적으로 도시로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분리시키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형들에게 바로가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무조건 목축밖에는 해본 게 없다고 하라고 합니다.
형들은 문명국 이집트로 이민을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동생은 나라의 총리대신입니다.
이제 냄새나는 목축일을 끝낼 수 있겠다, 우리도 사회 중심부에 들어가 출세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 하지 않았겠습니까?
요셉은 노예살이, 감옥살이에서 인간 군상이 어떤지를 아주 잘 배웠습니다.
형들의 그런 욕망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죠.
이집트는 태양신 우상숭배의 나라입니다.
권력과 문명의 중심부에서는 이 영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시는 화려하고 매력적이죠.
제가 양주로 이사와서 요즘 먼 산 위로 저녁노을이 지는 게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하고 즐깁니다.
어제 여의도에 갔다가 오는 데 한강변의 고층빌딩 사이로 저녁 노을이 화려하게 넓은 하늘에 뻗쳐 있었습니다.
갑자기 양주의 저녁노을이 초라하게 느껴지더군요.
세속의 도시의 속을 들여다 보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죠.
애굽의 도시 속에 있는 범죄와 탈선과 배교의 위험을 애굽 생활 이십년이 넘는 요셉이 얼마나 잘 알았겠습니까?
이들과 섞이면 절대로 이스라엘자손들이 하나님 신앙을 보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요셉이 간파한 것이죠.
그래서 애굽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목축밖에 모른다고 굳이 말하게 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유목민을 천히 여기는 애굽 사람들과 상종도 못하고 사백년을 고센땅에 모여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물론 이스라엘 사회에도 애굽의 문명과 우상문화도 들어왔지만 그래도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 신앙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사백 년 뒤에 모세를 보내셔서 이들을 출애굽시켜 다시 가나안땅으로 데려가시잖아요?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자손들이 할례를 행해서 나와 언약을 맺은 징표로 삼자고 했잖아요?
고대에 의학적으로 위험한 할례를 계속했다는 것은 부모의 믿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다는 뜻이죠.
오히려 아들을 할례 시키지 않은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 인도자의 사명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잖아요?
아내가 급히 두 아들에게 할례를 해서 모세가 죽음을 면합니다.
아들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은 것은 아들의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부모가 믿음이 없다는 뜻이죠.
결국 모세가 믿음이 없어 죽을 뻔한 것입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믿음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사백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그래도 함께 뭉쳐 있어서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혼자 외떨어져 있던 모세가 믿음과 언약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세상에서 섞여 버려도 안되고, 믿음의 공동체에서 분리 되도 믿음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고센 땅에 모여 살며 애굽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야곱 자손들이 애굽 사회에 끼지 못하게 하신 것이죠.
아브라함과 이삭도 야곱도 성읍을 피해 들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앙을 지키기에 유리한 환경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돔도시에 들어가서 처참하게 망한 롯의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가지라는 교훈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롯이 술에 취해 딸들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잖아요?
딸들이 술을 어떻게 강제로 먹이겠어요?
또 아무리 취해도 그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요?
롯이 소돔의 음주와 성문화에 자기도 모르게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과 세속사회 속에서 떨어져 살 수는 없죠.
세상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우리를 거룩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처럼 환경적인 분리도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에 무익한 환경은 스스로 멀리해야 하는 것이죠.
또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유능한 정치가요 행정가였지만 여전히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감옥에서 격리되는 환경과 말씀으로 연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그 또한 세상에 대한 동경을 놓지 못하기에 감옥에서 연단하신 것입니다.
연단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가장 낮은 곳에서나 가장 높은 곳에서나 똑같을 수 있게 되는 걸 말합니다.
연단을 통해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연단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에서 육신대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세속과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면 지금과 다른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격리해야죠.
우리는 더 철저히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며 자발적으로 세상방식과 분리해야 합니다.
못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정이 떨어지게 하시고, 세상살이에 정이 떨어지게도 하십니다.
돈이 없어서, 건강이 나빠서, 날고 기는 실력이 없어서, 세상에 끼지 못한다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악0라는 오누이 듀엣 가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출판업을 하다 일을 정리하고 선교사가 되어 몽골로 이주합니다.
후원금이 부족해 아이들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로 공부해야 했습니다.
힘든 시기엔 몇 달간 밥에다 구운 김과 간장만 먹고 지냈다고 합니다.
연단입니다.
물론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훈련도 있었죠.
그런데 오누이가 K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해서 3억의 상금을 탄 거예요.
그 상금을 전액 기부했다고 합니다.
김만 먹을 때나, 3억의 상금을 탔을 때나, 3억을 기부했을 때나 똑같았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죠.
어린 오누이 가수가 연단 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연단되며 얻는 모든 것은 유익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를 연단하는 환경을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감옥 같은 환경만큼이나 우리를 훌륭히 연단합니다.
세속과 죄에서 나를 거룩하게 지키며 자발적으로 나를 연단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설계도입니다.
본문의 설계도면에 세 가지 자재를 잘 쌓아 올리면 아름다운 하나님나라, 그리고 유업을 받을 성도들의 형상이 맞춰집니다.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예배하면 제가 만난 권사님처럼 좋은 상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을 굳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죄와 세속의 가치관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분리하고 말씀대로 산다면 요셉처럼은 아니겠지만 각자에게 맞는 최고의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믿음을 세워가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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