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50장 (요셉의 유언과 죽음)

남수연 2023. 10. 10. 23:37

https://www.youtube.com/watch?v=QKwXwmU2Ae0 

오늘 요셉이 애굽에서 죽고 긴 창세기가 끝이 납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흔한 인생은 아닙니다.

노예로 팔려 간 청년이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된 건 동화가 아니라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요셉의 특별한 믿음과 이스라엘 민족에 기여한 공로도 대단합니다.

히브리서11장을 우리는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인물들이 기념비처럼 죽 늘어서 있죠.

거기 보면 여리고성 기생 라합도 나옵니다.

라합의 경우는 어떤 것을 용감한 믿음의 행위로 인정했을까요?

정탐꾼을 숨겨 준 것이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누리는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받은 것을 믿음의 전당에 기록합니다.

이 믿음장에는 아브라함과 야곱도 나오고 요셉도 나옵니다.

요셉의 경우는 그의 생애 중 무엇이 기록되었을까요?

고난을 이기고 총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것일까요?

요셉이 인정받은 믿음은 히브리서1222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의 마지막 예언과 유언을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의 클라이막스는 죽는 순간이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인생을 마칠 때가 가까워오면 모든 면에서 쇠락하고 무력해진다는 생각은 말아야겠습니다.

쇠퇴하는 신앙이 아니라 계속 올라가는 신앙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귀한 말씀을 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잘 듣을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과거 문제가 야곱의 죽음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지면에서 하나님이 다시 이 문제를 다루시는 것은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야곱의 죽음 뒤에 요셉의 형들은 큰 두려움에 직면하죠.

 

요셉이 그동안 아버지 때문에 복수를 미루고 있지않나 생각했었다는 것이죠.

이제 아버지가 죽었으니 큰일 난 것입니다.

요셉에게 온 지 십 칠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삼십 년 전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그 문제에서 놓여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죄는 쉽게 잊혀져서는 안될 만큼 큰 죄입니다.

만일 내 형제들이 나를 구덩이에 밀어 넣어 죽이려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납치해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염전 노예로 팔아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요셉이 형들에게 베푼 것을 보면 용서했다는 걸 알 만도 한 데, 왜 아직도 그 과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셉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셉과 형들의 재회 때 살펴보았었죠.

거기 형들이 요셉에게 자기들의 죄를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과거의 죄를 뉘우치나 시험해 보고 일방적인 용서를 했죠.

물론 그 이전에 이미 마음으로 용서한 상태였습니다.

형들 입장에서는 그냥 어물어물 용서받고 넘어간 것이죠.

그 이후로도 정식으로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을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입으로 그것을 말할 리도 없죠.

야곱의 예언을 보면 형제간에 저지른 이 악행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의외로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반드시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만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지난 주 한블리라는 프로그램에서 작년에 강릉에서 있었던 한 안타까운 교통사고에 대해 재차 다루었습니다.

할머니가 자기차를 운전해서 손자를 등교시키다 사고가 났었죠.

할머니는 크게 다치고 12살 난 손자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본 게 기억납니다.

블랙박스 속에는 당시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는 당황한 할머니 말과 손자 의 이름을 절박하게 불러대는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수집 된 많은 영상 속 장면을 보면 명백한 급발진 사고죠.

그런데 그 할머니가 교통사고 과실치사로 형사입건 된 상태라고 합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어린 아들을 가슴에 묻은 채, 어머니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애를 쓰고 있더군요.

아들 부부는 사고 난 뒤 처음 맞는 설 명절에 울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어머니댁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문 앞으로 달려 나와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계속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잘못한 것도 없이 사죄를 하고, 아들은 없어진 상황이 너무 기가막혀 부부가 정신없이 집을 나와 바닷가로 가서 한없이 울었다고 하더군요.

이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잃은 아들의 고통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그렇게 용서라도 빌어서 위로하고 싶은 게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사과는 사랑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 프로그램에 보면 요즘은 아이들을 금지옥엽 키우죠.

아기가 뭐가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워 울면 황급히 미안 미안, 아빠가 미안해하며 아기한테 괜히 사과하며 달래잖아요?

깊은 사랑엔 희한하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있는 것 같더군요.

사랑하는 대상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그런 마음이 늘 있는 것 같죠.

그러니까 조금만 상대가 불편한 마음이 들어도 미안하다 바로 사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과는 단지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가 받았을 상처까지 헤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요셉은 형들에게 비로서 용서를 구하는 사과를 받았습니다.

17,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십칠 세에 형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그 악행을 삼십 년이 넘어서야 비로서 사과를 받은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사과하며 용서를 구할 때 요셉이 웁니다.

내게 큰 고통을 안겼던 사람이 내게 와 진심으로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누구나 그럴 것 같습니다.

요셉의 눈물은 노예가 되고, 또 죄수가 되었던 그 절망 속에서 울던 과거의 어린 요셉이 흘리는 눈물인지 모릅니다.

그 과거의 자신에 대한 위로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큰 잘못을 사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소한 잘못도 넘어가지 말고 사과하는 버릇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전에 친구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 친구가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을 위해 참 희생하고 고생도 많이 한 친구입니다.

시어머니를 힘들게 모시고 사느라 우울증 치료도 받았습니다.

이젠 시부모님도 다 돌아가셨지만 남편이 고생시켜 미안하다, 고맙다는 소리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남편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고 한다는 데, 남편이 정식으로 그런 말을 해 주지 않는 건 자기의 희생을 모르는 것 같다며 속상해 하더군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가까운 사이, 가족들 사이에서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말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2) 오늘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해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는 형들에게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왠지 어정쩡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어색함을 느낀다면 그 과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내 죄의 벌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야곱의 아들들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남들보다 더 악하게 살지 않는데 뭘 매일 죄인이고 회개해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어거스틴은 선이 결핍된 것이 악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쁜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는 것과 내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천양지차죠.

세상에서의 죄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고 나머지는 선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면 죄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게 그게 인간의 죄의 본색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잖아요?

죄를 항상 막연히만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회개를 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죄라고 하는 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나의 죄인됨을 항상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뭔가 내 믿음이 성경과도, 현실과도 잘 맞아 떨어지지 않고 어그럭거리는 것 같다면 근본적인 회개가 이뤄지지 않아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든 만난 성도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순간 자신이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자, 그래서 멸망 받을 자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끼는 순간 충격을 받는 것이죠.

이사야선지자는 제사장이고 성전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는 순간 어떤 탄식이 흘러나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임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립니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의 신성을 감지하고 이렇게 말하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울사도야 말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 고백하죠.

성도는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게 참 신비로운 것이죠.

사람에겐 죄가 없는 게 아니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범죄자들이 그걸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내 죄를 알고 하나님께 인정하고 고백할수록 평안합니다.

바라기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심판을 당해야 싼 죄인이라는 걸 성령과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2. 요셉이 다시 형들에게 용서를 확인해 주고 위로합니다.

요셉의 울음에는 자기에 대해서 뿐 아니라 형들에 대한 연민도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1) 무슨 말로 형들의 마음을 안심시켜줄 수 있을지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19,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변덕이 있는 사람의 용서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사람은 용서한 것 같은데,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우다 보면 과거 상대방의 잘못이 어제인 듯 생생하게 소환되죠.

누군가 내게 상처주고, 잘못한 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나지 않습니까?

물론 기억은 할 수 있지만 그걸 생각할 때마다 다시 감정이 올라오는 건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용서해야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만 하십니다.

내가 사람들을 단죄하고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용서받은 큰 죄인의 처지로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속상해서 미워하다가도 나도 그렇지, 내가 더하지그런 마음이 들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 다시 돌이키는 게 성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람들이 편안해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불안해 하지 않기를 축복드립니다.

요셉의 용서가 하나님 때문이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할 때 비로서 형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는 것이죠.

2) 또 요셉은 형들의 죄를 인정하되 그 모든 것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형들의 죄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성취하신 결과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잘 되지 않았냐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일생에 해서는 안될 짓도 하고, 남에게 상처 주고, 때로 나쁜 일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가 살아온 잘못에 비해 얼마나 과분하게 복됩니까?

하나님이 형들의 죄를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땅의 기근에서 건져주시고 자손을 번성케 하시잖아요?

우리 과거의 잘못대로 그대로 계산해서 죄값을 받았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죠.

성도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 용서와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형들을 위로합니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의 이 말에 굉장히 큰 울림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옛날엔 집도 좁은 데 친척 한두 명은 꼭 시골서 올라와 얹혀 살곤 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객식구 한명 먹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죠.

지금은 먹을 게 풍족하다 해도 누구를 돌봐주고 후원해 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칠십 명이었던 야곱의 식구들은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요셉의 가산이나 요셉의 품이 그만큼 넉넉했다는 것이죠.

요셉은 이후 죽기 전 오십여 년 간 형들과 가족들의 생활을 부족함 없이 돌봐주었을 것입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은 우리를 부족함 없이 돌보시고 기르시는 우리 목자 되신 주님에 대한 아름다운 예표로 읽혀지는 것이죠.

또 우리도 요셉 같은 복을 받고 남을 돌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를 갈무리하며 오늘 모세가 이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는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도 얼마나 회개할 줄을 모릅니까?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서 망한 게 아니라 회개를 안 해서 망한 것입니다.

회개와 화해와 용서의 축복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항상 있기를 교육하기 위함인 것이죠.

우리 역시 매일의 걸음에 죄악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믿고 회개하는 양심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요셉은 형제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1) 요셉의 유언에는 야곱과 같은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24,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애굽에 내려온 이스라엘이 큰 민족을 이루고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갈 것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예언입니다.

그 말씀은 이삭과 야곱을 통해 요셉에게도 들려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이 방문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실 것이라는 뜻이죠.

나중에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 스스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찾아오셔서 데려가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백년 뒤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사명을 주실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우리도 스스로 하나님께 나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너희를 찾아오신다고 표현한 게 참 인상적이죠.

요셉의 평생에 아마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에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만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요셉의 유언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애굽을 떠날 그 날에 내 유골을 메고 가나안땅에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나안땅에다 장사를 했지만 요셉은 그럴 처지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절대적인 지위에 있고 존경받는 요셉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 애굽에서 장례를 치르고 장사지내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애굽을 떠나는 그 날에 반드시 내 유골을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언대로 출애굽때 요셉의 유골을 메어다가 가나안땅에 묻었다고 나옵니다.

사백여년 간이나 조상의 유언이 후손들에게 계속 전달되었다는 게 대단하죠.

그만큼 요셉이 이스라엘 민족들의 구원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마지막을 요셉의 죽음과 유언으로 마치는 것은 중요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내력으로 시작되었죠.

그러나 초반인 3장부터 아담의 범죄와 함께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와 고향을 잃었습니다.

이후 성경 역사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그 잃어버린 고향으로 다시 데려가시는 구원의 대장정입니다.

야곱도 요셉도 왜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땅에 묻을 것을 부탁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나안땅에서 만민의 복이 될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땅은 영원히 그들의 땅이 되지 못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평안한 땅도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어디인들 고통의 땅이 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는 야곱과 요셉이 살아 생전 고향에 가려고 했다면 왜 갈 기회가 없었겠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족장들이 믿은 것은 더 나은 하늘의 본향이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으로는 하나님나라를 만드실 수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삭의 씨를 통해, 이보다 더 먼 훗날 가나안땅 베들레헴에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 죄를 소멸하시고 믿는 우리를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의 시민들이지만 우리 역시 본향에 갈 날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한가지 예언이 있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지구의 역사를 종결시키시고 우리를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로 시작된 성경전체의 그림인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대족장의 시대는 요셉의 죽음을 통해 막을 내립니다.

이제 야곱의 70명의 가족이 이백만 명의 큰 민족을 이루는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약속의 민족을 이루는 시작에 삽입된 오늘 사건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룰 열두 아들들은 이제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하나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한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서로 사과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고 있다는 분명하고 유일한 표징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대해서도 근본적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매일의 죄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풍성한 은혜 안에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