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05Cp06MCQ
오늘 야곱이 생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야곱의 생애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나그네 세월이고, 또 험악했지만 임종은 편안했죠.
야곱은 열두 명 아들을 모아 각각의 미래를 예언하고 축복합니다.
사유*라는 일본인 방송인이 있습니다.
슈돌이라는 프로에 아들과 함께 출연하고 있죠.
전에 아는 형님이라는 프로에 나와서 외할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유언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좀 괴짜에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이런 유언을 하고 숨을 거두는 바람에 가족들을 충격에 빠트렸다고 합니다.
‘나 사실 중국인이야’
가족들이 얼마나 어리둥절하고 황당했겠습니까?
이 외할아버지 이름이 다*오였는데, 워낙 농을 잘해서 동네 사람들이 ‘구라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죽을 때도 자기 신조대로 가족들을 웃기고 슬픔을 위로하려 그런 유언을 한 것이었겠죠.
어쨌든 지금도 그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평생을 구라다츠로 살았던 사람의 유언은 구라였습니다.
야곱이 처음 창세기에 등장했던 그대로 살았다면 야곱의 마지막도 처음과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제가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교사 모임에서 새삼 느꼈습니다.
그 중 권사가 된 분은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게 보일 정도로 온화하고 성숙해진 모습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다른 한 사람은 성품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옛날 그 사람 그대로였습니다.
사람이 변함없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두 사람을 보며 알겠더군요.
하나님이 성도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십니다.
우리가 매일 서로를 보고 있기에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우리도 분명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오늘 단점이 많았던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장래 이스라엘민족이 받을 복과 저주를 유언합니다.
이 장엄한 예언들 속에서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1. 야곱의 예언은 열두 아들의 자손들로 이뤄질 열두지파에 대한 예언입니다.
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1) 왜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 체제로 국가가 유지되었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야곱에게 열두 명의 아들을 주시고 그들로 열두 지파를 만드신 것은 장차 큰 민족을 이룰 이스라엘의 행정 조직을 미리 갖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백만 명이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가 없죠.
가나안 정복 뒤 땅을 분배할 때도 지파별로 분배했기에 수월했던 것입니다.
이백만명이 무작위로 섞여 사는 것보다 직계 조상이 같은 친족이 모이면 당연히 좋은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결속력이 강하니 함께 자기 지파를 지키겠죠.
결과적으로는 나라가도 더 강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 체제를 만드시고 전체를 대표할 두 지파로 유다지파와 요셉지파를 세우신 것입니다.
2) 1절에서 ‘후일에 당할 일’이라는 말은 보통 먼 미래, 구원의 날, 종말적인 날로 성경에서 주로 쓰입니다.
즉 자손들의 가까운 미래 뿐 아니라 마지막에 성취 될 메시야의 구원까지 야곱이 훤히 내다보고 유언한다는 것이죠.
야곱이 이런 신령한 능력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요?
죽음을 준비하며 오래 기도하던 중 성령께서 자식들의 미래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예언은 뜬금없는 게 아닙니다.
야곱이 익히 보아왔던 자식들에 대한 평가가 기반이 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미래에 대한 예언을 주신다면 기상천외한 게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의 연장선상에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지 우리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꾸준한 기도가 예언이 되었듯이, 충실한 기도생활로 항상 명철과 지혜를 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3) 본문에 나온 예언을 잘 읽어보면 좋은 유언도 있고 나쁜 유언도 있습니다.
열 두 아들 중 유다와 요셉에 대한 예언은 확연히 좋은 예언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대해서는 확연히 나쁜 예언입니다.
나머지 자식들에 대해서는 다소 평범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 그렇죠.
이 예언에서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자식들이 이 예언대로 운명적으로 살게 된다는 건 아닙니다.
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게 될 걸 미리 넘겨다 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르죠.
우리 운명이 이렇게 정해졌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어떤 우여곡절의 인생을 살다가 현재의 내가 될 것임을 알고는 계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니기에 자식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달라지면 예언이 틀린 게 되어 버리죠.
이 둘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 것이 레위지파와 요셉지파에 대한 예언인데 조금 뒤에 살펴 보겠습니다.
4) 또 오늘 예언을 보면 조상들의 믿음과 행위로 자손들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보면 실제 야곱의 예언대로 됩니다.
이것도 역시 조상 탓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한 삶의 결과인 것입니다.
다만 조상들의 믿음과 삶의 방식과 기질이 후손들과 무관하지는 않죠.
사유*씨 할아버지가 장난끼가 많은 것을 사유*씨가 똑 닮았다고 하더군요.
또 한가지 드는 생각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신 예언이 우리와 무슨 관계냐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요한계시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7장을 보면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상징적인 수로 계수합니다.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명씩이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죠.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 중 자기가 무슨 지파인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열두 지파를 세우실 때 그 속에 구원받은 전체 성도들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전부 우리에게 적용해도 틀리지 않는 것입니다.
2. 열두 지파의 예언을 다 살펴보진 못하고 오늘 읽은 지파만 보겠습니다.
1) 먼저 장자로 태어난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내 장자요, 내 기력의 시작이요, 월등하고 탁월하다’고 하죠.
그러나, 이어서 말하기를 르우벤은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모인 빌하와 동침함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세속적이고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기질인 것이죠.
르우벤은 이로 인해 장자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그 후손인 르우벤지파 역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별다른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후손들도 선조 르우벤처럼 세속적이고 충동적인 결정을 합니다.
르우벤지파는 가나안정복 전쟁을 하기 직전 머물던 좋은 목초지에 눈독을 들이죠.
가나안땅을 포기하고 그 길르앗땅에 정착합니다.
약속의 땅보다는 가축을 기르며 먹고 살기에 편한 곳을 선택한 것이죠.
그렇게 가나안 본토와 떨어져 살던 르우벤지파는 제일 먼저 소멸됩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타고난 능력과 재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탁월치 못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성과 욕망과 세속적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결국은 탁월치 못하게 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지만 다 탁월하지 못합니다.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야말로 세상에 없는 탁월함을 갖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작은 능력도 점점 탁월하게 사용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입니다.
5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독특하게 둘을 묶어서 예언을 합니다.
이 둘은 레아가 낳은 아들인데 성격이 비슷하고 의기투합이 잘됐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친여동생인 디나가 세겜 부족장 아들에게 겁탈당한 뒤 할례를 빙자해 세겜의 남자들에게 보복하죠.
오늘 야곱의 유언을 보면 그들이 더 잔혹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그들이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고도 분이 안 풀려 소에게도 그런 악을 행한 것입니다.
동물 대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몰랐던 심성이 드러나기도 하죠.
그러나 사람의 잠재된 본능 속에 이런 잔인함이 다 있습니다.
요즘 OTT라는 인터넷 방송서비스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상영하죠.
사람들이 그쪽에서 개봉하는 작품들의 지나친 폭력과 선정성에 익숙해지다 보니 공중파 작품들도 점점 잔인하고 폭력적인 주제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잔혹한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야곱의 예언은 아주 냉정합니다.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 밉다 한 들 어느 친아버지가 이런 유언을 할 수 있을까요?
야곱이 자식이라는 혈연성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예언하기에 이런 유언을 할 수 있는 것이죠.
(1) 시므온지파의 경우 야곱의 예언대로 됩니다.
시므온지파는 광야생활 마지막에 실시한 두 번째 인구조사 결과가 40년 전 출애굽 때보다 인구가 유독 절반으로 줄어든 지파입니다.
다른 지파들이 광야생활 중에도 인구를 그대로 유지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자기 지파의 독립된 지역을 할당받지 못합니다.
유다지파의 땅 내에서 일부의 성읍들을 분배받습니다.
인구가 적다 보니 자력으로는 외적과 대항할 수 없기에 유다지파에 복속되어 버린 것이죠.
분명히 호전적이고 칼을 잘 썼던 지파인데 오히려 힘이 약화된 것입니다.
악인의 번성은 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권세를 자랑한다면 그 모든 영화는 풀의 꽃과 같이 시들게 됨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2) 레위도 야곱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지파 전체에 흩어집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되죠.
광야40년 여정 중에 레위지파 사람들은 모세를 도와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충성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맹렬할 때 레위지파만이 모세 편에서 범죄자들을 칼로 죽여 그 심판을 멎게 합니다.
레위가 여전히 칼을 썼고, 여전히 사람을 엄단하는 냉혹함이 있었죠.
그러나 과거에 약점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강점으로 사용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맡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레위지파는 분명히 야곱의 예언대로 온 나라에 흩어져 삽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치기 위해 열두 지파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야곱의 예언은 그들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나쁜 예언에도 불구하고 더욱 하나님 편에서 섰기에 예언대로 흩어졌지만, 속사정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죠.
우리의 현재와 내게 있는 상황들을 볼 때 우리의 미래는 뻔합니다.
우리가 잘못 된 판단을 하고 잘못 살았다면 그 결과 또한 미래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고 나쁜 성품과 습관을 말씀대로 고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3) 유다지파에 대한 예언입니다.
야곱은 유다에 대해 많은 축복의 예언을 합니다.
유다 역시 인생에 오점이 아주 많았던 사람입니다.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이 떡하니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와 있죠.
창세기에서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 위주로 흘러가는 중 사이사이 유다의 이야기가 조금씩 등장합니다.
그게 아주 짧고 단편적인데, 그것만 봐도 유다의 믿음과 지도력과 희생적인 성품의 변화가 잘 드러납니다.
야곱은 넷째인 유다에게 형제들이 절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장자권을 유다에게 준다는 것이죠.
또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을 예언합니다.
10절 보십시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통치자의 지팡이를 가진 왕조가 나올 것인데, 그 왕조가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른다고 하죠.
이것은 유다지파에서 한 왕조가 나와 통치하다, 진정한 왕인 메시야가 다스리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실로’는 ‘평화를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평화의 왕이 오셔야 온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힘들어도 희한하게 평안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 이 말씀에서 처음으로 메시야가 유다지파에서 오실 것이 예고됩니다.
예언 중에 유다지파를 용맹한 동물의 왕 사자로 비유하죠.
계시록 5장에 예수님을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합니다.
오늘 야곱의 예언이 유다지파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것이고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게 분명해 지는 것이죠.
예언 중 풍부한 붉은 포도주와 우유는 주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려갈 때 부족함이 없잖아요?
정말 우리 입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4) 요셉지파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셉에 대한 예언은 예상했던 대로 황금길이 죽 벋어있는 모양새입니다.
가지가 담장을 넘는 복, 위로 하늘의 복, 아래로 깊은 샘의 복, 태의 복을 요셉에게 줍니다.
사실 야곱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대로 실질적인 장자의 권리는 요셉에게 줍니다.
앞 장에 보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이 자기 아들로 삼아서 손자들이 각각 두 지파를 이루게 합니다.
결국 요셉에게는 두 지파 분량의 복을 준 것입니다.
당시 관례상 장자에게 두 배를 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그렇다면 열세 지파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성경에서 열두 지파 명단이 나올 때 보면 레위지파가 빠진 경우엔 요셉지파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들어갑니다.
레위지파가 들어간 경우는 그냥 요셉지파로 나옵니다.
항상 열 두지파가 유지되는 것이죠.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죠.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고 고난도 많이 당한 요셉지파에서 메시야가 오셔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 공로도 없는 유다지파에서 예수님이 나오신 것도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요셉지파가 얻은 복은 조상인 요셉처럼 형통하게 되는 복이었습니다.
특히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지파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지파가 됩니다
남북이 갈라졌을 때 북이스라엘 왕국 11지파를 대표하는 지파가 됩니다.
남유다 왕국에는 유다지파 하나만 남죠.
그런데 오늘 야곱의 축복을 잘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요셉의 모든 형통이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예언도 되죠.
북이스라엘의 중심지파인 에브라임은 나중에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역대하 11장을 보면 그때 믿음을 지킬 사람들은 다 남유다로 이주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에브라임지파는 북이스라엘에 남아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하나님의 손을 떠났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야곱의 축복을 이어가지 못하고 앗수르에 멸망 당하게 된 것입니다.
레위지파의 저주의 예언이 복이 된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가 된 것이죠.
끝까지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다면 축복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변치 않고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복을 잃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4) 그렇다면 열두 아들에 대한 예언이 모두 축복이었을까요?
28절은 이렇게 밝힙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셨더라
우리가 보기에 저주같이 보이는 예언들도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타고난 약점대로 고집스럽게 그대로 살아갈지라도 어엿이 하나님 나라의 지파들에 들어가잖아요?
자격도 없는 자들이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으니 그게 축복인 것이죠.
또 야곱이 축복할 때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만 야곱이 자식들의 믿음과 노력과 행위에 따라서 축복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받은 것 이상의 큰 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곱이 아들마다 다르게 축복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그 분량대로 위로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구원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한 은혜이지만 수고에 따라 보상하는 것도 공평하신 것입니다.
3. 야곱은 유언을 마치고 편안한 임종을 맞이합니다.
야곱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을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땅 아브라함이 산 막벨라굴 가족묘에 매장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어둠과 두려움보다 본향에 대한 소망이 뿜어 내는 것 같습니다.
이 유언은 자손들에게도 그 땅의 주인 됨을 각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마지막을 3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죠.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이 147세를 살았습니다.
야곱은 형의 발 뒤꿈치를 움켜 쥐고 악착같은 성질을 갖고 태어났었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가지려던 야곱의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단을 통해 야곱은 움켜 잡았던 것을 하나씩 내려 놓습니다.
마지막엔 끝까지 붙잡고 있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놓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요셉을 다시 만났지만 요셉을 옆에 끼고 살 수는 없었죠.
앞에 보면 요셉이 야곱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사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요셉이 총리로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고센땅에서 멀리 떨어진 바로의 궁중과 관저에서 살았으니 요셉의 얼굴 보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다 커서 결혼하고, 직장을 잡고 바쁘게 살면 부모들은 점점 자식 보기가 어려워지잖아요?
성경을 보면 요셉이 데려온 두 손자를 인자하게 축복하는 야곱에게서 어떤 집착도 섭섭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년이 되어 우리가 할 일은 땅의 것, 혈육의 것은 손에서 놓고 영원한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야곱의 죽음에서 저는 인상적으로 보이는 게 있습니다.
야곱이 유언을 마친 후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고단한 인생에 많은 곳을 걷고 돌아다녔을 그 발을 스스로 침상에 모으는 모습은 편안하고 복된 죽음입니다.
우리의 만년의 모습을 야곱에게서 배우고 야곱과 같이 마치면 좋겠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자식들에게 믿음을 지키라 유언하고 큰 고통 없이 기쁘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야곱은 어디로 갔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살아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백년 뒤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설명할 때 이 부분을 예로 들으시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죽음에서 부활을 볼 수 있는 것이죠.
이 부활의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생을 살다 두려움 없이 세상을 마칠 수 있게 합니다.
야곱처럼 이 영생의 소망이 점점 더 확실한 믿음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곱의 유언은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운명이 정해졌던 것은 아니었죠.
아버지 야곱의 마음으로는 오히려 그런 미래를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라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 지파의 미래와 장단점을 내 삶에 잘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르우벤지파와 다르게 우리가 가진 장점이 주님 안에서 탁월하게 쓰임 받길 축복합니다.
레위지파처럼 우리의 잘못 살아온 과거가 주님 안에서 복되게 바뀌시길 축복합니다.
유다지파의 사자인 예수님께 늘 감사로 예배함으로 요셉지파처럼 담장을 넘는 복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예수님만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다 야곱처럼 복되게 하나님께로 가서 영생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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