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37장1절-28절 (요셉의 꿈)

남수연 2023. 9. 2. 22:27

https://www.youtube.com/watch?v=Q37lU7XpaIU 

창세기가 이제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 넘긴 사건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 이후에 역대급 사건이죠.

요셉이 오늘 두 가지 꿈을 꾸는 데, 이 꿈은 이 사건과 앞으로 전개될 창세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요셉의 꿈은 개인의 성공에 대한 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꿈의 결말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죠.

그래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잘먹고 잘 살다 죽었더라가 아닙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그렇게 끝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결과로 야곱의 70명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큰 민족으로 형성되는 역사로 이어집니다.

본문의 사건을 이렇게 구원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우선입니다.

또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게 된 야곱의 가족사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지난 주 야곱 앞을 가로막았던 태산 같던 에서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거류하던 땅에서 야곱의 가족들의 새 삶은 시작됩니다.

에서와 화해는 했지만 사람의 감정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죠.

그 부담스럽던 에서는 제 발로 가나안땅을 떠나 요단 동편 세일땅에 거주지를 정합니다.

이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땅의 주인이 되면 되는 것이겠죠?

그럴까요?

이스라엘의 시나리오는 애석하게도 그렇게 쓰여있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의 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 말씀 기억하십니까?

네 후손이 외국에서 종이 되어 섬기다 4백년 뒤에야 가나안땅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야곱과 자손들이 외국으로 내려갈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역사 속으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것이죠.

오늘 요셉이 노예가 된 결정적 사건은 요셉의 꿈 때문입니다.

꿈은 꿔지는 것이지 내 의지대로 원하는 꿈을 꾸는 게 아닙니다.

요셉을 상상도 못할 인생 소용돌이로 몰고 갈 꿈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죠.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 불행한 사건을 조장하신 건 아닙니다.

인간의 자기결정권과 하나님의 섭리 사이에 어떤 신비한 공식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히 이 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은 야곱의 가족들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그 회오리의 방향을 애굽으로 인도하시고 한 노예 청년이 결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게 하신 것이죠.

우리도 그런 인생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정신없이 살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원했던 꿈은 아니지만 이것도 괜찮잖아요?

하나님의 꿈을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의 수레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면 자비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 핸들에 손을 얹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 역사를 생각할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기죠.

하나님은 왜 가나안땅에서 바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지 않고 애굽에서 나라를 키워 가나안으로 데려오셨을까요?

이건 모종을 키워 옮겨 심는 정도가 아닙니다.

논밭에서 다 키운 곡식 전체를 다른 땅에도 옮겨 심는 것이잖아요?

역사상 어느 나라도 이렇게 세워진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굉장히 특별한 방식으로 세우신 것이죠.

그 이유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 가나안땅으로 들어와 정착한 야곱의 가족들은 급속히 가나안 문화에 동화됩니다.

가나안 여자와 결혼을 하고, 섞여서 사업을 하고, 가나안의 타락한 성문화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아직 소수인 야곱의 가족들이 가나안을 지배하는 우상종교와 타락한 문화에 영향받지 않고 하나님나라로 세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세대를 넘어가지 못해서 민족 전체가 가나안화가 될 것입니다.

먼 훗날 사사시대가 그걸 보여주잖아요?

2) 소수인 야곱의 가족들이 이미 부족국가를 형성한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큰 나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만 세력이 커지면 싹을 밟아 버리지 않겠습니까?

데려다 노역이나 시키고 조공이나 받아 먹을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가나안 건국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할 뿐 아니라 타락한 가나안에 대한 심판도 상징합니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인 예수님의 날은 동시에 세상의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들이 4백년 뒤에나 가나안땅을 차지할 것을 말씀하실 때 왜 그런지에 이유를 대십니다.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의 심판이 가나안 나라들에 집행될 그때에 맞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전쟁을 대행할 큰 나라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나안땅에 세워진 이스라엘을 통해 온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독생자를 보내시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애굽도 가나안땅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와 타락한 문화에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문명국인 애굽인들은 천한 유목민 이스라엘 사람들을 혐오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천막 치고 있을 때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섞여 살고 싶어도 끼워주지를 않는 것이죠.

총리가 된 요셉도 나중에 자기 민족이 거처할 땅을 바로에게 구할 때 애굽 도시들과는 떨어지고 가나안 본토와는 가까운 고센땅을 구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땅을 찜만 해 놓게 하시고 그 자손들을 애굽으로 옮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 역사의 시발점이 바로 요셉의 꿈 사건인 것이죠.

요셉처럼 분명히 꿈으로 보여주지 않으셨다 해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꿈은 반드시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꿈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과정은 요셉처럼 모든 구간마다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꿈은 나 개인의 영광이나 성공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자신을 가장 값지고 보람되게 하시는 꿈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꿈을 잘 발견하고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약속 안에 들어온 야곱의 가족들은 죄와 본능 속에서 살아갑니다.

구원이라는 세계 안에 들어 왔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렇게 살죠.

각자의 본능에 충실하게 살면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집니다.

오늘 요셉을 팔아넘긴 악랄한 범죄 배후에는 오래 쌓인 가족 간의 감정문제 뿐 아니라 후계자 다툼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동경했듯이 야곱의 열두 아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장자의 축복이 누구에게 갈지가 관심사였습니다.

물론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그런 계시는 알 턱이 없고, 사실 그런 믿음의 복에 관심이 있는 아들들도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야곱이 약속받은 큰 나라를 다스릴 아들이 누구냐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 명의 형들과 요셉이 두 가지 문제로 갈등 구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 요셉과 형들의 감정적인 갈등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대신 모든 가족들의 시기와 원망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가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가 2절에서 4절까지에 잘 나옵니다.

2절을 보면 그때 요셉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아니라 장성한 청년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함께 가족의 생업인 목축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 아들들과 함께 지냈다고 하죠.

대가족이다 보니 가족별로 각각 장막을 치고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모친 라헬은 요셉이 일곱 살 정도 될 때 막내 베냐민을 낳다 사망합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요셉과 베냐민을 누가 키웠겠습니까?

라헬의 여종인 빌하가 키웠겠죠.

레아의 여종인 실바도 가까이 지내며 함께 요셉과 베냐민을 돌봤을 것입니다.

빌하에게는 두 아들 단과 납달리가 있었고 실바에게는 갓과 아셀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이 네 명의 이복형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죠.

야곱의 성장 과정이 생각보다 불우했을 것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이 요셉에 대한 야곱의 애정만은 폭주 그 자체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 일찍 어미를 여읜 요셉에 대한 애정은 맹목적이다시피 했습니다.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조금만 깊이 생각했다면 이런 노골적인 차별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분별이 없으면 자식들 가슴에 대못을 박게 됩니다.

많은 아들 중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요셉이 다른 가족들에겐 자기 불행의 원흉으로 여겨지는 것이죠.

요셉을 볼 때마다 상처가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요셉의 성품은 형들을 배려할 정도로 온화하지는 않습니다.

함께 가축을 치던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렀다고 하죠.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안 좋게 말하면 고자질하는 성격인 것이죠.

나중에 애굽에서 살게 된 요셉이 일을 처리하는 걸 보면 억울한 것을 혼자 삭이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굉장히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고 야곱 못지않게 꾀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요셉의 삶은 더 편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면 형들이 요셉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하죠.

이 말의 원뜻은 샬롬이라는 평범한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뚯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요셉도 고난을 통해서 연단되는 걸 마지막에 볼 수 있습니다.

 

2)이복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이 요셉에게만 향하는 걸 보며 더욱 부성애의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다같이 사랑받지 못하면 오히려 애정 결핍도 모릅니다.

우리 때는 자식들이 한 방 가득이고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의 불이니 어떤 자식을 편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편애하고 싶어도 더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죠.

그래봤자 큰 자식 도시락에 몰래 계란후라이 하나 더 얹어 주는 정도였죠.

야곱의 형들은 눈에 띄는 차별 속에서 불안하게 성장했습니다.

이복형들은 어려서부터 요셉의 모친 라헬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식하는 걸 보고 자랐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엄마를 보고 자라는 것은 자식들에게 큰 불안감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낮은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이 엄마에게만 야박한 게 아니라 자식인 자기들을 향해서도 똑같았습니다.

애정이 바짝 마른 집안에서 형들의 인성은 점점 왜곡되며, 피해의식은 커가고, 부정적이고, 악한 본성 쪽으로 기울게 되었던 것이죠.

이 아들들에겐 야곱이 에서를 만나던 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났으리라 생각합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날 때, 에서에게 줄 선물의 떼를 앞세워 종들에게 맡기고 그 뒤에 자기 가축들을 둡니다.

그 뒤에 가족들을 배치하는 데 가족도 그룹을 나눕니다.

야곱이 참 매정한 사람인 게 여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맨 앞에 여종 둘과 그 자식들을 세웁니다.

그 뒤로 레아와 그 자식들을 둡니다.

그리고 제일 후미에 안전하게 라헬과 요셉을 둡니다.

앞에 너희들은 총알받이가 되도 좋다는 것인가요?

이미 청소년기에 있던 그 아들들이 그 대열의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마음으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가정과 가족 관계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범죄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도화선은 요셉이 꾼 꿈입니다.

요셉이 두 번의 꿈을 꾸고 형들과 아버지에게 이 꿈을 이야기를 하죠.

그 결과 형들은 요셉을 죽도록 미워하게 됩니다.

꿈의 내용은 잘 아시는 데로 7절과 9절에 나옵니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9,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사람들이 보통 요셉이 어릴 때 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이로 치자면 거의 스무살이 다 된 나이에 꾼 꿈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철없는 아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신기한 꿈 얘기를 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요셉은 야곱으로부터 상속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 지위를 은근히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지어 입힌 채색옷은 색동옷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통만 있던 당시의 평상복과 달리 긴 팔이 달리고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을 말합니다.

이런 옷은 집안의 어른이나 상속자들이 입던 옷입니다.

요셉이 장남이 아닌데도 어려서부터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죠.

야곱이 자신의 상속자를 요셉으로 내정했다는 뜻입니다.

요셉도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요셉에게는 그래도 다른 형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형들이 동생 죽이려고 모의하는 걸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죠.

그런데 요셉은 야곱의 상속자라는 아무런 사인을 하나님께 얻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의 택하신 증거가 있었잖아요?

그러다가 드디어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꿈을 꾸게 된 것이죠.

그렇기에 요셉이 6절에서 대단히 흥분해서 형들에게 명령하듯 말합니다.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형들도 내 꿈을 들으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결정됐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형들의 반응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8,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또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죠.

이번엔 아버지까지 불러다 놓고 꿈이야기를 합니다.

형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겠죠.

야곱은 부모까지 머리를 숙일 것이라는 요셉의 꿈 이야기에 역정을 냈지만 속으로는 어땠을까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하나님이 요셉에게 장자권을 주시는구나.’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며 꿈을 마음에 담아 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유다에게 장자의 명분이 가고 실질적인 장자 역할만 요셉이 합니다.

 

4. 이 꿈의 결과로 요셉은 아버지 집을 떠나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1) 그 일은 이렇게 무심한 둣 진행됩니다.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꿈 이야기로 형들과의 관계가 더 서먹해진 것을 안 야곱은 자기와 형의 관계를 떠올렸습니다.

마침 요셉의 형들이 세겜이라는 장소까지 올라가 양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세겜은 앞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야곱의 고명딸인 디나가 세겜 여자들을 구경하러 갔다가 세겜 족장의 아들 하몰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이에 분노한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혼인을 빙자한 할례를 행하게 한 뒤 회복 중인 세겜의 남자들을 몰살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곳에 가서 양을 친다는 게 야곱에게는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이 잘 있나, 양 떼는 무사한가.’

그래서 형들의 안부를 알아 오도록 요셉을 보냅니다.

아마도 동생이 그 먼 길을 혼자 심부름 온 걸 보면 형들의 마음이 좀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 리브가가 에서의 마음을 달래려고 야곱 혼자 외삼촌집으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이죠.

야곱은 요셉에 대한 형들의 미움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요셉도 꿈 얘기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백킬로 넘는 길을 달려온 자기를 보고 형들의 마음이 풀리길 바랐겠죠.

그러나 아버지와 요셉으로 인한 형들의 상처는 이미 시기심을 넘어 살의로 변해 있었습니다.

시기심과 살의는 뿌리가 같죠.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착한 아벨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자기는 싫어하신다는 것이잖아요?

요셉의 꿈을 형들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내게 엎드려 절했다는 요셉의 말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사람이 자존심을 상하고 나면 자가치료를 위해 반격할 준비를 합니다.

가족 간에도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고 나면 반격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내게 곱게 말하지 않는 것 같다면 내 말투에 문제가 있지 않나를 생각해 볼 만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시 태생이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인정에도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절대왕권을 가진 왕들이 마지막엔 사람들에게 신으로 군림하기 위해 신의 아들을 자처하게 되는 것이죠.

신앙생활 좀 오래 하고 열심히 하는 신자들이 자칫 남보다 더 영적으로 우월해지려는 욕망에 빠지기가 참 쉽습니다.

자기의 신비한 영적 체험을 주로 말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에게만 불만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0절에 잘 드러나죠.

하나님의 계시를 꿈꾼 요셉을 죽이고 어디 그 꿈이 이뤄지나 보자고 하죠.

야릇한 말투 속에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이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음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최고의 악을 통제할 기능을 삭제합니다.

인간다우려면 최후의 보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아들들이 역기능 가정에서 차별당하며 살았다는 것은 이해됩니다.

사람이 차별하는 것은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다 똑같습니다.

0 이라는 승려가 불교계의 전설인 성0 승려에 대해 이런 책망을 하더군요.

해인사에 함께 있을 때 서울대 출신의 수행자가 오면 모조리 성0 스님이 자기 제자로 데려갔다는 거예요.

자기는 학력이 부족해서 아무도 제자 삼아주지를 않아 행자 생활을 오래 했다고 억울해 했습니다.

다 비운다는 사람들 속에서도 차별이 나옵니다.

요셉의 형들도 아버지에게 차별당한 억울한 피해자였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우리도 다들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인생은 없습니다.

결국은 다 자기 결정권으로 그것을 택하는 것이죠.

형들의 경우 현재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할 것만은 아닙니다.

부자 아버지 야곱 덕택에 평생 가난을 모르고 살았잖아요?

그게 행복할 조건이 안됩니까?

가난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는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죠.

자유민으로 먹고사는 것만 해도 큰 복입니다.

소수 부족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든 이웃나라에게 모든 것을 뺏기고 노예가 될 수도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또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가나안의 주인나라를 만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게다가 야곱의 자식인 자기들은 큰 민족의 지도자들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잖아요?

사람이라는 게 누구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막대기 같습니다.

하나님이 스가랴서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꽤나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던 요셉도 마찬가지잖아요?

타다만 막대기를 불에서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불탄 모양대로 요모조모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요셉처럼 채색옷을 입고 앞장 서서 공동체의 생존을 이끌어 갑니다.

누군가는 양을 치고 젖을 짜며 가족들의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야곱의 형들처럼 비교하고 질투하며 죄짓는 나를 합리화시키며 불행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믿음으로 해석만 잘해도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르우벤과 유다에 의해서 요셉은 다행히 목숨을 부지해 미디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립니다.

그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예가 되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이죠.

야곱의 집을 들여다 보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우리 인생이 보입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야곱의 집에 하나님은 결국 복을 주십니다.

그들이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 안에 들어왔기에 그런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도 회개하고 요셉을 껴안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인생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죠.

오늘은 요셉처럼, 야곱처럼 절망하고 상실감에 울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된 계획은 우리 인생 내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모든 상황들을 믿음으로 잘 해석하고 행복한 자기결정을 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