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RUHMiX4BJ7Y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알려면 창세기에서부터 잘 출발해야 합니다.
창세기 말씀을 나누며 우리 신앙이 더 깊고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리라믿습니다.
오늘부터 노아의 방주에 대한 말씀을 3주에 걸쳐 나누겠습니다.
1. 대홍수와 방주이야기는 4장과 5장에 나온 족보로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밝히는 것은 이것이 실제 역사인 줄 알라는 것이죠.
지난 주 4장에서 의로운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추방당한 가인이 낳은 자식들의 족보가 4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 셋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다시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아벨처럼 하나님을 믿고 제사를 드린 믿음의 자손이 다시 나온 것이죠.
그래서 5장에는 아담으로부터 셋으로 이어진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의 족보와 배치되는 믿음의 족보인 것이죠.
5장의 족보를 보면 누가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몇 세를 살다가 죽었다는 형식으로 아담부터 노아까지 열명의 조상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런 족보를 보통 무심히 넘어가지만 알고 보면 다양한 정보를 담아 놓은 보물창고입니다.
5장의 족보에서 오늘 참고할 것은 라멕이 노아를 낳은 부분입니다.
28절,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가인을 낳고 하와가 했던 말이 떠오르죠.
라멕도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 노아를 창세기3장15절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여자의 후손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계속 이 줄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멸망한 인간을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모티브를 계속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때로 택하신 인물들을 통해 여자의 후손에 대해 암시하십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구원의 방주가 되실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노아시대 대홍수에 대해서 알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그냥 교훈을 주기 위한 설화로 생각합니다.
사실 나라마다 대홍수에 대한 전설이나 설화가 있습니다.
성경 외에 많은 나라에 대홍수에 대한 전설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실제로 대홍수가 있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홍수에서 생존한 노아의 세 아들이 여러 민족과 나라를 이루었다면 당연히 그 엄청난 사건이 전승되었겠죠.
우리는 대홍수를 지구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로 믿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노아시대 대홍수를 사실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종말엔 노아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물로 악인들이 멸망했듯이 최후에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셨죠.
그리고, 5장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이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누가복음3장에 있는 예수님의 족보 속에 이 족보가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노아와 대홍수 심판이 실제 역사라는 것이 예수님의 족보 속에 있음으로 뒷받침되는 것이죠.
앞으로 살펴보는 내용을 통해서 대홍수 사건이 실제였다는 것을 더 확신있게 믿게 될 것입니다.
2. 본문으로 들어가 왜 하나님이 대홍수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땅에 사는 생명체들을 몰살시키셨냐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에서 먼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1)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셋의 자손들마저 믿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언제나 죄를 짓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 가정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의 자손이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악인들과 똑같이 되었기에 끝이 온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증거 할 사람도, 믿을 사람도 없어지면 세상은 끝입니다.
셋의 자손들마저 하나님께로 부터 돌아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넓게는 하나님을 쏙 빼고 쾌락을 추구한 세속문명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결정적인 이유로 성경은 성의 타락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수요기도회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을 파멸시킬 발람의 꾀는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이었습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원하는 자들을 다 아내로 맞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이유 중에 타락한 성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동성애나 낙태나 성적 방종을 어떻게 합리화하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특히 성적인 타락에 대해서 고린도전서는 강력히 경고합니다.
3장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경이 이만큼 엄중하게 경고한다면 깊이 새기고 잘 지켜야 합니다.
4장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철기문명을 만들고 악기를 제조하며 세속문명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그중 소년을 죽인 라멕이라는 자는 살인을 자랑스럽게 떠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죽이고, 속이고, 죄짓는데 두려움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도 어느 정도는 지금보다 더 부도덕하고 타락할 것입니다.
2) 그런데 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로 보고 천사와 사람의 딸들이 동침해서 자손을 낳았다고 성경 몇 군데를 가지고 주장합니다.
이 해석은 아주 터무니없이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런 생각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나 나올 상상입니다.
어려운 내용일수록 성경 일부분에서 해석을 끌어내는 것보다 근본이 되는 큰 진리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사를 육체가 아닌 영적인 존재로 진술합니다.
성경엔 가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천사들이 나오죠.
소돔성이 멸망하기 전 롯이 접대했던 천사들은 잘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천사가 사람의 형태를 취한 특별한 경우가 몇 군데 나오지만 그것은 세상에 특파하신 천사의 경우입니다.
자연 세상에 천사의 형상이 돌아다니는 이변을 막기 위한 조처이십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어쨌다고 하는 것들 다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은 우리 같은 신체나 장기들이 없습니다.
천사들만의 독특한 형상과 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논쟁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마가복음 12장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하실 때 생식 능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생육하고 번성하지 못합니다.
천사들이 내려와 여인과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엉뚱한 발상입니다.
그런 생각이 에덴동산에서 사탄인 뱀과 하와가 동침했다는 이단들의 교리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렴 하나님이 천사와 여인 사이에다 아기를 창조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계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세속문명의 여성들입니다.
3) 또 4절에 나오는 네피림이 누구냐는 의문입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도 역시 천사와 사람이 결합한 반신반인이 아닙니다.
이 네피림이라는 말이 성경 민수기에도 나오죠.
가나안을 정탐했던 사람들이 그 땅에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자손을 대장부들을 보았는데 우리는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다고 보고했죠.
오늘 창세기와 민수기는 다 모세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보았던 네피림의 후손은 창세기의 네피림후손일까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홍수에서 네피림도 다 죽었잖아요?
창세기의 네피림을 알 수 없다면 민수기의 네피림을 보면 압니다.
그들이 대장부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피림은 시대마다 있었던 괴력을 가진 거인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만일 네피림이 반신반인의 인종이었다면, 모세 당시 가나안땅에 그런 잡종이 살았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네피림이란 말은 넘어뜨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괴력을 가진 거인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거인 골리앗이 있죠.
사무엘하21장을 보면 블레셋의 거인족들과 싸운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골리앗의 동생도 거인인데 창자루가 베틀채 같았다고 합니다.
또 바산왕 옥이라는 사람은 사용하던 철침대의 길이가 4미터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격투기 최홍0선수는 키가 2미터18센티, 농구선수 하승0선수는 2미터21센티입니다.
서장0씨는 2미터7센티입니다.
세계에서 기네스북에 등재된 제일 큰 사람은 영국인인데 2미터72센티입니다.
그 사람과 일반인이 서 있는 사진이 있는데 정말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거인 같아 보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피지컬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아당시에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진 거인족, 네피림이 포악을 행하고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4) 또 4절에서 사람의 아들과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용사로서 당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혼이 분명히 합당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낳은 자손들이 출중했다는 뜻이죠.
유명하다는 말을 우리는 좋게만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셋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돌아섰지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에게 주셨던 남다른 지혜와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사람이 지혜롭고 명석해집니다.
그런 능력이 세속문명 속에서도 뛰어난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세상에서 잘되는 나를 동경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려는 뜻은 이것입니다.
외모로 날리는 여성들이나, 피지컬100에 나올듯한 사람들이나, 머리가 좋고 지휘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나 다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다 홍수로 심판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유명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지도 않았던 노아 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고, 잘 나가는 사람들에 하나님은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잠언 31장 30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역대하 16장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칭찬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포악한 네피림과 세속적인 영웅들이 사람을 지배하던 때가 노아시대였습니다.
힘과 권력에 압제 당하고, 인간 우상에게 열광하는 지금 세상도 똑같죠,
3. 이제 땅에서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던 의인은 노아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만 살았잖아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의인이 누구 밖에 없었습니까?
롯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나 혼자만 구원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냐고 하셨죠.
갈수록 믿음을 지키는 자는 고독할 것입니다.
이미 세상 속에서 신자들은 고독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이 말씀에서 신약성경의 구절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요한복음1장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두 군데 육신이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입니다.
육신이 된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영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와 같은 모양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육신이 된 너희를 다시 영의 아들로 부르시겠다는 것이죠.
3절,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120년은 노아가 배를 지은 시기라고 봅니다.
베드로전서 3장20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가 배를 짓는 동안 오래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또 베드로후서2장5절을 보면 노아가 의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죄인들에게 주어진 120년은 노아가 배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전한 말을 듣고 회개할 기간인 것이죠.
지금도 죄인들에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평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렇게 노아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는 어떨까요?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나면 사람의 악은 고삐가 풀립니다.
사람의 악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법이 있고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서로 염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세상에 악이 없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입니다.
요즘 범죄 뉴스를 보면 경악스럽죠.
한 살도 안된 아들을 굶겨 죽인 잔인한 모정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습니다.
겨우 구조된 아들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난 주 우리 사회를 정말 경악하게 하는 범죄가 있었죠.
스물세살 먹은 여성이 딸아이 과외를 받겠다고 위장해 또래 여성에게 접근해서 살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훼손해서 유기하는 엽기적인 일을 벌였습니다.
기사를 보니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얼만큼 잔혹하게 남을 해칠 수 있는지 두렵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타락했는지 이미 사람 살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뺏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사회에 성적 타락까지 인간의 악이 순식간에 세상을 덮은 것이죠.
사람의 악은 성장이 필요 없이 타고날 때부터 이미 완성형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욕망 덩어리죠.
죄악이 관영해 지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악한 이들에게 악한 자손이 더 번성하도록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심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 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 심판을 가하십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 이전에 먼저 나쁜 소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죄와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알아야 십자가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도 하나님은 심판을 숙고하십니다.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단어는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찢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자식이 범죄자가 되고 전과가 늘어나는 것을 볼 때 부모마음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과 진심을 담아서 창조하셨는지는 하나님이 하신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을 위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가치가 없고 혐오스러워서 모두 쓸어버리면 그만일 인간이라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를 내 주시겠습니까?
그렇다고 동물들까지 다 죽이실 필요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식물과 자연을 누구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까?
사람에게 주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다 죽는 데 자연만 남아있는 게 더 처연하죠.
사람이 다시 번성하며 자연도 다시 번성하게 되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결정된 것입니다.
4. 그들 중에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됩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기에 은혜를 입은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에 믿게 된 것일까요?
이 두 가지는 하나씩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있다면 다른 하나도 반드시 있는 것이죠.
우리가 믿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믿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가 믿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믿음을 쑤셔 넣지 않으십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성령께서 계속 감화하시면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마음을 열고 영접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평생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타락한 셋의 자손들도 한때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러나 에녹처럼 삼백년이라도 동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랬습니다.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하려면 두 사람이 서로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마음이 있어야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기 보다는 세상과 동행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사람의 죄성은 항상 영적인 것보다는 세상으로 기울어집니다.
성도들도 그런 마음을 억제하고 신앙 안에 항상 있는 것이 어렵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다보면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힘써서 기도로 하나님과 나만의 대면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속사람이 새힘을 얻으면 세상보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홍수심판이 결정된 것은 하나님의 자손들이 믿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교회에, 우리나라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나 노아와 같은 성도들이 있다면 아직은 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보통 성도들이 곁에 있기만 해도 세상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면 세상은 가짜라고 조롱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120년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 기회였듯이, 사람들에게는 바로 내가,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께 나올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에녹처럼, 노아처럼 매일 예수님을 인식하고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11장1절-9절 (무너진 바벨탑의 야망) (0) | 2023.06.21 |
---|---|
노아의 방주 (창세기6장13절-22절) (0) | 2023.06.16 |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4장1절-12절)가정의달4 (2) | 2023.05.31 |
선악과로 잃은 것과 얻은 것 (창세기37절-21절) :가정의 달1 (2) | 2023.05.16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3장1절-6절) (0) | 2023.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