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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정주일을 맞아 성도님들 가정이 선악과 이전으로 회복되는 은혜를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변화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선악과를 범한 뒤 모든 게 180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이 다르듯이 선에 속한 것들과 악에 속한 것들은 다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 범죄 이후 가장 직격탄을 맞은 게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금쪽이 상담이나 동상이몽 같이 가정 문제들을 조명하는 프로들을 보면 그것이 실감 나죠.
아마 우리들 집에 카메라를 달아두고 속마음까지 분석한다면 우리 가정들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 가정문제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행복한 가정을 위한 해답도 얻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선악과를 먹은 뒤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린 결과 인류의 조상들은 창조시의 완전함에서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이제부터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그냥 죄지은 우리 모습과 동급입니다.
아담 이후의 후손들 모두가 그렇게 태어나게 된 것이죠.
1)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생긴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소통하던 영의 기능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죠.
그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류하며 하나님을 풍성히 누리던 영의 죽음입니다.
배신하면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선악과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선하신 도덕적 성품을 물려 받았습니다.
아담은 피조물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정성껏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배우자인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습니다.
에덴 동산을 아름답게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반역을 실행한 순간 그 모든 영의 영광은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악을 선택한 순간 사랑 대신 자기 사랑이, 정직 대신 거짓이, 겸손 대신 교만이, 거룩 대신 불결함이, 모든 게 악하게 바뀐 것입니다.
그래도 일반인들 중에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회심리학자들의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은, 아무리 도덕적 인간이라 해도 처한 상황에 따라 스스럼없이 잔혹한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문명과 문화의 발달로 사람들이 점잖고 좋은 인격이 된 것 같지만 그렇게 포장된 것뿐입니다.
아마도 아담은 자기 안에 생긴 수많은 감정들의 변화에 놀랐을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마음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죠.
그래서 아무리 쉬어도 편안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괴로운 감정들을 아담이 처음 느끼게 된 것이죠.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죄와 악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사람이 죄악이 없으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이 있는 것은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인식할 양심이 심하게 고장난 사람들입니다.
7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가렸다고 합니다.
이전에 없던 부끄러움, 수치심이 생긴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아담과 하와가 거의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담이 사탄과 하와가 대화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고 하와가 건네는 선악과를 그 현장에서 바로 먹었을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다고 하죠.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자 왜 하필 몸이 부끄럽게 느껴졌을까요?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완벽하게 아름다웠습니다.
성경에 보면 천사를 빛이 나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이 순교할 때 얼굴이 천사 같았다고 기록했죠.
천사가 그 정도라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아담과 하와는 얼마나 더 빛이 나는 존재였겠습니까?
아마도 벗고 있었던 게 아니라 광채를 입고 있지 않았을까요?
사람에게서 때로 광채가 난다는 말을 하잖아요?
사람이 첫눈에 반할 때 그 사람에게서 마치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걸 많이 들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는 순간 하나님과 끊어지고, 그 영광과 광채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갑자기 수치심을 느꼈겠습니까?
죄의 본질상 죄책감으로 인한 수치심도 있지만 몸을 감싸고 있던 아름다운 광채가 사라져 몸뚱아리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빛이 없으면 아무리 자기를 꾸며도 몸뚱아리, 육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얼굴 빛이 밝아지고 광택이 나는 것 같잖아요?
오늘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은 이렇게 몰락한 모든 상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범죄 이후에 아담이 이전의 모든 영광을 잃어 버렸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영과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해서 영으로 사느냐, 육체의 소욕으로 사느냐, 우리는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이죠.
영으로 산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밉다, 별로다, 그러면 두 사람 다 육체의 소욕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밉고 별로라도 내가 성령의 소욕으로 살고 있다면 상대에 대해 그런 생각이 잘 안드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로 사는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선을 택하며 살아가야 우리 인격과 삶에 좋은 열매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과 교류하던 영이 죽은 뒤 즉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했습니다.
8절,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범죄 한 바로 ‘그 날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다고 합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마주치기가 싫어서 슬쩍 피하죠.
죄의 결과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고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나님 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배신 뒤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에덴동산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동사의 시제를 보면 ‘거니셨다’는 동사가 분사형으로 계속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제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내 자식이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식이 사고 쳤을 때, 내게 거짓말을 했을 때,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일평생 자식을 키우며 부모의 가슴 철렁한 마음을 다 모아도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의 배반은 아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적개심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만 나를 미워해도 힘들잖아요?
신이시니까 그런 것쯤은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고 멸망을 자청한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잖아요?
아담과 하와에게서는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아쉬움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기이하죠.
지금 죄인들의 현상 그대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는 동사도 미완료형입니다.
계속 피해 다니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니게 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숨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름을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은 합니다.
10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사람에겐 아담 이후로 두려움이란 감정이 생겼습니다.
현대인들은 병들면 치료해 줄 병원도 있고, 먹고 살만한 돈도 있고, 즐길거리도 많은데, 왜 그렇게 우울증에 걸리고 공황장애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근본적인 원인은 두려움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뭔가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무엇보다 신에게 벌을 받을 것 같은 본능적 두려움에 의해 세상 종교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 본능이 범죄한 아담에게로부터 유래한 것이죠.
신자들의 본능 안에도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지불해야 할 죄값을 주님이 다 치러주셨기에 벌 받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신자들이 매사에 두려움이 많아지는 것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강해지면 현실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두려운 상황들도 능력있게 이길 수가 있는 것이죠.
죄도 본성에 있는 두려움을 끌어냅니다.
해결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확신이 없기에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죄는 분명히 은혜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 견고히 하시고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예배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만큼 두려움이 없는 담대하고 견고한 믿음이 된다는 것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선악과 이후에 사람 간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 아담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11절,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절,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의 대답에서 잘못했다는 사과 한마디가 없습니다.
자신이 피해자인양 하나님과 아내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자기의 배신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틀어진 게 아니라 사랑했던 아내와의 관계도 틀어진 것이죠.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던 일체감은 사라지고 ‘저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혼생활에서 배우자가 왜 ‘저 인간’이 되는지 아시겠죠?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이타성 대신 지독한 자기애로 바뀐 것이죠.
모두가 다 ‘내가 살고 보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동기는 자기 사랑에서 나옵니다.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듯 내가 아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합니다.
내 생각은 안 하고 가족을 보고 이기적이라고 속상해 하면 안됩니다.
좋은 가정을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좋은 사람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예수님 말씀대로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혈연도, 부부간에도 이 본능의 한계에 늘 부딪치는 것이죠.
이런 것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면 괜히 섭섭해하고, 혼자 시험에 들고, 관계가 서먹해지고 그런 것입니다.
차라리 나와 너의 이런 한계를 인정해버리는 것이 더 속 편할지 모릅니다.
다만 가족들이 서로 한번씩 양보하고 한번씩 서로 잘 해주고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좋은 관계가 쌓여가리라고 믿습니다.
열심히 가족을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려고 우리가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가정을 복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 미국공중보건서비스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로움이 담배를 매일 15개비씩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정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또 현대교회는 성도간의 긴밀한 사랑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 중에는 이 믿음 공동체가 들어 있습니다.
믿음의 가족인 성도 간에 받는 위로와 격려를 성경이 얼마나 중요하게 말씀하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신앙의 가족들이 친밀해지도록 힘쓰면 긴 믿음의 여정에 든든하고 복된 동반자들이 될 것입니다.
4)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추가적인 징계를 하십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도 저주를 받아 이전의 좋은 환경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으려고 결심했을 때는 자기만 생각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미 1장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을 주셨거든요.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이 자기가 선택한 결과를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이 도박을 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마약을 할 땐 가족들이 고통 속에 내몰릴 것을 알고도 하는 것입니다.
가장이 사업을 잘 못 해 부도가 나면 가족들이 다 거리로 내 몰립니다.
아담이 악을 선택하고 죽은 영이 되자 모든 자식들도 아담과 똑같이 죽은 영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죠.
아담에게 맡겨졌던 자연과 환경들도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는 게 고달픈 데 한 몫하는 게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땀 흘려도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일 지치게 일해도 수입은 늘 풍족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큰 부자와 한끼도 못 먹는 극빈자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일한 만큼 똑같이 먹고 살 수 없는 것도 경제 환경이 비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내게 주신 땅은 다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8장에 보면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죠.
성도들을 통해 피조세계도 다시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잘 믿는 데 경제여건이 점점 더 나빠지는 일은, 글쎄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미 악화 된 재정상태도 좋아지는 것을 저는 경험했고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 모든 가정에 주신 삶의 터전이 고쳐지고 더 복되게 해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2.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사탄에 대해 벌을 내리십니다.
1) 먼저 14절에서 사탄을 뱀으로 빗댄 만큼 동물 뱀에게 빗댄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리고 뱀의 실체인 사탄에게 필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는 최초의 복음, 원복음이라고 합니다.
창세기3장에서 이미 범죄로 타락한 죄인을 구원할 복음을 준비하신 것이죠.
여기서 여자의 ‘후손들’이 아니라 단 한 사람 여자의 ‘후손’입니다.
유일하게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님과 한 인격체 사탄과의 필연적인 싸움을 예고하시는 것이죠.
결과는 예수님이 승리를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아담에 속해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로 지낼 사람을 결국 구원하셔서 예수님 안에서 다시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 방법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해서 공의의 형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렇게 실물교육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한 수치와 파멸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죄책으로 인한 수치와 심판을 무언가로 가려야 합니다.
그날 최초로 인간의 죄로 인해 피 흘려 죽은 동물이 있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죄사함의 피입니다.
히브리서9장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성경은 인간의 죄로 인해 셀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피흘려 제물이 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몸을 드려 인간의 모든 죄를 속죄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죄없는 동물이 죽어 피를 흘리고 가죽이 벗겨지는 그 모습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는 모형인 것이죠.
그 사실을 믿는 우리는 죄를 가릴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선악과를 먹은 뒤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죽옷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될 것에 대한 언약이었던 것이죠.
2) 아담과 하와에게 영적 죽음 이외에 추가적인 벌을 내리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벌이라고 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단지 벌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간에겐 가장 큰 형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아무런 복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악한 본성이 불러오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거기에 무슨 벌을 추가로 내리시겠습니까?
여기서 내리시는 벌은 벌 같지만 사실은 타락한 인간이 가정을 유지하고 구원의 기회를 얻도록 주신 은총입니다.
오늘 아담과 하와에게 내린 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16절을 보면 하와에게는 임신하고 자식을 낳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습니다.
고통을 크게 더 하시면 여자가 아기를 안 낳을텐 데 그것이 어떻게 형벌이 되겠습니까?
임신과 출산과 양육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모성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악 세상이라 해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위안입니까?
가장 큰 고통 속에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담아 주신 것이죠.
또 아내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본성대로 하면 이기적인 남편을 사랑할 아내는 없습니다.
아내도 자기애가 있는데 손해 보는 사랑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여자에게 남편을 원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 남아 있을 가정은 거의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극도의 이기적인 사랑만 남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안위 받고 살아가도록 여자에게 이런 벌 아닌 벌을 주신 것이죠.
(2) 아담에게 내린 벌입니다.
아담에게는 17절에서 평생에 땀흘려 수고하고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남자들이 손대는 일마다 다 잘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더 많은 땅과 여자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 떠돌아 다닐 것입니다.
일이 마음대로 안 되니 저녁이 되면 갈 데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남자들이 돌아갈 집이 여럿이면 큰일이죠.
그리고 사람에게 명하여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19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것은 영의 죽음이 아니라 육의 죽음을 내리신 것입니다.
사람이 땅의 인생을 죽음으로서 마치게 하신 것이죠.
아담에 대한 최초의 계획은 아마도 육체의 죽음 없는 구원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곁에 늘 함께 있음으로써 삶을 소중히 여기고 죽음과 내세를 인식하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찾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람의 인격과 관계와 삶의 터전까지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인격은 악하게 변했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와 경제환경도 다 파탄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온 모든 파멸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으로 완벽하게 회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단 우리들이 얼마나 거듭난 영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관리하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행복이 달려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정말 노력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관리하지 않은 꽃밭은 절대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가정의 꽃밭의 잡초를 뽑고, 사랑으로 돌보고 삶의 고단함을 쉴만한 아름다운 거처로 만들어 가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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